도정 권상호의 국어야 놀자 9

기(氣)로 여는 가을

긴 여름 끝에 가을이 왔다. 가을과 관련한 일들을 생각해 보면 가을의 어원을 짐작할 수 있다.

첫째, 추운 겨울을 대비하기 위해 가을의 가장 중요한 일은 추수(秋收), 곧 ‘가을걷이’다. ‘걷다, 거두다’의 고어는 ‘갇다, 가도다’인데, 여기에서 가을이라는 말이 생겼다고 본다. 가을은 여름내 여문 곡식을 거두는 계절이다.

둘째, 부유하다는 말의 순우리말은 ‘가멸다’인데, 이 말의 고어는 ‘가ᄋᆞ멸다, 가ᄋᆞᆷ열다’로 가을의 고어 ‘가ᄋᆞᆯ’과 발음은 물론 의미상으로도 서로 통한다. 결실의 계절인 가을은 어느 계절보다도 풍요롭기 때문에 ‘가을’과 ‘가멸다’는 가족 단어라 할 수 있겠다.

셋째, 가을엔 먹을 것은 물론 입을 것도 갖추어 둬야 한다. 여기에서 ‘갖추다, 갖다’ 등의 말도 가을과 관련이 있어 보인다. 짐승의 껍질, ‘가죽’과 이로써 만든 ‘갖옷’도 갖추어야 추운 겨울을 날 수 있다.

어떤 말의 어원을 찾으려면 반드시 그 말이 생겼을 때의 사회문화적 배경을 바탕으로 탐구해 나가야 한다. 알곡을 걷는 계절로서 가을을 생각하면 농경사회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 같지만 추위에 대비할 갖옷을 갖추는 계절로서 가을을 생각하면 수렵사회적 배경도 배제할 수 없다.

각설하고, 이쯤에서 가을의 천기(天氣)를 살펴볼까나. 기의 모양을 살피는 곳은 본래 기상대(氣象臺)렷다. 가을이면 여름 내내 내리던 물 기운이 하늘로 올라간다. ‘비 우(雨)’가 ‘물 수(水)’로 떨어져 ‘내 천(川)’으로 흐르다가 모든 걸 받아주는 ‘바다 해(海)’에 머문다는 사실은 앞에서 살펴보았다. ‘해(海)’자를 보면 바다에는 늘[每] 물이 넘실거린다.

그러나 바다에서 물의 여행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바닷물은 다시 기(氣)를 받아 하늘로 올라가며 순환하기 시작한다. 물론 바다에서만 수기가 올라가는 게 아니다. 식물의 광합성작용이나 호흡작용 속에도 기는 포함되어 있다. 액체(液體)가 기체(氣體)로 바뀌는 현상을 ‘기화(氣化)’라고 하는데, 기체는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기(氣)의 원형은 수기(水氣)가 올라가는 모습인 ‘기운 기(气)’였다. 나중에 곡기(穀氣)가 있으면 기운을 차리고 곡기를 끊으면 죽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기(气) 안에 곡기를 나타내는 ‘쌀 미(米)’자를 넣었다.

기도하면 기가 올라간다. 오메, 기살어! 기를 모으면 기합(氣合)이요, 기를 나누면 기분(氣分)이다. 기에 감염되는 감기(感氣)만은 주의할 일이다.

‘기가 세다’, ‘기가 죽다’라고 할 때의 ‘기(氣)’는 활동하는 힘이나 뻗어나가는 기운을 가리킨다. 영어로 ‘energy’라 하면 비슷하게 느껴질까. 옳거니, 독일어로 하면 훨씬 이해하기 쉽겠다. energie(에네르氣)!^^ 기는 참 기묘하다.

기(氣)자의 본모습은 수기(水氣)의 모양을 그린 ‘기운 기(气)’였다. 힘이나 기운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문자로 나타내기에는 너무나 힘들었을 것이다. 기는 기인데 텅 빈 기를 ‘공기(空氣)’라 한다. 공기 속에는 비가 내리는 만큼 하늘로 올라가는 수기도 분명히 존재한다. 수기 중에 눈에 보이는 ‘김’의 모습을 나타내기 위하여 ‘김 기(汽)’자를 새로 만들었다. 우리말 ‘김’도 여기에서 나왔으리라.

물만 일어나는 게 아니다. 사람이 일어서는 것도 ‘일어날 기(起)’로 같은 발음이다. 이 글자의 모양을 보면 우리는 달리기 위해 일어선다. 그냥 제자리에서 일어서는 것은 ‘설 립(立)’이다.

물 기운이 올라가 만들어진 글자는 기(氣)와 운(雲)으로, 원래는 ‘기(气)’와 ‘운(云)’이었다. 전서에서 기(气)자는 누워 흐르던 ‘내 천(川)’자가 꿈틀거리며 올라가는 모습이다. 갑골문에서는 ‘삼(三)’와 흡사하게 썼으니, 이는 길게 펼쳐진 옅은 구름의 이미지이다. 반면 운(云)의 전서는 뭉게구름 모양이다. 놀랍게도 현대 중국에서는 죽었던 기(气)와 운(云)이 다시 살아나 본래의 뜻으로 사용되고 있다.

기(氣)는 가만히 있지 못하고 옮겨다니므로 기운(氣運)이라 한다. 국어사전에서는 하늘과 땅 사이에 가득 차서, 만물이 나고 자라는 힘의 근원인 ‘기운’을 순우리말로 보고 있다.

기는 죽기도 하고 살기도 한다. 기를 펴고 살아야 하는데, 세상살이 어디 그리 쉬운가. 어메, 기죽어! 뭔가 좀 있다고 기세등등(氣勢騰騰)하거나, 기가 넘쳐서 기고만장(氣高萬丈)하면 걱정이다. 게다가 기가 차거나, 기가 막혀서 기진맥진(氣盡脈盡)하면 큰일이다. 기세(氣勢)가 세상 사람을 압도할 정도면 기개세(氣蓋世)라 한다. 여기에서 더 나아가 기절하거나 까무러칠 정도가 되면 기절초풍(氣絕―風)이다. 기절초풍이란 몹시 놀라 질겁할 때 쓰는 말인데, 국어사전에는 ‘초’의 의미에 대하여 공석으로 비워두고 있다. 촛불처럼 금세 꺼지기 쉽다는 뜻에서 ‘촉풍(燭風)’에서 왔을까. 기절의 빠르기가 바람을 초월한다는 뜻에서 ‘초풍(超風)’일까. 아니면 기절과 초풍을 병렬관계로 보아 기절한데다가 설상가상으로 중풍(中風)까지 불렀다는 뜻에서 ‘초풍(招風)’일까. 좀 더 기를 쓰며 연구해 봐야겠다.

일본의 후쿠시마 원전 사고 이후 비를 맞거나 일본 맥주나 해물을 먹을 때면, 기겁(氣怯)을 하곤 한다. 또 있다. 시리아 내전에 화학무기가 사용되었다는 소식에 기도(氣道)와 기공(氣孔)이 막히는 듯하다. 기공(氣功)을 하면 건강을 지킬 수 있으려나?

이쯤에서 온몸으로 기를 모으자. 기를 지는 것이 기지개다. 팔다리를 쭉 펴고 한바탕 늘어지게 기지개를 펴자. 순간 가을하늘의 맑은 천기(天氣), 가을의 대지의 풍요로운 지기(地氣)는 물론 명절을 앞둔 넉넉한 인기(人氣)까지 온몸에 쌓인다. 얼쑤.

* 그림: 가을엔 기(氣)가 상승한다. 수(水), 기(氣), 운(雲) 세 글자를 통하여 물 기운이 하늘로 올라감을 보여주고 있다.

* 글씨: 運氣調息(운기조식) 기(氣)를 잘 운행시켜 호흡을 조절하며 살아간다는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