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계소식

근대 회화 명품전… 대중 곁에 선 ‘추사派’

추사 김정희.

간송미술관서 18일 개막… 장승업 등 100여점 전시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제주 유배를 마치고 돌아온 때는 1850년께다. 이미 삼십대에 추사체(秋史體)를 이루고 고증학의 길을 연 이 대학자의 주변에 장안에서 내로라하는 총명하고 공부 좋아하는 준재들이 모여든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당대에 깨어있는 지식인 중에 추사 문인이 아닌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는 기록이 전해온다. 추사도 오는 이를 막지 않아 그의 사랑방에는 늘 배우고자 하는 학인과 예인이 들끓었다고 한다.

추사는 그들과 함께 4백여년 조선왕조를 이끌어 노쇠해진 성리학을 대체할 고증학을 새 시대의 이념으로 내세웠다. 조선 고유화풍인 진경풍 서화를 부정한 것도 그것이 세월이 흐르며 고루편벽해져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 변질했기 때문이다. 청조 회화의 수용은 낡은 껍데기를 벗기 위한 활력소였던 셈이다. 옛 틀을 깨는 새로운 가치관과 정신을 일군 근대의 시발점을 추사 김정희로부터 잡아야 하는 까닭이 여기 있다.

전통미술의 보고인 간송미술관이 예순 네번째 기획전으로 마련한 '근대 회화 명품'은 '근대는 추사로부터 출발했다'는 실증을 보여주는 자리다. 18일부터 6월 1일까지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에서 열리는 올 봄 정기전은 추사의 직계 제자였던 오원 장승업(1843~97)으로부터 해방 뒤 홍익대 교수를 지낸 청전 이상범(1897~1972)까지, 간송 전형필 선생이 이들이 활동하던 당대에 대부분 수집한 서화 1백여점으로 '근대를 보는 눈'을 일깨워준다.

오원 장승업은 대중들이 이해하고 좋아한 첫 화가로서 근대회화의 원조라 할 수 있다. 부를 일군 중인 계급이 사대부 계층의 독점물이던 지위와 문화를 획득하면서 회화 감상 능력이 생기자 오원풍 그림은 큰 인기를 누리게 되었다. 이런 새 수요층의 요구로 '서화 수준의 저급화'가 일어난 것이다. 기억력이 비상해 한 번 보면 그대로 모사하는 자질이 뛰어났던 오원은 청대(淸代)의 여러 화풍을 받아들여 산수와 인믈 등에 두루 능해 근대 회화의 토대를 이뤘다.

화가들은 이런 시대의 흐름을 타고 그림 수준을 대중들 눈높이에 맞출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구한말로 접어들며 밀려드는 외세의 등살에 중국풍.일본풍.서구풍 등으로 가치 기준의 혼란이 빚어지자 추사가 주창했던 혁신적인 추사체는 서구화가, 곧 근대화라는 잘못된 논리 속에서 그 힘을 잃게 되었다.

추사의 고증학 영향으로 나비를 정밀하게 그렸던 이당 이경승(1870년대~?)이나 조선서화협회를 이끌며 관학적인 서울화단의 화풍을 일군 심전 안중식(1861~1919)과 소림 조석진(1853~1920)은 추사 일파로부터 준비된 근대 정신을 지키려했던 마지막 화가들이었다.

최완수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연구실장은 "화가들은 전통 화풍의 고수와 외래 화풍의 수용이라는 상반된 진로를 놓고 힘의 논리가 지배하는 냉혹한 현실 속에서 뚜렷한 이념적 기준없이 각자의 방식대로 그림을 그렸다"며 "오늘의 그림이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가 하는 해답을 명쾌하게 제시하는 전시회"라고 말했다. 02-762-0442.(중앙일보에서)

정재숙 기자<johanal@joongang.co.kr>
2003.05.15 09:19 입력 / 2003.05.15 10:29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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