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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예계의 큰별 일중(一中) 김충현 선생이 2006년 11월 19일 오후 8시 자택에서 별세했다. 향년 85세. |
호는 일중(一中). 어릴 때부터 일본인과는 타협하지 않는 가문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14세 될 때까지 학교를 들어가지 않았고 아버지의 지도 아래 한문과 서예 공부를 했다. 1938년 중학교 1학년 때(17세) 동아일보사 주최 전조선학생작품전에서 서예로 5개 부문을 통틀어 최고상을 수상하면서 세상에 알려졌고, 다음해 〈동아일보〉에 '궁체'에 관한 논문을 발표하기도 했다. 그러나 본격적인 데뷔는 1941년경으로 본다. 1942년 일제의 눈을 피해 〈우리 글씨 쓰는 법〉이란 저서를 냈고, 그후 〈중등 글씨체〉·〈중학 서예〉·〈고등 서예〉 등을 출간하면서 서예활동을 전개했다. 애초부터 한글로부터 서체(書體)를 시작한 그는 고체(古體)를 현체(現體)로 쓰는 법의 개발에 몰두했는데 이는 서예가 비록 한자문화권에서 나온 것이라 하더라도 그로부터 벗어나야한다는 생각에서였다. 1949년 제1회 대한민국미술전람회(약칭 국전)에 추천작가로 추대되었고, 1954년 화신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가졌다. 1958년 동방연서회 이사장을 역임했고 국전의 운영위원과 심사위원, 문교부 검인정 교과서 편찬위원을 지냈다. 그는 반세기에 걸쳐 주로 교육계와 저서를 통해 서예 교육에 전념해왔다. 1981년 회갑을 맞아 비문 등 모두 200여 점이 수록된 서집을 출간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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