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계소식

한국 서예계 거목 여초 김응현 선생 별세

서예계의 큰  두 별 일중, 여초 선생님...
형 일중 선생님에 이어 아우되시는 여초 선생님께서도
돌아오기 힘든 먼 길을 떠나셨다.
삼가 명복을 비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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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2월 1일 서울대병원서…친형 ‘일중’ 곁 장지 마련
          ‘추사 이후 여초’ 평가 받아…세계가 인정한 거장


한국 서예계의 큰 별이 졌다. 파킨슨병으로 오랜 투병생활을 이어오던 여초 김응현 선생이 2월 1일 오후 7시 서울대병원에서 별세했다. 향년 82세. 빈소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 마련됐다. 장지는 경기도 용인시 원삼면 죽능리 선영이다.

여초 선생은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 서단의 대표적인 거목이었다. 지난해 11월 19일 타계한 친형 일중 김충현 선생과 함께 한국의 근대서단을 이끌어왔다. 형 일중 선생이 ‘일중묵연회’를 통해 후학을 양성해 왔다면, 여초 선생은 1956년 설립한 ‘동방연서회’를 통해 지금까지 7000여 명에 달하는 서예가들을 직접 길러왔다. 때문에 한국 서예계에서 활동하고 있는 서예가들의 대다수는 여초 선생과 일중 선생의 제자라는 말도 전해진다. 선생이 떠나는 마지막 길은 동방연서회장으로 치러질 예정이다.

여초 선생은 평소 대쪽 같은 곧은 성품과 흐트러짐 없는 고고함으로 유명했다. 선생의 그런 성품은 글씨 속에 그대로 묻어났다. 고고한 모습으로 고개를 쳐들고 있는 학과 같은 기품과 웅혼함이 넘치는 선생의 글씨는 직지사, 길상사, 봉국사 등 전국의 사찰 편액에 남아있다. 지리산 칠불암의 경우 사찰 편액 대부분이 선생의 글씨로 장엄돼 있다. 선생의 글씨가 각지의 사찰에 이처럼 많이 남아있는 것은 평소 교계 인물들과 많은 교류가 있었기 때문이다. 직지사 조실 녹원 스님, 전국비구니회 회장 명성 스님을 비롯해 수많은 교계인사들이 선생과 친분을 쌓아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수많은 대가들을 길러낸 스승이었기에 선생은 세계적으로도 그 명성을 떨쳤다. 중국 서단의 내로라하는 인물들이 그의 글씨를 접하고 모두 감탄을 금치 못했다는 일화는 서단에서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다. 중국에서부터 시작된 필법이지만, 한국 대가의 손에 의해 완성된 서법미학의 경지가 오히려 중국인들을 매료시킨 셈이다.

중국서협 학술위원이며 중국서법대가인 종명선 서안교대 교수는 “고졸하나 우둔하지 않고 활달하나 법도가 있고, 염미하나 속되지 않고 웅혼하나 패도하지 않아 강과 유가 서로 돕고 음과 양이 조화를 이룬다”고 그의 글씨를 극찬했다.

명지대 진태하 교수도 “여초의 세계는 문자향과 서권기가 넘치는 가운데 원숙과 창로의 경지에 들어 혼연천성하고 묘합자연하여 자신만의 서법언어를 향유하고 있다”며 “추사(秋史) 이후 여초(如初)”라고 평한 바 있다.

선생의 경지는 이미 법을 떠나 있었다. 법을 떠난 그의 필법이 가장 빛을 발한 것은 지난 2000년과 2001년 조선일보미술관과 중국 북경의 300년된 박물관 ‘영보재(榮寶齋)’의 개명(開名) 100주년 기념 초대전에서 열린 ‘좌수서전(左手書展)’을 통해서였다.

당시 교통사고로 오른팔이 골절상을 입어 더 이상 글씨를 쓸 수 없게 되자 선생은 왼손으로 붓을 잡았다. 좌수서법을 선보인 것은 선생이 처음은 아니지만, 한국 서단의 또 다른 거목 검여 유희강(1911~76) 이래 처음으로 펼쳐진 좌수서법은 세간의 탄성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선생이 선보인 좌수서법에는 오른손으로 써내려간 작품에서는 볼 수 없는 자유로움과 부드러움이 넘쳐났기 때문이었다.

1993년부터 설악산에서 말년을 보내던 여초 선생은 중풍으로 한동안 손에서 붓을 놓아야만 했다. 잠시의 회복기를 통해 다시 창작의 욕구를 불태우는 듯 했지만 선생은 연이은 대수술을 거치며 투병생활을 계속해왔다.

정하중 기자 raubone@beop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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如初 金應顯
여초 김응현

字   : 善卿 / 號 : 如初  頑如  頑頓  頑璟  頑道人  頓翁  頓璟  
자   : 선경 / 호 : 여초  완여  완돈 완경   완도인  완옹  완경

堂號   : 景顔齋  無外軒  碧山廬  拜石丈室  聽松軒   
당호  :  경안제  무외헌  벽산려  배석장실  청송헌

生年月日 : 一九二七年 一月 二十二日(農曆丙寅 十二月 十九日)生
생년월일: 1927년 1월 22일 (농역 병인 12월 19일)생 (당년 79세)
 
 <<  學      歷  >>(학력)
 一九四六.      八      徽文中學校 卒業 (휘문중학교 졸업)
 一九四八.      四      東國大學 專門部 文科 卒業(동국대학 전문부 문과 졸업)
 一九五二.      三      高麗大學 英文科 卒業(고려대학교 영문과 졸업)

  <<  著      書   >>(저서)
 一九七一.      一二    東方書藝講座 全六卷(동방서예강좌 전6권)
 一九七九.      九      如初 印存(여초인존)
 一九八七.      一一    書與其人,   如初碎金(서여기인, 여초쇄금)
 一九九三.      九      東方書範一輯( 一卷 - 十卷) (동방서범 1집, 1~10권)    
 一九九四.      十      東方書範二輯(一一卷 - 二十卷)  (동방서범 11~20권)
 一九九六.      五      月刊 書藝藝術 創刊(發行人) 월간 서법예술 창간(발행인)
 一九九六.      七      金膺顯 印存 (김응현인존)
                    一一    如初 金膺顯 手墨 (여초 김응현 수묵)
  一九九六.     一二∼  現在  論文 五十餘篇 (~현재 논문 50여편)
  二ㅇㅇ一.     二      東方書範三輯(二一卷 - 三十卷) (동방서범 21~30권)

<<  經      歷  >>(경력)
 
一九五十 ~ 五一.       國會報 主幹 (국회보 주간)
 一九五一 ~ 五五.       國會圖書館 勤務  (국회도서관 근무)
 一九五三.      四      淑明女子大學校 文科大學 講師 (숙명여자대학교 문과대학 강사)
 一九五五 ~ 六ㅇ.       國會報 主幹 (국회보 주간)
 一九五六.      一二    東方硏書會 創會 (동방연서회 창간)
 一九五九.      四      弘益大學 美術學部 講師 (홍익대학 미술학부 강사)
 一九六ㅇ.      一ㅇ    大韓民國美術展覽會(國展) 推薦作家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추천작가)
 一九六五.              第一回 個人展(美都波畵廊) 제1회 개인전(미도파화랑)
 一九六七.              獨立宣言書 揮毫(서울 塔洞公園內 刻石)(독립선언서 휘호, 서울 탑동공원내 각석)
 一九六九.      五      東方硏書會 理事長 就任 (동방연서회 이사장 취임)
 一九七一.      四      東方硏書會 會長 就任(동방연서회 회장 취임)
 一九七三.      四      成均館大學校 儒學大學 講師(성균관대학교 유학대학 강사)
 一九七五.      五      大韓民國美術展覽會(國展) 招待作家 (대한민국미술전람회(국전) 초대작가)
 一九七六.      二      中國書法學會 名譽會員(중국서법학회 명예회장)
 一九八ㅇ.      一      韓國篆刻學會 會長 就任 (한국전각학회 회장 취임)
 一九八九.      六      社團法人 國際書法藝術聯合 韓國本部 理事長 就任(사단법인 국제서법연합 한국본부 이사장 취임)
 一九九四.      五      啓功·金膺顯書法聯展-榮寶齋·東方畵廊 招請(北京.서울) (계공.김응현서법연합전-영보제.동방화랑 초청전, 북경, 서울)
 一九九六.      一二    學校法人 東方學園 理事長 就任(학교법인 동방학원 이사장 취임)
 一九九七.      五      東方文化大學院大學校 發展基金展 (동방문화대학원 대학교 발전기금전)
                         金膺顯書法展(공평아트센타) (김응현 서법전, 공평아트센타)
 一九九七.      一ㅇ    寶冠文化勳章 受與(文化體育部) (보관문화훈장 수여, 문화체육부)
 二ㅇㅇ二.      三月    現在 (財)東方硏書會 會長 兼 理事長.(현재 (재)동방연서회 회장겸 이사장)
                        (社)國際書法藝術聯合韓國本部 名譽會長.(사)국제서법예술연합한국본부 명예회장)
                        韓國篆刻學會 名譽會長.(한국전각학회 명예회장)

-이후 투병중, 관련기사 첨부-

-투병중 보도 자료-

▲여초 김응현(중앙)이 일본에서 유활신침 치료를 받은 후 부인과 후견인이 켜보고 있는 가운데 1년 만에 처음으로 글씨를 쓰고 있다. 은 사진은 건강할 당시의 여초.
'21세기에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서예가'로 꼽히는 여초(如初) 김응현(金膺顯.79)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10여 년 전부터 당뇨병을 앓아온 여초는 5년 전 중풍에 파킨슨병 등 합병증까지 겹쳐 백방으로 치료를 거듭해왔다, 지난해 초부터는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한 몸이 굳어진 채 백담사 인근에서 기거하면서 치료를 받았다.

그런 여초가 지난 4일 일본으로 건너가 온천요법과 함께 기적의 신침'이라고 일컫는 '유활신침'을 맞고 난 후 손과 팔다리를 들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다소 생소한 유활신침의학은 최근 일본과 동남아 등지에선 널리 퍼지고 있는 새로운 침의학. 신경 시침을 통해 대뇌피질 정보전달 지시 계통을 자극, 생리기능 조절과 기능 에너지 물질을 몸에 불어넣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초의 거동이 새삼 관심을 끄는 것은 최근 광화문 현판 글씨 논란과 관련, 정부가 정조 어필, 한석봉 또는 김정희 글씨, 여초의 글씨 등 세 방안을 문화재위원회에 상정키로 했다고 밝히면서부터다. 유홍준 문화재청장은 이와 관련, "여초 선생님의 글씨를 1안으로 생각했으나 건강 문제로 대안을 모색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여초의 부인 양귀모 씨(60)는 "손가락 하나라도 움직일 수만 있다면 세계 어디든지 갈 수 있다는 생각으로 남편을 모시고 일본에 갔다왔는데 남편의 손과 발이 움직였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말도 제대로 할 수 없었으나 여초는 어눌하지만 의사표현도 할 수 있는 상황.

이 같은 사실이 알려지자 국내 서예계는 술렁이고 있다. 명지대 국문학 진태하 교수는 "선생님이 손과 발을 움직였고, 섰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전화를 했다"면서 "발음도 또렷하고 다시 붓을 잡겠다는 신념이 강했다"고 말했다. 서예 전문가 전광배 씨도 "기적 같은 믿어지지 않는 일이 일어났다"면서 "지금 서예계는 선생님이 다시 움직인다는 소식에 들떠 있다"고 전했다.

일간스포츠(IS)는 이를 확인하기 위해 지난 11일 직접 여초가 기거하고 있는 백담사를 찾아갔다. 기자가 지난 2일 방문했을 때만 해도 움직이지 못했던 여초가 손과 발을 번쩍 들었고, 부축을 받으며 걷기까지 했다.

일본에서 여초를 치료한 이규진 박사는 일간스포츠(IS)와의 국제전화를 통해 "손과 팔목의 기능이 회복되고 있으며 어깨 기능만 정상화되면 붓을 잡는 것은 시간문제"라고 밝혔다. 이 박사는 "여초 선생님의 건강은 최악이었다"면서 "부인의 정성 어린 간호도 움직이는 데 한몫 했다"고 덧붙였다.

정병철 기자 <jbc@ilga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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