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계소식

제주말씨 우리글 서예전 - 현병찬

“제주사투리 ‘붓 맛’ 좋아요”
 
 “제주 사투리는 고어가 살아 있기 때문에 붓글씨로 쓰면 시각적 효과가 아주 뛰어납니다. 외국인들도 영어 붓글씨에 열광하는 것을 보면 제주 사투리 서예는 세계적인 명물이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평생을 한글서예만 고집해온 한과 현병찬(玄昞璨·62) 제주도서예가협회장. 그는 퇴직금을 털어 지난 17일 제주 북제주군 한경면 저지리 문화예술인마을에 개관한 서예전시관 ‘먹글이 있는 집’에서 ‘제주말씨 우리글 서예전’을 열고 있다. 현씨와 제자들이 제주도 사투리로 쓴 서예작품 128점이 전시돼 관광객의 눈길을 붙잡는다. 이 이색전시회는 10월19일까지 계속된다.

현씨는 1957년 당시 제주사범에 입학하면서부터 소암 현중화 선생의 지도로 서예를 시작한 뒤 46년째 한글 서예의 외길을 걸어왔다. ‘한과’라는 호도 계획적으로 일을 정해놓고 후배들에게 전수하는 길이라는 뜻에서 붙였다. 그만큼 딴곳에 한눈 팔지 않고 서체를 다듬고 제자를 가르치는 일에만 전념해온 것이다.

그의 제자만도 230여명에 이른다. 이들은 한글서예사랑모임을 만들어 사투리로 쓴 한글 서체 보급에 나서고 있다. 서예전시관을 개관할 때는 미국에 있는 제자까지 찾아와 스승을 도왔다.

현씨가 제주 사투리 서예를 시작한 것은 제주말에 대한 애정 때문이다. 그는 “제주 사투리를 단순한 지역방언으로 취급해선 안된다”며 “제주말에는 탐라국 시대에 썼던 고유의 말씨가 그대로 남아 있기 때문에 제주 고유어로 대접받아야 한다”고 제주어에 대한 진한 사랑을 표시했다. 특히 아래아음 등 제주말에만 남아 있는 고문은 붓글씨로 표현할 경우 미적으로 뛰어난 효과를 발휘한다는 주장이다.

현씨는 “전라도나 경상도 사투리를 붓글씨로 쓰는 작업은 아직 시도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그만큼 제주말이 독특하기 때문에 제주 사투리를 서예작품이나 서각으로 형상화하는 작업이 지속되면 한글 서체의 발달에도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문화예술인마을을 찾는 관광객들이 제주 사투리 서예를 보고는 아주 감탄하곤 한다”며 “지방 말씨를 서예화하는 것은 여러 지역간에 문화적 가교 역할도 할 수 있다”고 덧붙였다. 실제 전시관 입구에 마련된 낙서판에는 사투리 서예를 보고 느낀 감상과 ‘너무 좋다’는 감탄사들이 빼곡히 쓰여 있었다.

제주에서는 처음으로 전문 서예전시관을 개관한 것도 제주말과 제주글을 체계적으로 다듬고 제자들이 마음껏 글씨공부를 할 수 있는 창작공간을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현씨는 지난해 제주시 동화초등학교 교장을 마지막으로 44년간 몸담았던 교직을 떠나면서 받은 퇴직금을 몽땅 털어넣어 ‘먹글이 있는 집’을 지었다.

교직에 있을 때는 경향사도대상을 받았을 만큼 제자교육에 충실했기 때문에 퇴직금은 남다른 의미가 있었다. 3억원 정도 비용 중 모자라는 부분은 자식들이 보태줬다.

100여평의 팔각형 전시공간을 갖고 있는 이 전시관은 제주에 유배왔던 추사 김정희의 세한도(歲寒圖)에 그려져 있는 집 형태를 본떠 현씨가 직접 구상했다.

그는 “서예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무료로 전시관을 쓸 수 있도록 언제든지 문을 열어놓겠다”며 “제자들이 에어컨이나 냉장고 등 용품들을 십시일반으로 모아줬기 때문에 창작에도 불편이 없다”고 자랑했다.

현씨는 한글 서체만을 고집하며 1992년 대한민국 서예대전에서 대상을 차지한 바 있다. 그는 “제주 사투리를 이용한 한글 서도의 맥을 이어가야 한다는 중압감 때문에 고민이 많다”며 “앞으로는 제자를 가르치는 일에 더욱 전념하겠다”고 밝혔다.

이를 위해 제주도서관, 우당도서관을 비롯해 동사무소 문화교실, 문화원 등 요구하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무료로 한글 서예를 가르치고 있다.

그는 “제주 사투리로 쓰여진 서예책을 수백년 후에 후손들이 보게되면 언어의 시각적 아름다움을 확실히 알려주는 증거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경향신문〈강홍균기자 khk5056@kyunghyang.com
 [속보, 인물] 2003년 07월 24일 (목) 1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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