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예계소식

반안반심(半眼半心.반은 눈으로 보고 반은 마음으로 봄)

전남 곡성군 죽곡면 연화마을에 칩거하며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1890~1977) 과 남농(南農) 허건(許楗.1907~87) 이후의
남화(南畵) 화단을 이끄는 아산(雅山) 조방원(趙邦元.77)화백의 말씀

"글씨도 크게는 그림의 범주에 속하고 '서화동근'(書畵同根.글씨와 그림은 한 뿌리라는 뜻)이란 말도 있잖소."

"그림이나 글이나 '반안반심'(半眼半心.반은 눈으로 보고 반은 마음으로 봄)이라고 하잖습니까. 눈을 기쁘게 하는 데 그치지 말고 마음을 기쁘게 하고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 재(才)가 뛰어난 글씨들은 많지만 천금 같은 무게가 있는 글씨는 보기 힘든 것 같아요."

"먹 색깔을 찬찬히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그 안에 갖은 색이 다 있는 게 보입니다. 수묵화는 농담(濃淡)에서부터 발묵(潑墨.먹물이 번져서 퍼지는 것)에 이르기까지 예술적 영감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는 기분이 좋지 않거나 날씨가 좀 음울해도 붓을 들지 않는다. 좋은 그림은 맑은 정신에서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 그의 그림들은 기운이 생동하고 기(氣)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훤칠한 키(1m78㎝)와 반백의 머리, 마른 체구, 광채가 나는 얼굴, 적은 말수 등 그의 풍모 또한 도인(道人)을 보는 듯하다.

"대작은 힘이 있어야 하는데 늙으니까 기운이 없어 잘 안 됩니다. 이제야 겨우 그림에 대해 뭔가 알 것 같은데 안타깝습니다. 세상과 인생을 알고 내 사상이 선 지금부터 그리는 게 진짜 내 그림인데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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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호
그림과 글씨는 한뿌리 일흔 넘으니 알 것 같아

"글씨도 크게는 그림의 범주에 속하고 '서화동근'(書畵同根.글씨와 그림은 한 뿌리라는 뜻)이란 말도 있잖소." 전남 곡성군 죽곡면 연화마을에 칩거하며 의재(毅齋) 허백련(許百鍊.1890~1977) 과 남농(南農) 허건(許楗.1907~87) 이후의 남화(南畵) 화단을 이끄는 아산(雅山) 조방원(趙邦元.77)화백.

약 60년 세월을 그림 그리기에 정진해 온 그가 24~28일 광주시 남도예술회관에서 자신의 상징인 '수묵 산수(水墨 山水)'가 아닌 붓글씨를 가지고 전시회를 연다. 이번 전시회에는 서예 약 30점 외에 그가 좀처럼 안 쓰는 채색의 풍속화 5점과 특유의 수묵화 8점도 나온다.

趙화백은 "그림 그리다 남은 먹물로 몇자씩 써 봤을 뿐"이라고 말하지만 그의 붓글씨는 상당한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자신의 서예 작품 가운데 6점을 골라 2001년 발간한 작품집에 넣기도 했다.

趙화백의 붓글씨는 서예에 일가견이 있는 철학자 안병욱(安秉煜.83)씨도 찬사를 보낸 바 있다. 安씨가 20여년 전 광주에 왔다가 한 식당에 걸린 그의 글씨를 보고 그를 만나기 위해 예약했던 귀경 비행기 표까지 물렸다고 한다.

"그림이나 글이나 '반안반심'(半眼半心.반은 눈으로 보고 반은 마음으로 봄)이라고 하잖습니까. 눈을 기쁘게 하는 데 그치지 말고 마음을 기쁘게 하고 움직일 수 있어야 합니다. 요즘 재(才)가 뛰어난 글씨들은 많지만 천금 같은 무게가 있는 글씨는 보기 힘든 것 같아요."

전남 신안군 지도에서 태어난 그는 19살 때인 45년 목포에서 남농 문하에 들어가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55년부터 58년까지 4회 연속 국전에서 특선을 차지했다.

59년 추천작가, 63년 초대작가 반열에 오르고 심사위원을 역임하는 등 젊은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그는 특히 30대 초반부터 먹물로만 그리는 먹 그림이라는 자신만의 독특한 화법을 전개해 왔다.

"먹 색깔을 찬찬히 들여다 보고 있노라면 그 안에 갖은 색이 다 있는 게 보입니다. 수묵화는 농담(濃淡)에서부터 발묵(潑墨.먹물이 번져서 퍼지는 것)에 이르기까지 예술적 영감이 없으면 안 됩니다."

그는 기분이 좋지 않거나 날씨가 좀 음울해도 붓을 들지 않는다. 좋은 그림은 맑은 정신에서 나온다고 믿기 때문이다. 실제 그의 그림들은 기운이 생동하고 기(氣) 같은 것을 느낄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많다. 훤칠한 키(1m78㎝)와 반백의 머리, 마른 체구, 광채가 나는 얼굴, 적은 말수 등 그의 풍모 또한 도인(道人)을 보는 듯하다.

그는 돈에 조금이라도 욕심이 있었다면 불가능한 일들을 많이 했다. 17살 때 처음으로 판소리 공연장에 갔다 넋을 잃을 만큼 매료됐다는 趙화백은 68년 남도 국악원을 세웠고 생활이 어려운 국악인들을 돕는 등 국악에도 적지 않은 시간과 돈을 쏟아부었다.

또 고미술품을 수집하는 데 열정과 재력을 쏟아 서화.서첩.간찰류 5천8백62점과 성리학 연구 백과사전 격인 성리대전목판각(性理大全木版刻) 9백39점을 모았다.

90년에는 이를 곡성군 옥과면 성령동의 땅 4천여평과 함께 전남도에 내놓아 옥과미술관을 만들게 했다. 이후 사람들이 12억원을 주겠다며 팔라던 성령동 땅 20만평도 망설임없이 내놓았다. 10만평은 청화(淸華) 큰스님에게 내줘 성륜사(聖輪寺)를 창건케 하고 나머지 10만평은 아산문화재단에 기증한 것이다.

그리고 69세 때인 94년 섬진강 지류인 보성강과 가까운 곳에 새 거처를 마련, 광주 생활을 접고 부인 유화순(柳和順.73)씨와 단 둘이 살고 있다. 화가로서 한창 성가를 누리고 지역 원로로서 대접을 받을 나이에 이를 마다하고 은둔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요즘 그는 내년 말께 서울에서 전시회를 열 계획으로 1백호 이상 위주로 작업하고 있다.

"대작은 힘이 있어야 하는데 늙으니까 기운이 없어 잘 안 됩니다. 이제야 겨우 그림에 대해 뭔가 알 것 같은데 안타깝습니다. 세상과 인생을 알고 내 사상이 선 지금부터 그리는 게 진짜 내 그림인데 말입니다."

곡성=이해석 기자<lhsaa@joongang.co.kr>

2003.05.21 19:16 입력 / 2003.05.22 09:09 수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