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실

최고 전성기를 이룬 장수왕(長壽王)

최고 전성기를 이룬 장수왕(長壽王)
광개토대왕 업정 이어 평화로운 대제국 완성

어린이 여러분은 ‘고구려의 왕’ 하면 광개토대왕을 먼저 떠올릴 거예요. 광개토대왕은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개척한 영웅이지요. 그런데 그에 못지않은 고구려의 왕이 있어요. 바로 광개토대왕의 맏아들 장수왕이지요. 장수왕은 아버지의 업적을 크게 이어 간 임금입니다. 그는 고구려 최고 전성기를 이룬 임금으로 유명합니다. 그의 업적을 알아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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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이 새롭게 건설한 안악궁과 그 앞에 전개된 시가지 상상복원도. 

▲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성으로 옮겨

413년부터 491년까지 무려 79 년 간 고구려를 다스린 장수왕의 업적 가운데 가장 널리 알려진 일은 수도를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옮긴 일입니다. 국내성은 압록강을 이용할 수는 있지만, 주변에 넓은 평야가 없다는 단점이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나라가 커짐에 따라 경제적인 기반이 튼튼하고 교역의 중심지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는 새로운 수도가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찾은 곳이 바로 평양이지요. 평양은 대동강과 서해를 이용할 수 있고, 넓은 평야 지대가 있으며 기후도 국내성보다 따뜻합니다. 고구려는 오래 전부터 평양으로 수도를 옮길 준비를 해 오다가, 427년 마침내 수도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수도가 남쪽으로 옮겨짐에 고구려는 남쪽으로 보다 더 강하게 진출합니다. 도림 스님을 앞세워 백제를 굴복시키고, 중원 고구려비를 세우며 충북 중원 지역에 강력한 거점을 만든 것도 장수왕 시기의 일입니다. 중원 고구려비에는 고구려대왕과 신라왕이 서로 형과 아우가 되어서 서로 합심하여 세상의 질서를 지켜 나가자는 내용이 담겨 있습니다. 즉 고구려와 신라가 서로 상하 관계를 맺었음을 보여 줍니다. 고구려가 천하의 중심국이라는 당당한 자부심이 비문에 담겨 있습니다. 고구려는 이 때 한반도 남쪽에서 강력한 힘을 과시하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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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수왕이 평양으로 수도를 옮긴 후, 궁성인 안악궁을 호위하기 위해 쌓은 둘레 7 km의 대형 산성인 대성산성의 남문. 

▲ 가장 대우받는 나라로 성장

한편 고구려 서쪽에서는 북위가 크게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북위는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북연을 공격하여 멸망 직전으로 몰아갑니다. 그러자 북연왕 풍홍은 고구려에게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장수왕은 갈로 맹광에게 2만의 군대를 주어 북연의 수도로 보냅니다. 고구려군은 북연의 병사들을 데리고 도성에 들어가 각종 물자와 백성들, 그리고 북연왕을 함께 고구려로 데려왔습니다. 고구려가 이러한 작전을 수행하는 동안, 북위군 지휘관 고필은 고구려군이 두려워 감히 나서지도 못했습니다.

북위는 북연을 멸망시켰지만 아무런 소득도 없고, 고구려가 북연의 모든 재물과 백성을 가져가자 화가 났습니다. 북위는 고구려를 공격할 계획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실행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은 북위가 북쪽의 유목 제국인 유연, 양자 강 이남의 송나라와 대립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장수왕은 유연과 송나라를 서로 연결시켜 주면서 3 면에서 북위를 포위했습니다.

5세기 동아시아에서 가장 인구도 많고 힘도 센 북위지만, 고구려에게 만큼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결국 북위는 고구려를 외국 가운데 가장 우대하고, 평화롭게 지내기를 원했습니다. 북위와 유연, 송 등은 서로 전쟁을 한 탓에 문화와 경제가 크게 발전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상대적으로 평화를 누리면서 인구도 크게 늘고, 문화와 경제도 크게 발달했습니다.

▲ 화려한 고분 벽화 문화도 꽃피워

장수왕이 다스리던 시기에 고구려는 화려한 고분 벽화 문화를 활짝 꽃피웁니다. 무용총, 각저총을 비롯한 많은 벽화 무덤이 만들어집니다. 당시 동아시아의 미술 문화는 서쪽의 돈황과 함께 고구?평양과 집안 일대가 양대 중심지로 번영했습니다. 또 장수왕 시기에는 새롭게 확대한 영토를 개간하여 경작지가 크게 늘어 농산물 생산이 크게 증가했고, 광업과 상업도 함께 발전했습니다. 특히 당시 고구려가 동아시아 바다를 제패하면서 해외 무역이 활발히 펼치게 된 것도 고구려를 부자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장수왕은 남진(南進) 정책만을 편 것이 아니라, 북쪽으로도 크게 영토를 넓혔습니다. 유목 제국인 유연과 함께 두 나라 사이에 있는 지두우라는 나라를 나누고 내몽고 지역인 대흥안령 산맥 일대로 진출하기도 합니다. 또 지두우 남쪽에 있던 거란족에 대한 영향력도 확대합니다. 북쪽으로는 눈강 일대의 실위에게 철을 수출하면서 고구려의 힘을 과시하기도 합니다.

장수왕은 광개토대왕이 만든 대국 고구려를 보다 발전시키면서 동아시아의 4대 강국의 하나로 발돋움하며 국제 질서를 이끌어 갔습니다. 만리장성과 대흥횅?산맥 이동의 동방 지역을 모두 고구려가 제압하였습니다. 장수왕은 큰 전쟁을 치르지 않으면서 평화와 안정이 보장된 살기 좋은 대제국을 만드는데 성공했습니다. 39 세에 죽은 광개토대왕과는 달리 장수왕은 98 세까지 장수하면서, 고구려의 태평성대를 이룬 또 한 명의 위대한 대왕이었습니다.


'춘향전'·'별주부전'은 고구려에서 유래됐다
안장왕의 사랑·김춘추의 탈출과 비슷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춘향전과 별주부전을 들어 보았을 것입니다. 판소리와 고전 소설로 유명한 이 이야기는 어린이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그런데 이 이야기가 언제부터 비롯되었을까요? 놀랍게도 고구려에서 그 유래를 찾아 볼 수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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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밀 장군에게서 이름이 유래 되었다는 평양의 을밀대. 

▲ 고구려 안장왕, 백제 여인 한주와 사랑에 빠져

고양시 고봉산 일대가 백제의 지배를 받던 시절, 어느 고을에 한주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한 청년은 산책에 나선 한주를 보고 그만 사랑에 빠졌습니다. 청년은 이윽고 한주에게 사랑을 고백했고, 그녀 역시 그 남자를 사랑하게 됐습니다. 그런데 이 청년은 고구려의 태자로, 백제에게 빼앗긴 한강 유역을 되찾기 위해 몰래 정탐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얼마 후 태자는 한주에게 “내 임무가 끝났으니 이젠 고구려로 돌아가야 하오. 돌아가는 즉시 군사를 동원해 이 곳을 정복하고 그대를 아내로 맞이할 테니 기다려 주시오.”라고 말하며 백제를 떠났습니다. 태자는 얼마 후 문자명왕의 뒤를 이어 고구려 22대 안장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안장왕은 쉽게 백제의 땅을 되찾지 못했습니다.

한편 한주의 아름다움이 소문이 퍼지자, 백제의 태수가 사람을 보내 청혼했습니다. 하지만 한주는 장래를 약속한 사람이 있다며 청혼을 거절했습니다. 화가 난 태수는 한주를 잡아다가 그가 누구냐고 다그쳤습니다. 태수는 한주가 적과 내통한 것이 분명하다면서 그녀를 옥에 가둬 버립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안장왕은 부하들에게 한주를 구해 오도록 명령했습니다. 이때 장수 을밀이 왕에게 나아가 자신이 왕의 여동생인 안학공주를 사모하고 있으니, 공을 세우면 둘의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을밀은 부하들과 함께 광대놀이패로 변장하고서 백제로 잠입해 들어갔습니다. 태수는 자기 생일날 한주를 끌어 내어 다시 청혼했지만, 한주는 다시 한번 거절합니다. 태수는 너무 화가 나 결국 한주를 죽이라고 명령합니다. 이 때 을밀과 그의 부하들이 감춰 둔 무기를 꺼내 무리에서 뛰쳐나와 고구려 대군이 이미 이 곳에 쳐들어왔다고 외치며 한주를 극적으로 구합니다. 이 소식을 들은 안장왕은 백제를 공격했고, 한주도 고봉산에 올라 봉화를 밝힙니다. 마침내 왕과 한주는 다시 만나게 되고, 을밀도 안학공주와 결혼합니다. 이 이야기는‘삼국사기’ㆍ‘동국여지승람’ 등에 짧게 기록돼 있고, ‘해상잡록’ 등에도 그 내용이 전해지고 있습니다. 춘향전과 거의 같은 내용인데, 이름과 사건이 일어난 배경만 다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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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장왕과 한주의 사랑 이야기가 전해지는 고양의 고봉산. 

▲ 신라 김춘추는 토끼의 지혜를 활용해 고구려에서 빠져 나와

별주부전과 비슷한 이야기도 고구려인의 입을 통해 들어 볼 수 있습니다. 642년 겨울 신라의 김춘추는 사신 자격으로 고구려를 방문을 하게 됩니다. 그는 백제가 계속해서 신라를 공격하고 있으니, 고구려가 신라에 힘을 보태달라고 요청을 합니다. 그런데 연개소문과 보장왕은 그 제의를 하려면, 먼저 신라가 고구려에서 빼앗아 간 조령과 죽령 이북의 땅을 내놓겠다는 약속을 하라고 요구합니다. 만약 그 땅을 돌려 주지 않는다면, 김춘추를 신라로 돌려 보내지 않겠다고 엄포를 놓았습니다.

백제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던 김춘추는, 도리어 영토를 내놓을 판에 이르렀으니 앞이 깜깜했습니다. 김춘추는 잡혀 있는 동안 고구려 대신인 선도해에게 뇌물을 바쳐 자신을 도와 달라고 요청합니다. 선도해는 김춘추를 만나 다음의 이야기를 들려 줍니다. 동?용왕이 병이 들었는데, 토끼의 간을 먹으면 낳는다는 말을 듣고, 거북을 육지로 보냈습니다. 거북은 토끼를 만나 용궁 구경을 가자며 유혹했고, 토끼는 거북의 등을 타고 바다로 갔습니다.

이 때 거북은 토끼에게 토끼의 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자 토끼는 나는 신의 후손이라 간을 꺼내 씻어 넣을 수도 있는데, 공교롭게도 지금 간을 꺼내 땅에 놓아 두었으니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거북에게 말했습니다. 거북은 토끼를 다시 육지에 내려놓았습니다. 그러자 토끼는 도망치며 “너는 어리석구나. 어찌 간이 없이 살 수 있는 자가 있겠느냐.”며 거북에게 말했습니다. 김춘추는 이 이야기 속의 숨은 뜻을 깨닫고, 연개소문과 보장왕 앞에서 땅을 돌려 주겠다는 약속을 한 다음 고구려를 무사히 탈출합니다. 그리고는 토끼가 그랬듯이 땅을 돌려 주지 않았습니다. 그 때문에 신라와 고구려는 더 사이가 나빠졌습니다.

위에서 선도해가 말한 이야기가 곧 별주부전으로, 불교 경전과 인도ㆍ일본 민담에서도 유사한 이야기를 찾을 수 있습니다. 고구려에는 이 밖에도 호동왕자와 낙랑공주, 온달과 평강공주, 농부 을파소가 국상이 된 이야기, 소금장수가 미천왕이 된 이야기 등 재미난 이야깃거리가 많습니다. 이런 얘기들이 언젠가 영화ㆍ드라마ㆍ게임 등의 소재로 널리 활용되어 우리 모두 고구려를 더 잘 알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해 봅니다.


고구려의 축제와 놀이
신분·남녀 구분 없이 함께 술 마시며 춤과 노래 즐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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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회분 4호묘에 악기를 연주하는 신선의 모습.(왼쪽) 장천 1호분 벽화에 보이는 씨름을 비롯한 다양한 놀이 장면. 고구려인들은 평소 춤과 노래를 즐겼다. 

고구려에 대한 공부를 하다 보면 유명한 인물이 누구이며, 언제 어떤 나라와 싸워 이겼고, 얼마나 큰 땅을 차지했는가에 관심을 갖게 됩니다. 그런데 고구려 사람들은 오로지 훈련에만 힘을 쏟고 전쟁만을 하며 살았을까요? 물론 그렇지는 않았겠지요. 고구려 사람들도 평상시에는 다양한 문화 생활과 놀이를 즐겼답니다. 그 가운데 특히 축제를 좋아했습니다.

▲ 10월에 열리는 가장 큰 축제 '동맹'

고구려에서 1 년 중 가장 큰 축제는 동맹으로, 해마다 10월에 열렸습니다. 이 축제는 유화부인과 추모왕을 신으로 모시면서, 시조의 탄생을 재현하는 경건한 의식을 왕이 직접 참여해 진행했습니다. 이 날은 왕ㆍ귀족ㆍ일반 백성까지 모두 한자리에 모여 온갖 놀이를 즐깁니다. 신과 하나가 돼 신명 나게 즐기는 것입니다. 조선 시대 양반은 엄숙한 제사를 지낼 뿐, 마을 제사 등에는 뒷짐을 지고 돈이나 몇 푼 내어 주는 데 그쳤습니다. 백성들과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일은 무척이나 보기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인은 신분과 남녀의 구분 없이 밤늦도록 함께 술 마시고 춤과 노래를 즐겼습니다. 전쟁이 잦은 나라인 만큼, 아래와 위의 일체감이 무엇보다 필요했습니다. 즉, 축제가 단결을 이끌어 내는 중요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 고분 벽화에 노래하고 춤추는 모습 많아

고구려 사람들은 동맹 축제뿐만 아니라 평소에도 밤늦도록 노래하고 춤추며 놀기를 좋아했습니다. 고구려의 노래 가운데 지금 전하는 것은 황조가와 인삼노래 정도에 불과하지만, 당시에는 많은 노래가 연주되었습니다. 동맹에서 의식이 진행될 때는 잔잔하면서도 신을 부르는 음악이 연주됐습니다. 또 함께 춤추고 노래할 때에는 격정적인 음악이, 군대 행진 때에는 씩씩하고 웅장한 음악이 연주되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오회분 5호묘 천장 네 벽에는 8 명의 신선이 그려져 있는데, 이들은 뿔피리ㆍ횡적ㆍ장구ㆍ거문고ㆍ퉁소 등을 연주하고 춤을 추며 노래하고 있습니다.

안악3호분에는 음악에 맞추어 탈춤을 추는 사람도 그려져 있습니다. 무용총 역시 무덤 주인이 유희 모습을 보는 장면이 그려져 있기도 합니다. 덕흥리 고분의 경우 주인공이 업무를 볼 때, 뒤에서 완함과 피리ㆍ나팔을 연주하는 사람이 함께 보입니다. 이 밖에 장천1호분에는 귀부인이 야외에서 남자와 만나 함께 거문고를 연주하고 춤추는 장면이 보여집니다. 당시 당나라와 일본에서는 고구려의 음악을 궁중 연회에서 연주했고, 고구려의 춤과 노래도 당나라 귀족층에서 크게 유행하기도 했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한 해가 시작될 때 왕이 신하들과 함께 패수로 나가 사람들이 모여 놀이하는 것을 구경했습니다. 이 때 사람들은 두 편으로 나뉘어 서로 돌을 던지는 돌싸움을 했습니다. 서로의 경쟁을 부추기면서도 화해를 도모하는 이 돌싸움은 20세기 중반까지도 전국에서 볼 수 있는 놀이였습니다.

▲ 씨름ㆍ겨루기ㆍ축국ㆍ윷놀이 등 즐겨

고구려의 놀이 가운데에는 씨름이 있습니다. 각저총과 장천1호분 벽화에 보이는 씨름은 샅바의 형태는 오늘날과 매우 비슷합니다. 무용총과 안악3호분에는 겨루기를 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이는 태권도의 조상격인 수박이라는 무예를 겨루는 것입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또 축구와 비슷한 축국이란 놀이를 즐겼습니다.

한편, 장천1호분 벽화에는 고구려인의 야외 활동 장면이 나옵니다. 원숭이를 부리며 놀기ㆍ재주꾼이 수레바퀴를 던지며 놀기ㆍ춤추고 연주하기ㆍ말 타며 사냥하기ㆍ씨름ㆍ술래잡기 등 다양한 모습이 담겨 있습니다. 팔청리와 수산리 고분 벽화 등에서는 높은 나무다리에 올라 춤추기ㆍ칼 재주 부리기ㆍ여러 개의 막대와 공을 엇바꾸어 던져 올리며 받기 등 서커스를 하는 사람들의 장면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이 같은 육체적 놀이 외에도 고구려 사람湧?바둑ㆍ주사위ㆍ윷놀이 등 머리를 쓰는 오락을 즐겨 했습니다.

특히 윷놀이는 우리 겨레 고유의 놀이인데, 놀이판과 윷가락은 많은 상징적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일부 학자들은 윷놀이가 우리 전통 사상의 원형이 담긴 보물이라고 말합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잦은 전쟁을 치렀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여유롭게 인생을 즐기며 살 줄 알았습니다. 특히 상하와 남녀 구분 없이 함께 축제를 즐기는 고구려인의 모습은 오늘날 우리가 크게 배워야 할 점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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