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실

노원의 역사 기록1

노원의 역사 기록


!. 계곡선생집(谿谷先生集) 제15권- 行狀

공의 휘(諱)는 항복(恒福)이요, 자(字)는 자상(子常)이요, 그 선조는 경주(慶州) 사람이다. 원대(遠代)의 선조인 문충공(文忠公) 제현(齊賢)은 문장과 덕업(德業)으로 고려의 명상(名相)이 되었는데 세상에서 익재 선생(益齋先生)으로 일컬어져 오고 있다.


공이 탄핵을 당하고 나서는 동복(僮僕) 한 명에 말을 타고서 동쪽 교외로 빠져 나가 강가에서 우거(寓居)하다가 가을철이 되자 노원(蘆原) 촌가(村家)에서 잠시 기거하였는데, 볼품없는 오두막집에서 변변찮은 식사마저 충분치 못한 상황에서도 편안한 마음으로 거처하면서 오직 독서하는 데에 침잠하였으며, 한가할 때면 지팡이를 짚고 산과 계곡 사이를 소요하며 회포를 풀곤 하였다. 언젠가 미복(微服) 차림으로 노새를 타고 청평산(淸平山)에 가서 노닌 적이 있었는데, 혹 만나는 사람이 있어도 공인 줄을 전혀 알지 못하였다.


고전번역서

만기요람(萬機要覽)

서영보 등(徐榮輔 等)

1971년

 면세식(免稅式)

참고 : 兵曹 - 수납식(收納式), 마색(馬色)

고전번역서

미수기언(眉叟記言)

허목(許穆)

1978년

 증(贈) 이조 참판(吏曹參判) 이공(李公)의 묘갈명(墓碣銘)


〈총례(總例)〉 역졸(驛卒) ○ 청파(靑坡)와 노원(蘆原) 2개 역 합계 288명. 마호(馬戶) 200명, 주호(走戶) 88명. 【마필(馬匹)】 2개 역의 3등급의 말 교룡기(蛟龍旗)를 봉지(奉持)하는 말을 상등이라 하며, 승용마(乘用馬)를 중등이라 하며, 짐싣는 말을 하등이라 한다. 상등과 중등에는 매필에 역졸 2명씩을 예비하여 두며, 하등에는 매필에 1명씩을 예비하여 둔다. 합계 160필. 상등 7필, 중등 33필, 하등 120필. 【위전(位田)】 말의 준비. 상ㆍ중등의 밭과 논이 각 4결(結), 하등 각 결, 주위(走位)는 밭과 논이 각 50부(負). 【호역 면제[給復]】 마호(馬戶)ㆍ주호(走戶)에게는 매명에게 1호씩의 호역(戶役)을 면제하여 준다.



공(公)은 휘(諱)는 심(襑), 자(字)는 자첨(子瞻), 성은 이씨(李氏)이며 본관은 연안(延安)이다. 고려(高麗) 시대에 태자 첨사(太子詹事) 이습홍(李襲洪)이 있었는데, 이분이 시조이다.

“이이가 정권을 너무 마음대로 휘두른다.”했다가 가산(嘉山)으로 척출(斥出)당하여 거기서 죽었다. 원래 엄정함으로써 꺼림을 받았으므로 끝내는 조정에 다시 쓰이지 못하였고, 뒷날 맏아들 이광정(李光庭)이 귀하게 되어 영의정에 추증(追贈)되었다. 차남(次男)인 이창정(李昌庭) 역시 세상에 알려져서 인조(仁祖)가 중흥(中興)할 초기에 함경도 관찰사로 발탁되었다가 작고하였다. 관찰사가 6남을 두었는데, 공(公)이 맏아들이었다. 어머니는 성산 이씨(星山李氏)로 처사(處士) 이응명(李應明)의 딸이었다. 공이 명가(名家)의 아들로 태어나서 성품이 평온하고 조용하며 글을 좋아하였고, 움막집에 왕골자리를 깔고 마른밥과 나물을 먹으면서도 부귀와 영달을 마음에 두지 않았지만, 이미 재주와 학식은 세상에 소문이 나 있었다.


폐주(廢主 광해군(光海君)을 가리킴) 시대부터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짐을 보고 그것을 부끄럽게 여기고는 차라리 몸을 깨끗이 하여 스스로 지키겠다 하였다. 뒤에 어지러운 세상을 만나서 마음 편치 못하자 과거(科擧)를 보지 않고 가족을 이끌고 상락(上洛 경상 북도 안동군)의 송치(松峙)에 가서 밭 갈고 씨 뿌려 자급하며 살면서, 스스로 가은(稼隱), 또는 치세한민(治世閑民)이라고 호를 지었다.

그 고을의 배우려는 자제들이 날로 몰려들어 그곳에 사숙(私塾)을 만들었다. 그의 집에 거하는 범절은, 형제가 여섯 사람인데 살림을 나누어 따로 살지 않았고, 드러난 벼슬을 하는 아우들이 집에 돌아올 때면 마을 어귀에서 말에서 내렸으며, 한집에 모여 살면서 공경히 섬기기를 엄부(嚴父)와 같이 하였고, 자제들이 간혹 과실이 있으면 종일토록 말을 하지 않고 돌이켜 자책하여 반드시 허물을 고치고 죄를 청한 뒤에야 허락하였다. 지금도 자손들이 부지런히 수양하여 가훈(家訓)을 받들어 의가 아니면 행하지 않고, 충성과 사랑이 쇠하지 않고 있다.

부모의 상(喪)을 당해서는 질대(絰帶)를 벗지 않고, 3년 동안 시묘살이하였으며 집에서도 곡읍(哭泣)하였으므로 보는 이들이 모두 효자의 뛰어난 품행이라고 생각하였다. 자손에게 전해진 제례(祭禮)는 기명(器皿)과 효찬(肴饌)에 정해진 격식이 있는데, 모두 본받을 만하다.

조경(趙絅) 공과 심대부(沈大孚) 공이 그를 곧은 선비라고 인정하고, 때때로 와서 서로 터놓고 지내려고 했는데, 공(公)은 혼자 숨어서 세상에 이름이 나지 않는 것을 좋아했고, 현달(顯達)한 사람과 즐겁게 왕래하려고도 하지 않으니, 참으로 옛사람이 말하는 청사(淸士)이다.

공은 영천 이씨(永川李氏) 형조 참판 이민환(李民寏)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이씨는 현부인(賢婦人)의 덕이 있어서 규문(閨門) 안에서 한 번도 군자(君子 남편(男便)을 가리킴)의 가르침을 어기는 일이 없었고, 자손을 양육하는 데에 있어서도 지나친 사랑으로 예법을 무너뜨린 적이 없었다.

공은 2남 2녀를 두었다. 맏아들 이관징(李觀徵)은 지금 강도 유수(江都留守)로 있는데, 청렴하고 근신한 것으로 소문이 났고, 차남 이정징(李鼎徵)은 일찍 죽었다. 사위는 두 사람인데 유생(儒生) 윤이구(尹爾久)와 참봉(參奉) 이운근(李雲根)이다. 이관징은 이옥(李沃), 이발(李浡), 이숙(李淑), 이협(李浹)을 낳았는데, 이옥은 부제학이었다가 권세를 쥔 사람에게 미움을 받아 회양수(淮陽守)로 쫓겨났고, 이발과 이숙은 진사(進士)이며, 사위인 민창도(閔昌道)는 급제했다. 이정징은 이식(李湜)을 낳았는데, 지금 수찬(修撰)이 되었으며, 또 서자(庶子) 이택(李澤)이 있다. 윤이구(尹爾久)의 두 사위는 이현수(李玄綏)와 한종규(韓宗揆)이고, 이운근(李雲根)은 2남 1녀를 두었는데, 나이가 어리다. 이옥은 4남을 두었는데 맏이는 이만수(李萬秀)로 진사(進士)이다.

이관징(李觀徵)이 귀해졌기 때문에 공을 이조 참판에 추증하였다.

공은 만력(萬曆) 25년 정유년(1597, 선조30)에 태어나서 숭정(崇禎) 21년 무자년(1648, 인조26)에 작고하였는데, 나이 52세였다. 이씨(李氏)는 공과 같은 해에 나서 공(公)보다 8년 뒤에 59세로 작고하였으며, 합장(合葬)한 묘(墓)가 임단(臨湍) 노원(蘆原)의 동남쪽 언덕에 있다. 다음과 같이 명한다.


예부터 청절한 선비는 / 自古淸節之士

뜻을 굽히지 않고 우뚝하게 서서 / 不屈志特立

속세를 잊는 데에 과감하였을 뿐이요 / 果於忘世者皆是

충성스럽고 공경하면서 행실을 독실하게 한 사람은 / 而忠敬篤行

많이 듣지 못하였네 / 盖不多聞

공석애원헌 같은 이는 / 若公晢哀原憲

도를 배워 몸소 실천하여 / 能學道躬行

종신토록 초야에서 즐기니 / 終身樂於草澤中

공자가 그를 찬탄하였네 / 孔子嘆之

그대 같은 이가 여기에 가깝지 않겠는가 / 若子殆其庶幾哉



[주D-001]공석애(公晢哀) : 춘추 시대 제(齊) 나라 사람으로 자(字)는 계차(季次)인데, 《가어(家語)》에는 공석극(公晢克)이라고 되어 있다. 절개를 굽혀 남의 신하가 되지 않았기 때문에 공자(孔子)가 특별히 상탄(賞歎)하였다.

[주D-002]원헌(原憲) : 춘추 시대 노(魯) 나라 사람으로, 송 나라 사람이라고도 한다. 자(字)는 자사(子思) 혹은 원사(原思)라고도 한다. 공자의 제자로 가난하면서도 도(道)를 즐겼다. 공자가 노 나라에서 재상이 되었을 때, 원헌은 읍재(邑宰)가 되었는데, 공자가 돌아가시자 원헌은 위(衛) 나라로 물러나 숨어 지냈다.

6

고전번역서

백사집(白沙集)

이항복(李恒福)

1998년

백사집 제1권-시(詩)

처음 동강(東江)에 있을 적에는 영산군(靈山君)이 동강에서 늘그막을 함께하자는 약속을 하였고, 노원(蘆原)으로 옴에 미쳐서는 이 첨지(李僉知)와 유 감사(兪監司)가 서로 이어 찾아와서 모두 조석으로 같이 지내자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그 후 며칠도 안 되어서 영산군은 집을 사서 성 안으로 들어갔고, 첨지 또한 성 안에 들어가 집을 지었으며, 유공은 또한 해서 관찰사로 나가 버렸으므로, 나만 홀로 상중(湘中)에 머뭇거리면서 장난 삼아 한 절구를 이루다.

 

 

 

난초라 하여 꼭 믿지를 마소 / 莫以蘭爲恃

서울 먼지가 옷에 물들기 좋아한다네 / 京塵喜染衣

산중 구름은 또한 무슨 연유로 / 山雲亦何事

암굴을 나와도 돌아갈 데가 없는고 / 出岫去無歸 

 

7

고전번역서

백사집(白沙集)

이항복(李恒福)

1998년


성상의 분부로 나에게 물을 바가 있어 금오랑(金吾郞)이 달려왔는데, 이때 나는 막 노원(蘆原)에서 대죄하고 있는 터였고 시의(時議)는 흉흉하였으므로, 온 집안이 놀라 두려워하였다.


붉은 비단옷을 입은 사자가 / 傳道緋衣使

멀리 곡구를 찾아온단 말 듣고 / 遙尋谷口廻

    잘못 후명이 이르렀나 의심했더니 / 虛疑後命至

    실상은 특별한 은총이 왔네그려 / 實有異恩來

    놀람이 진정되니 마음은 외려 꺾이고 / 驚定心猶折

    사안이 깊으니 뜻을 가눌 수 없네 / 機深意未裁

    어떻게 높으신 물음에 답을 할꼬 / 何能荅淸問

    절하고 마음으로 슬퍼할 뿐이로다 / 拜手只心哀


후명(後命) : 귀양 보낸 죄인에게 사약(死藥)을 내리는 것을 이른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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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서

백사집(白沙集)

이항복(李恒福)

1998년

노원(蘆原)의 우사(寓舍)에는 우물이 없어서 항상 작은 계곡의 물을 마시다가 우물을 파서 물을 얻고는 기뻐서 짓다.

시냇물 길어 먹기 몹시도 지겨워 / 苦厭臨溪汲

덤불 헤치고 작은 산을 얻어서 / 披榛得小山

이리저리 경영하여 수맥을 찾고 / 經營尋地脈

땅을 파서 하늘의 신비를 깨뜨렸네 / 疏鑿破天慳

    임금의 힘이 나에게 어디 미쳤느뇨 / 帝力於何有

    나의 생애가 스스로 한가로워라 / 吾生自在閑

    남은 물결엔 갓끈도 씻을 만하니 / 餘波纓可濯

    지팡이 짚고 맑고 차가움 완상하노라 / 柱杖玩淸寒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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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서

백사집(白沙集)

이항복(李恒福)

1998년


처음 동강(東江)에 있을 적에는 영산군(靈山君)이 동강에서 늘그막을 함께하자는 약속을 하였고, 노원(蘆原)으로 옴에 미쳐서는 이 첨지(李僉知)와 유 감사(兪監司)가 서로 이어 찾아와서 모두 조석으로 같이 지내자는 말이 있었다. 그런데 그 후 며칠도 안 되어서 영산군은 집을 사서 성 안으로 들어갔고, 첨지 또한 성 안에 들어가 집을 지었으며, 유공은 또한 해서 관찰사로 나가 버렸으므로, 나만 홀로 상중(湘中)에 머뭇거리면서 장난 삼아 한 절구를 이루다.


난초라 하여 꼭 믿지를 마소 / 莫以蘭爲恃

서울 먼지가 옷에 물들기 좋아한다네 / 京塵喜染衣

산중 구름은 또한 무슨 연유로 / 山雲亦何事

암굴을 나와도 돌아갈 데가 없는고 / 出岫去無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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