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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에게 경영을 묻다 ⑨
겹겹이 듣기, 켜켜이 보기! ‘인생 대박’ 논어의 힘
배병삼│영산대 교수·정치사상 baebs@ysu.ac.kr│
논어는 오늘날에도 인간사회의 ‘경영 모델’이 된다. 여기서 경영이란 모든 형태의 ‘관계 맺기’ 기술이다. 이 기술의 최대 덕목은 ‘개안(開眼)’이다.
세상을 그저 거죽뿐 아니라 그 아래 켜켜이 들어찬 속살까지 꿰뚫어보는 창의적 안목을 틔워준다. 낯익은 것을 낯설게 보는 눈을 가지면 가난조차 즐기며 살 수 있다.
가난을 누리면서 내려다보는, 진정한 주인의 삶이 펼쳐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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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작 대학에서는 ‘인문학이 죽어간다’는 비명이 터져 나온 지 오랜데, 바깥에서는 인문학 붐이다. 서점에는 인문학 관련 각종 서적이 즐비하고, 직장인을 대상으로 한 인문고전이나 철학과 관련한 강연회도 빈번하게 열린다. 정치철학 전문서적인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오랫동안 종합 베스트셀러 1위에 올라 있는 데서도 요즘 인문학의 ‘이상 열풍’은 감지된다. 실은 여기 아홉 번째 연재하는 이 글도 최근의 인문학 열기에 편승하는 것일 테다. ‘공자에게 경영을 묻다’라는 주제 자체가 인문학을 중심에 놓고 오늘날 이슈인 ‘경영학’과의 접점을 모색하는 시도라는 점에서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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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에는 이런 시도에 대해 본질적인 질문을 던져보자. 이기심을 용인할 뿐만 아니라 그걸 인간성의 핵심으로 용납하는 자본주의 시대인 오늘날, 공자와 그의 어록(‘논어’)은 어떤 의의를 갖는 것일까. 과연 이 속에서 혁신적 경영 모델이나 새로운 문명의 비전을 발견할 수 있을까. 아니면 고작 심신이 지친 현대인에게 도피처(마약)를 제공하는 데 불과한 것일까. 마치 옛날 봉건시대에 도교사상이 죽림칠현식 은둔의 쾌락을 제공하던 것처럼 말이다. 단도직입적으로 오늘날 이 냉혹한 자본주의 시대에 인문고전으로서 ‘논어’의 쓰임새는 과연 무엇인가.
창의력의 샘 ‘논어’
우선 ‘논어’는 창의성의 샘으로서 가치가 있다. 지난해 겨울, 빌 게이츠는 우리의 미래를 ‘창의력 자본주의(creative capitalism)’라고 명명한 바 있다. 최근의 아이폰, 앱스토어, 구글과 같은 첨단제품들을 보노라면 이렇게 말하는 듯하다. ‘남이 생각하지 못한 것을 상상해서 창조할 때만 큰돈을 벌 수 있다!’ 그런데 오늘의 ‘창의력 자본주의’를 몸소 보여주는 아이폰의 주역 스티브 잡스는 또 이렇게 말한다.
“애플은 언제나 기술과 인문학의 교차점에 서 있다.”
인문학과 첨단기술은 멀리 떨어져 있지 않고, 외려 인문학이야말로 창의력을 기르는 힘이라는 주장이다. 흥미로운 사실은 스티브 잡스가 청년시절 심취한 분야가 한자의 서체, 곧 서예(書藝)였다는 점이다. 이것은 한자와 인문학이 가진 창의성과의 관련성을 귀띔해준다.
아! 물론 한자와 인문학을 아이폰과 곧바로 연결하는 것은 억지처럼 여겨질지 모르겠다. 한데 현대 추상화가인 피카소가 한자의 세계에 오랫동안 빠져 있었던 이력은 창의력과 한자, 혹은 동양사상과의 관계를 좀 더 선명하게 보여준다. 피카소는 이렇게 말한 바 있다.
“내가 중국인으로 태어났더라면 화가가 아닌 작가가 됐을 것이다. 나는 그림을 ‘쓰고’ 싶다.”
더욱이 피카소가 우리더러 “당신들은 보고 있지만 보고 있는 게 아니다. 그저 보지만 말고, 생각하라! 표면적인 것 배후에 숨어 있는 놀라운 속성을 찾으라! 눈이 아니고 마음으로 읽어라!”(루트번스타인, ‘생각의 탄생’, 116쪽)라던 요구는 상형문자로서의 한자, 그리고 인문학으로서 동양사상의 속성과 근사하다. 눈에 비친 표면을 모사하던 기존의 회화(구상화)를 벗어나 새로운 패턴, 곧 추상의 세계를 창조해낸 힘의 근원이 자연 속 사물을 추상해 ‘상형’한 한자의 속성에서 비롯됐을 법하지 않은가.
그런데 창의력이란 결코 천재에게만 주어진 우연한 자질이 아니요 또 상상력이란 백일몽과 같은 환상을 두고 이른 말이 아니다. 여기에 인문학의 의의가 있다. ‘태양이 처음 떠오른 이래 새로운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서양 속담은 ‘오래된 미래’로서의 인문고전(‘논어’)의 의의를 되새기게 하는 금언이다.
창의력을 기르는 데에 ‘논어’의 용도는 인간사회의 ‘경영 모델’을 제공한다는 점에 있다(여기에서 경영이란 국가경영이든 기업경영이든, 사회단체(NGO)든, 가족이나 개인의 삶이든 간에 모든 ‘관계 맺기 기술’을 포괄한다). 인간의 역사 가운데 최악이었던 춘추시대의 환란 중에 짐승으로 타락하는 인간의 꼴과 정글로 추락하는 사회를 구출하기 위한 모델이 ‘논어’ 속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요컨대 ‘논어’ 속에는 인간다운 사회·문명의 기본 틀(모델)이 존재한다.
‘스타워즈’도 ‘아바타’도 溫故知新
미래를 구상하고 상상할 때 모델은 필수적 요소다. 조각 예술의 영역에 창의적으로 빛을 도입해 ‘빛의 조각’ 세계를 처음 연 노구치 이사무는 자신의 작업에 대해 “나에게 있어 조각이란 모델(모형)을 만들고, 그 모델의 크기를 키우고, 이에 맞춰 실제로 돌을 깎는 작업을 혼합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한다(‘생각의 탄생’, 306쪽).
이것은 예술 창작에서 모델의 중요성을 지적한 대목이다. 어디 조각 예술에서만 그러하랴. 모델은 글쓰기, 작곡, 영화 등 모든 예술분야에서 창작을 위한 핵심적 요소다. 아니다. 실은 창작이란, 창의성이란 도리어 고전적 모델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조명(재해석)에 지나지 않은 것인지도 모른다. 1980년대에 출현해 오늘날까지 시리즈로 이어지는 신화적인 영화 ‘스타워즈’에 대한 신화학자의 감상평을 보자.
“새 옷을 입고 있기는 하지만 이것은 옛날옛날 한 옛날의 이야기로구나!”
이게 바로 제가 영화 ‘스타워즈’를 보았을 때 가졌던 생각입니다. 영웅이 모험의 소명을 받고, 여행을 떠나 시련을 겪고 위기를 극복하고, 마침내 승리를 얻은 뒤 사회의 이익이 될 만한 것을 가지고 돌아온다. 이건 바로 감독인 조지 루카스가 ‘신화’의 표준적 이미지를 사용한 겁니다.(조지프 캠벨/ 빌 모이어스, 이윤기 역, ‘신화의 힘’. 2001)
조지프 캠벨의 지적처럼 영화 ‘스타워즈’의 모델은 그리스 신화에 나타난 오디세우스의 출향과 고난의 역정, 그리고 귀환이다. 또 2000년대의 베스트셀러 영화 시리즈 ‘반지의 제왕’도 북유럽의 설화와 신화, 다양한 종교현상에 기초를 둔 것이다. 최근 세계적으로 크게 히트한 영화 ‘아바타’ 역시 고색창연한 만물일체관의 번역인 터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다르지 않다. 최근 많은 관객을 불러 모은 김대우 감독의 ‘방자전’은 알다시피 ‘춘향전’이라는 고전을 모델로 삼되 새로운 해석을 영상으로 풀어놓은 ‘오래된, 그러나 새로운 이야기’였다.
그러니 창의성이란 결코 어떤 천재만이 타고난 우연한 자질이 아니다. 도리어 인문학적 모델(고전)에 대한 침착한 독서와 이에 대한 새로운 시각의 조명일 따름이다. 연암 박지원의 문장론 법고창신(法古創新), 즉 ‘옛것을 본으로 삼아 새로운 문화를 창조한다’는 의미가 이것이요, 공자의 온고지신(溫故知新)도 이와 다르지 않다.
사물의 속살 보는 겹눈 길러라
그렇다면 문제는 오로지 눈이다. 그렇다면 눈, 즉 ‘새로운 안목’은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논어’에서 눈에 대한 논의를 찾아보자. 공자 당대에도 오늘날처럼 직장을 얻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한 제자가 스승을 찾아와 ‘직장 구하는 법’을 묻는다. 이 대답 속에 공자가 계시하는 눈의 의미가 언뜻 드러난다.
공자 제자 자장이 직장 얻는 법을 배우고자 하였다.
스승이 말했다. “많이 듣고 그중에 ‘아니다’ 싶은 것은 내버려라! 그 남은 것을 조심스럽게 발표하면 큰 잘못은 없을 거야. 둘째로, 이것저것 많이 보라고. 그중에 ‘아니다’ 싶은 것들은 내버려! 나머지를 삼가서 행동으로 옮기면 큰 실수는 하지 않을 거야. 이렇게 말과 행동, 즉 언행에 잘못이나 실수가 없다면 자연히 직장이 생길 걸세.”
(子張學干祿. 子曰, “多聞闕疑, 愼言其餘, 則寡尤, 多見闕殆, 愼行其餘, 則寡悔. 言寡尤, 行寡悔, 祿在其中矣.” 논어, 2:18)
우선 다문궐의(多聞闕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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