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news.korean.go.kr/online/see/story/story.jsp?idx=32
* 훈민정음 창제
세종 시대의 문화 사업 가운데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 1443년 12월에 창제된 우리 고유 문자 훈민정음임은 더 말할 나위도 없다. 고유 문자 창제로 우리 겨레는 비로소 마음대로 자기 의사를 기록할 수 있는 표기 수단을 갖게 되었으며, 문자 생활은 한자나 한문으로 하고, 일상 언어생활은 우리말 구어로 해 오던 '이중 언어생활'에서 벗어나게 되어 고유 문자에 의한 문장어가 발달될 길이 열렸다.
그래서 세종대왕은, 새 글자를 창제하자마자, 조선의 건국이 하늘의 뜻이라는 것과 세종의 여섯 대에 걸친 조상들의 큰 덕에 의하여 조선 건국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한글로 된 노래로 읊게 하였다. 자료 수집은 1442년 3월부터 시작되고 1445년 4월 5일에 권제, 정인지, 안지 등이 우리말 우리글로 된 총 125장의 노래와 이를 번역한 한시와 주석을 10권으로 완성하여 세종께 바치었다. 세종대왕은 1447년 10월에 이 책 550부를 신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한편 세종대왕은 1443년 12월에 창제한 새 음소 문자의 제자 원리와 기능 등을 백성들에게 알리고자 하였다. 이 사업은 1420년에 다시 설치된 집현전에서 맡았다. 집현전 학사들은 1446년 9월까지 3년에 걸쳐서 새 글자에 대한 해설서를 집필하였다. 이 책을 <훈민정음 해례본>이라 이름하였다. 책 <훈민정음>은 현재 유네스코의 세계기록문화유산으로 선정되어 있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한문으로 되어 있고, 본문이라고 할 수 있는 '예의편'과 이 예의편을 해설한 '해례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1447년에 '예의편'만을 우리말로 옮기면서 새로 만든 훈민정음으로 표기하고 주석을 달았다. 이를 '훈민정음 국역본' 또는 '언해본'이라고 한다.
훈민정음한글이라는 새 음소 문자는, <홍무정운>, <고금운회거요>, <황극경세서> 같은 중국의 서적으로부터 중국 음운학에 관한 지식을 섭취하고, 1393년에 설치된 사역원司譯院을 통해서 이웃 나라들의 언어 문자에 대한 지식을 활용해서 창제되었다. 15세기 중세 국어를 표기하는 데 가장 적합하게 과학적으로 제자되었으며, 글자 모양은 어느 글자의 계통을 이은 것이 아니라 완전히 독창적으로 창제되었다. 이 글자는 창제된 이후 큰 변동없이 순조롭게 쓰이고 있으며 오늘날에는 세계 여러 곳에 살고 있는 7천 700백만 우리 겨레가 쓰고 있다.
이와 아울러 세종대왕은 훈민정음을 창제하면서 우리나라에 전해 오는 한자음漢字音도 체계화시켰다. <훈민정음 해례본> 집필에 참여하였던 집현전 학사들을 중심으로 우리나라 한자음을 정리하고 체계화시켜서 18,775자중복자를 빼면 14,243자가 수록된 <동국정운東國正韻>을 1447년에 편찬을 완료하고 1448년에 4성 91운 23자모로 된 6권 6책짜리 운서를 간행하였다. 그러나 <동국정운>식 개정 한자음은 1447년에 간행된 서적부터 이미 사용되고 있었다.
조선조는 이웃 나라들과의 외교를 중시하여 사역원에서 한학, 몽학, 여진학, 왜학을 교습시키고 있었다. 세종대왕은 이 가운데에서 특히 한학을 중시하였다. 그는 한어 학습에 <홍무정운洪武正韻>1375에 수록된 한자음이를 漢音이라고 함을 학습시키기 위하여 1445년경부터 집현전 학자로 하여금 <홍무정운> 안의 한자들을 새로 창제된 훈민정음으로 주음注音하도록 하였다. 이 사업은 1455년단종 3에 완성되어 <홍무정운역훈>이라는 이름으로 간행되었다. 10권으로 이루어진 이 운서는 오늘날 한어중국어 음운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 불교 경전 번역에 활용
조선조의 건국 이념은 불교를 억압하고 유교를 숭상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삼국 시대에 중국으로부터 불교가 들어온 이후 천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온 국민이 상하의 구별 없이 가슴 속 깊이 불교에 대한 신심을 갖게 되어 이를 하루아침에 말살할 수는 없었다. 특히 37년 동안 다정하게 지내온 중궁 소헌왕후가 1446년
3월에 세상을 뜨자 세종은 비통한 마음을 달랠 길이 없었다. 세종은 모든 장례 절차를 불교식으로 집행하고 수양대군에게 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한문으로 된 <석보상절
釋譜詳節>을 편집하게 하고 모든 한자에 개정 한자음을 한글로 달도록 하였으며 한글로 주석과 번역을 하게 하였다. <석보상절>은 1447년에 가장 오래 된 한글 활자
목활자로 간행되었다.
세종은 수양대군 등이 지어 바친 <석보상절>을 보시고 석가에 대한 찬송가를 지어 1449년에 상•중•하 세 권으로 된 활자본
목활자 <월인천강지곡>을 간행하였다. 이 책의 특징은 한자를 앞세우고 한자의 음을 한글로 표기한 것이 아니라 한자음을 적은 한글을 먼저 내세워 한글이 주가 되고 한자를 그 다음에 적었다는 점이다.
1459년
세조 5에 <석보상절>과 <월인천강지곡>을 합편하여 다시 판을 짜서 <월인석보>라는 이름으로 간행하였다. 이 책 첫머리에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본문
예의편만을 주석하고 한글로 옮긴 글이 '세종어제훈민정음'이라는 이름으로 실려 있다. 이 글은 애당초 <석보상절>이 1447년에 간행될 때 그 책머리에 실려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