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실

사찰

사찰 

  사찰의 어원은 상가람마이다. 중국인들은 이 상가람마를 '승가람마'로 표기하였고, 그것을 다시 줄여 '가람'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번역하여 '중원'이라 하였다. 그러나 불교가 처음 일어났던 서기전 6세기 무렵부터 승려들의 생활터전인 사찰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무소유를 이상으로 삼았던 초기의 수행자, 그들은 나무 밑이나 숲 속,석굴,골짜기 냇가 묘지 등의 장소에 거주하면서 무일푼과 무소유의 생활의 방편으로 삼아 선정과 진리의 탐구에만 몰두하였던 것이다.

  불교에서만 이러한 생활양식을 추구하였던 것은 아니다. 그것은 당시의 고상한 수행자로 주목받았던 '사문(沙門)'의 한결같은 생활태도였다. 불교가 생겨나기 이전의 인도 사상계에서는 제사 만능주의로 타락의 길을 걸으면서도 그들만이 가장 신성한 신분이라고 내세우는 바라문 계급이 지배하고 있었다. 사문은 바라문들의 타락에 종교적인 회의를 느끼고 선정을 통한 신과의 교류와 생사의 해탈을 체험하기 위하여 피나는 고행을 닦았던 당시 인도의 종교개혁가들이었다.

  그러나 인도의 기후적인 특성은 이와같은 무소유의 생활에 많은 장애를 안겨 주었다. 찌는 듯한 태양열은 가뭄과 함께 만물을 시들게 하고 그 무더운 여름이 지나가고 또 다시 우기에 접어들면 푸르름을 되찾은 대지 위로 작은 벌레들은 생존과 번식을 위해 기어 나온다. 그 벌레들이 문제이다. 우리의 상식으로 쉽게 이해가 가지 않겠지만 그 벌레들이 많을 때는 길을 덮고 있다시피 하였는데, 승려들에게는 그들의 발 아래에 미물들이 죽어가는 모습을 보고 그 수행을 올바르고 떳떳이 말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에 부처님은 우기인 3개월 동안 탁발과 중생교화를 위한 유행을 중단할 것을 계율로 정하고, 한 곳에 머물면서 수행하는 안거의 제도를 택하였다. 아와같은 우기의 안거제도가 차츰 정립되면서 승려들은 부처님을 모시고 한 곳에 모여 정진할 수 있기를 열망하게 되었고 유력한 신도인 왕족이나 부유한 상인들은 음식물의 제공과 함께 불교 교단에 원림을 기증하여 승려들을 머무르게 하였다.

  불교 최초의 원림은 마가다국의 빔비사라왕이 불교 교단에 기증한 죽림원이다. 그 뒤 정사는 차츰 격식을 갖춘 주거용 건축물로 바뀌어 갔고 그 규모도 커져갔다. 죽림정사 이후 석가모니 당시의 최대 사찰로 전해지고 있는 기원정사가 건립된 것도 얼마 뒤의 일이었다. 정사는 불교교단의 공동재산으로서 안거수행을 위한 실제적인 목적에 따라 생겨나게 된 것이다. 사찰은 정진을 위한 수행처로 승려들의 공동주거지로 정착되어 갔지만 다른 한편으로 초기교단의 생활지침이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찰은 단순한 승려의 생활터전이 아니라 미물의 살생마저도 막아야한다는 철저한 불살생의 정신이 사찰을 창건하게 된 것이다. 철저한 불살생은 대자대비를 낳는다. 개인의 해탈보다는 생명을 아끼고 사랑하는 그 마음이 앞서야 한다는 석가모니의 가르침이 사찰건립의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또한 사찰은 부처의 세계로 중생을 인도하는 곳이다. 무소유의 마음을 가구고 대자대비의 불꽃을 피우는, 중생을 살리는 도량인 것이다. 그 곳에서 우리는 깨어나고 맑아져야 한다. 그 곳에서 우리는 참 삶의 길을 배워야 한다. 그것이 부처님이 사찰을 연 본뜻이고, 또한 그것이 사찰을 있게한 참뜻이었으리라.....

  평지가 많은 인도나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우리나라와 일본도 고대의 사찰은 주로 시가지의 중심부에 건립되는 것이 상례처럼 되어 있었다. 또한 불교를 국교로 삼았던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나라의 서울을 중심으로 넓은 사역에 장엄한 건축물을 가지는 평지가람이 깊은 산골에 자리잡은 산지가람만큼이나 많았다. 그리고 산지가람은 그 규모에 있어서 도저히 평지가람에 미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늘날의 우리나라 대찰은 거의 산속에 있고, 사찰이라고 하면 산속에 자리잡은 것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게 된다.

  우리나라만 이렇게 산지가람이 많아지게 된 것인가?
  그 이유는......
  첫째, 우리민족의 뿌리깊은 산악신앙때문이었다.
  시원으로 한 신앙, 나라를 세운국조들은 죽어서 산신이 되어 이 국토를 영원토록 지키고 백성들을 돌보다고 믿었으며, 기쁘고 궂은 일이 있을때 산신을 찾아 기도하고 산신의 뜻에 운명을 맏겼던 것이다. 이와같은 산악신앙이 우리민족의 혈관속에 흐르고 있었기에 불교의 참된 빛 또한 산 속에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던것이다.

  둘째로,실리적인 호국호법(護國護法 )의 의지에서 산지가람이 많이 창건되었다.
즉 왜구들의 침략과 관련하여 창건된 금전산 범어사, 토함산 석굴암등의 사찰들, 백제와 국경을 접하는 지리산 등에 신라의 사찰을 거립한 것은 조국 수호의 강인한 의지가 불력으로 승화된 사상성의 발로라고 볼 수있다.

  셋째, 불교의 초세속주의 경향 때문이다.
  세속의 명리나 행복보다는 탈속과 해탈을 추구하라는 불교의 근본가르침에 따르는 수행인들의 수도처로는 그 어느 곳보다 한적한 산중이 가장 적합한 장소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넷째, 신라말의 도선국사가 풍수지리학에 입각하여 제창하였다는 산천비보설의 영향력때문이었다.
  산천비보란 나라안에 있는 산천의 쇠한 기운을 보익하여 국가의 기업을 튼튼하게 하는것을 말한는데 이와같은 산천비보설은 왕건에 의해 깊이 신봉되어 고려시대 오백년동안 도선이 지정한 산에 수 많은 사찰이 창건되었던 것이다.

  끝으로 , 사찰이라고 하면 산사를 연상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조선시대의 배불정책때문이었다.

  조선개국에서부터 대한이라고 국호를 고칠때까지의 불교는 한마디로 배척과 억압을당한 수난의 불교라고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찰은 불제자들이 부처님의 가르침을 쫓아 불도를 닦고 불법을 널리 전파하는 요람이다. 이것이 사찰의 본질이요, 작용이다. 따라서 그 위치가 산이거나 도시이거나 해변이거나 상관이 없으며, 오직 중생의 번뇌와 업을 녹여 부처님의 세계로 인도하는 도량으로 생불을 배출하는 도량일 뿐인 것이다.

  사찰에사는 사람이거나 사찰을 찾는 모든 사람들, 그들은 한결같이 그 본질의 되새기고 회복해 가면서 그 곳을 찾고 그 속에 머물러야 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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