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실

노원의 지명 유래

 

노원문화원


창립총회

    ․ 일 시 : 1997년 10월 22일

    ․ 장 소 : 노원구청 대강당


노원문화원 개원식 및 제1차 정기총회

    ․ 일 시 : 1998년  3월  5일  14 : 00

    ․ 장 소 : 노원구청 대강당

 

주소 : 서울시 노원구 상계5동 173-3 벽산빌딩 402호

  (☎ : 02 - 938 - 1244, 팩스 : 02 - 938 - 1245)

 

노원 지명 유래 

우리 지역이 '노원'이라고 불리우게 된 것은

지금까지 밝혀진 문헌기록에 의하면 고려시대부터였다. 그 이후 조선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노원'이라는 이름을 계속 사용하고 있다.


고려․조선시대에는 교통로를 따라 그 요지에 역원을 설치하여 교통과 숙박의 편의를 제공하였는데, 노원지역도 역원이 설치되면서부터 역사 무대에서 그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일반적으로 지명은 주변의 모습이 한자화하여 지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기 때문에 갈대만 무성히 자란 벌판의 모습을 보고 '노원'(蘆 : 갈대 노, 原 : 벌판 원)이라고 지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그리고 모든 기록에도 지역명인 '노원'이 단독으로 표기되기보다는 지역명과 역이 합쳐져서 '노원역'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면은 이 지역이 가지고 있는 여러 기능 가운데 역(驛)의 기능이 컸음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노원지역을 '마들평야'라고 부르고 있다.

이 이름은 문헌기록에 나타나지는 않지만 오랫동안 민간에서 사용되어 왔다. 그동안 갈대만이 무성하던 벌판에 역원이 생기고 정식으로 '노원'이라고 불리우게 되면서 점차 이 들판의 여러곳에 역원에 필요한 역마(驛馬)를 놓아 키우게 되었다.

한자 지명인 '노원'에 익숙치 못했던 사람들은 들판에 말들이 자라고 뛰어 다니는 것을 보고 차츰 이 들판을 '마들평야'라고 부르게 되었다. '마들'이라는 명칭은 마(馬 :말)와 들판이 합쳐진 순 우리말 표현으로 민간에서 흔히 사용하여 지금까지 전승되어 왔던 것이다.


 노원이라는 명칭은 고려시대 초기부터 시작하여 1914년 4월 1일로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까지 900여 년 이상을 지속적으로 사용해 왔다. 하지만 1914년에 노원면과 해등촌면이 합해져서 노해면(蘆海面)이 됨으로써 오랜 연원과 역사를 가진 '노원'이라는 지명이 사라지게 되었다. 그리고 나서 1963년에는 서울의 성북구에 편입되면서 '노해'라는 명칭조차도 완전히 사라졌으며, 1973년에는 다시 성북구에서 떨어져 나와 도봉구로 편입되었다.


 이런 변화 끝에 이 지역이 1988년 1월 1일을 기해 독립자치구가 되면서 '노원'이라는 명칭이 되살아나게 되었다. 이는 '노원'이라는 지명을 잃어버린지 72년 9개월만으로 노원의 부활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현재 부활된 노원은 복합 주거지역으로 꾸준히 성장하여 서울의 중심지역으로 발전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더욱 살기좋은 '노원'으로 가꾸어지고 있다.

 

「고려사」에 기록된 '노원' 기사

"崔思諏等還奏云 臣等就盧原驛海村龍山等處 審視山水 不合建都 唯三角山面

  嶽之南山形水勢 符合古文 請於主幹中心大脈壬坐丙向 隨形建都 制可

 

 문화예술제가 내일 모레인데 자세한 안내를

추후 한다더니, 감감..

'문화행사' 란에 정작 들어가야 할 노원구의

문화예술제 행사는 어디 가고...


12번째 선수는 국민모두이기에

일정을 연기합니다....

일시 : 2002년 6월 26일 13:30~19:30

장소 : 중계근린공원


대한민국님의 글입니다.

:2002년 제4회 청소년 문화예술제 일정입니다. 일시 : 2002년 6월 22일(토) 13:30~19:30 장소 : 중계 근린공원

:일정이 한국 8강 경기하는 날 입니다.

:시간도 같습니다.

:제12번째 선수가 되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제4회 청소년 문화예술제 일정을 연기하면 좋겠습니다.


노원의 유구한 역사성 (이원명 교수)   1  |  2 

 Ⅰ

노원문화원의 "노원문화" 창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이는 노원문화원의 정착을 의미하는 것이고 또한 향후 지속적인 노원 지역의 문화창달에 크게 이바지하리라 믿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노원 지역은 고려시대에 이미 크게 주목을 받은바 있다. 즉 고려 숙종(肅宗) 때 도읍을 옮기고자 계획하였을 때(고려사, 숙종 6년(1101) 冬 10月條) 당시 노원 지역이 도읍지의 후보지(노원역, 해촌, 용산, 남경) 하나로 될 정도였다. 당시 노원지역은 갈대가 무성한 허허벌판이 전개되는 지역이라 새롭게 신도시 건설의 편리함을 염두에 둔 후보지 이었다. 그런데 이곳은 당시 육상교통의 유일한 수단인 역참(驛站)으로서 노원역이 있었기 때문에 『고려사』에 처음 노원이란 명칭이 보일 때도 노원역으로 표기되었다. 그리고 갈대만 무성한 이곳 들판에 역원(驛院)이 있던 곳이라 들판에 말들이 많이 있게 되자 한자 지명인 노원에 익숙치 못했던 시람들은 이 들판을 "마들평야"라고 부르게 되었다. 따라서 마들이란 명칭은 마(馬 : 말)와 들(들판)이 합쳐진 순 우리말 표현이라 지금까지 전승되어 왔다고 본다. 조선시대 역은 중앙으로부터 각 지방에 30리 마다 도로에 설치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여 주로 대로변의 주현각읍(州縣各邑)에 설치하였다. 그리고 역의 기능은 단순한 오늘날의 역의 기능보다 광범하다. 즉 중앙과 지방과의 공문서의 전달과, 관물․세공의 수송, 관료사행(官僚使行)의 마필 급여와 숙식의 제공, 변경지대 군정 및 민정관찰, 비행관리의 규찰 등을 담당하였다.


  당시 역원은 오늘날의 노원역(지하철 4호선 및 6호선) 보다는 동쪽의 평지(현 상계 2동 노원 순복음 교회와 중앙 하이츠 아파트 근처)가 원터(원기동) 지역으로 알려지고 있다. 아마 오늘날 노원역 근처는 중량천의 범람의 염려가 있어 좀더 떨어진 지역을 역원으로 삼았다고 보여진다(상계 2동과 10동 사이). 그러다가 조선시대는 주로 경기도 양주목(楊州牧) 노원면으로 600여 년 소속되어 있다가 일제시대(1914년)에 일시적으로 노원면과 해등촌면(창동지역)이 합해져서 노해면(蘆海面)이 되었다. 광복이후 이 지역이 서울로 편입(1963년 1월 1일)되면서 성북구로 속했다가 1973년 7월 1일에 도봉구에, 그리고 드디어 1988년 1월 1일에 도봉구에서 분리되어 노원구로 독립(대통령령 제12367호) 74년 만에 노원이란 지역 명칭이 다시 되살아난 것은 여간 다행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보면 20여 년 전부터 아파트촌을 이루고 있는 이곳 노원지역은 새로 생긴 낯설은 구(區) 명칭이 아니라 멀리는 900년 가까운 유구한 뿌리가 있는 지역임을 먼저 잊어서는 안되겠다.          



이처럼 오랜 역사를 지닌 노원지역은 남쪽과 북쪽을 이어주는 교통로로 특히 조선시대에는 수도인 한양과 근접한 지역이었을 뿐 아니라, 북쪽지역인 강원도와 함경도로 가는 첫 관문이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일찍이 강조되었다. 그러한 면에서 향후 남북분단의 벽이 허물어졌을 때 각광받을 수 있는 교통의 요지가 되리라 여겨진다.


  물론 이곳 노원지역은 정치․행정․경제의 중심지가 아니라 많은 유적 유물이 분포되지는 않았지만 훌륭한 선현들의 영혼이 잠든 명당지역이요, 지형적 조건상 많은 산신제(안골, 녹천마을 치성제 등 10여 곳)가 지금도 행해지고 있는 특징이 있다고 할 수 있다. 왕릉인 태․강릉을 비롯하여 충효의 상징인 충숙이공 신도비와 한글고비 등은 자랑스러운 유적이라 하겠다.


  특히 충숙이공 신도비(하계동 산 16-1, 소재)는 병자호란(1636년)이 일어나자 80세의 노령에도 불구하고 영위사(迎慰使)로 임명되어 묘사(廟祠)를 받들고 강화도에 들어갔으나 청나라군이 쳐들어오자 유언을 남기고 스스로 목을 매 82세로 순절한 충신 이상길(李尙吉, 1556-1637)의 비석과 묘소이다. 그는 인조(仁祖) 때 승지, 병조참의, 공조판서를 역임한 자로서 강화도 충렬사에 역시 순절한 김상용(金尙容)과 함께 배향되고 좌의정에 추증된 인물이다.     


  그리고 한글고비(하계동 산 12-2, 소재)는 우리나라에서 훈민정음 창제이래 가장 오래된 한글비로 금석학적 가치가 보물급 비석이다. 영비(靈碑)라고도 알려진 이 비는 조선 초 사간원 정언과 당상관으로 활약한 이문건(李文楗, 1484-1567)이 그의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선친 이윤탁(李允濯)과 어머니 고령신씨 합장묘 앞에 세운 비이다. 한문을 읽을 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하여 비의 서쪽 측면에 따로 한글로 "영험한 비라 지운 사람은 재화를 입으리라. 이는 글 모르는 사람들에게 알리노라"라 하여 비석을 허물지 말라는 내용의 비를 새겼던 것이다. 이 비는 묘소 앞에 3년의 시묘(侍墓)생활을 하면서 석달 이상 하루에 몇 자씩 직접 각자하여 새긴 글씨이다. 그래서 그런지 50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주민들에게 신물(神物)로 여겨져 오고 있다. 특히 이곳 하계동 지역은 노원지역에서도 뒤로는 불암산을, 앞으로는 한천을 끼고 있어 옛날부터 들판이 넓고 개울이 많아 대부분 농경지와 산촌(散村) 형태의 자연부락이 있어 묘소를 쓰는데 적합한 지역이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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