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실

한해를 보내며 생각나는 분 - 조순, 김승진 교수(사제지간)

소천 조순 선생께서 금년으로 8순이시다. 
선생님 문집을 만들기 위해 도장을 새기고
또 작품을 찍고, 사진을 찍으러 다녔다.
책을 내년 봄에 나올 예정이란다.
이 일로
황재국 교수님과 외대 김승진 교수님과 교분을 갖게 되었다.
아울러 조순 선생님과 김승진 교수님의 쾌유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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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 인생의 선생님] - 신동아의 글을 옮김


밥상머리 교육으로 나를 일깨운 ‘정신적 아버지’
“눈앞의 일에 연연 말고 더 멀리 바라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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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진 한국외대 교수·경제학 seunjkim@hufs.ac.kr

경제부총리, 서울시장을 지낸 조순 선생님은 우리나라 경제학계의 거목으로서 더 큰 발자취를 남긴 이 시대의 선비시다. 또한 일찍 아버지를 여읜 내겐 학창시절부터 지금까지 학업, 진로, 결혼은 물론 건강까지 음으로 양으로 보살피고 챙겨주신 아버지 같은 존재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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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순 선생은 ‘관악산 산신령’이란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매일 관악산을 올랐다. 필자 김승진 교수가 조순 선생과 함께 영주 부석사를 찾았을 때 사진.

소천(少泉) 조순(趙淳) 선생님을 처음 뵌 때가 1967년 9월이다. 선생님께서는 미국 캘리포니아대 버클리 대학원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 상과대학 경제학과 부교수로 갓 부임해 오셨다. 그때 선생님은 10년 미국 유학생활을 마친 불혹(不惑)의 연세였고, 나는 갓 성년이 된 서울 상대 경제학과 2학년생이었다.

당시 서울 상대엔 미국에서 경제학을 배운 교수가 전무했기에, 선진 경제학 배우기를 갈구하던 학생들에게 조 선생님의 부임은 구세주의 등장과 같았다. 특히 입학 당시 서울대 최고 ‘커트라인’을 기록한 경제학과 66학번 동기들은 선생님이 처음 가르쳐주신 ‘케인스의 일반이론’에 완전히 매료됐다.

선생님은 모든 수강생에게 기말 리포트를 영어로 타이프해 제출하도록 했다. 잘하지도 못하는 영어로 겨우 리포트를 쓰고, 또 난생 처음 타이프를 치느라 며칠 동안 고생한 기억이 난다. 선생님께서는 “영어는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언어이니 경제학과 더불어 영어에도 주력하라”고 강조하셨다. 이 조언에 따라 나는 학창 시절 영어 공부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이는 훗날 미국 유학 시절 큰 힘이 됐다.

우리는 선생님에게서 화폐금융론, 경제발전론, 경제계획론, 경제이론세미나 등을 배우며 그의 심오한 학문세계에 빠져들었고, 많은 학생이 선생님처럼 실력 있는 경제학자가 되기 위해 미국 유학을 꿈꿨다. 실제로 나를 포함한 경제학과 66학번 동기생 50명 중 21명이 졸업 후 해외 유학 등을 거쳐 경제학 박사가 되어 지금 학계와 관련기관에서 일하고 있다.

선생님은 학문뿐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제자들에게 커다란 존경을 받으셨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매사를 순리대로 풀어가는 모습은 조선시대 선비와 같았으며, 또 제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은 마치 자상한 어머니와 같았다. 이는 한학(漢學), 영문학, 그리고 경제학에 통달한 학문적 깊이에서뿐만 아니라 당신이 걸어오신 인고(忍苦)의 인생역정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심오한 학문세계에 매료

조순 선생님은 학문적으로나 인격적으로나 부족한 나를 무척 아끼고 사랑해주셨다. 아버지를 일찍 여읜 나는 경제적으로 쪼들리며 공부해야 했다. 대학에 입학한 후에도 등록금은 장학금으로 조달할 수 있었지만, 의식주는 가정교사 등을 하며 해결해야 했다. 이런 사정을 잘 알고 계시던 선생님은 내게 여러 가지 일을 시키면서 경제적으로 도와주셨다.

내가 대학 3학년이던 1968년, 선생님은 서울 상대 부속 경제연구소 연구부장이란 보직을 갖고 계셨다. 당시 경제연구소는 경제학 관련 주요 영문 자료들을 한글로 번역하는 작업을 했는데, 선생님은 그 일부를 내게 맡기셨다. 나는 이 일을 통해 경제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았을 뿐 아니라 영어 실력도 향상됐고, 선생님과도 더욱 가까워졌다.

1970년 대학을 졸업했을 때에도 선생님의 권유로 한국은행에 입사, 조사1부 금융재정과에 근무했다. 선생님은 내가 한국은행에 근무하면서 서울대 대학원 경제학과를 다니도록 선처해주셨다. 또한 내 석사학위 논문 지도교수로 수고하시면서 나를 이끌어주셨다.

내가 군대 문제로 고민하자 선생님은 당신께서 1951년부터 1957년까지 육군사관학교 영어과 교관으로 근무하신 것처럼 나도 육사 교관으로 군 복무할 것을 권유하셨다. 그 말씀을 따라 1972년 석사학위를 취득하자마자 육사 교관을 지원, 1975년까지 육사 생도들에게 경제학을 가르쳤다. 이 기간 나는 경제학을 더 깊게 공부할 수 있었고, 군 제대 후 바로 미국 유학을 갈 수 있었다. 모두 선생님의 가르침 덕분이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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