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실

노원의 역사 기록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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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이긍익(李肯翊)

1966년

 


명종 20년 4월 7일 계유에 창덕궁(昌德宮) 소덕당(昭德堂)에서 승하하니, 수는 65세이다. 아들 하나와 딸 넷을 낳았다. 능은 태릉(泰陵) 양주(楊州) 남쪽 노원면(蘆原面) 임좌(壬坐 북)이다. 을축년 7월 15일에 장사지냈으며, 표석이 있다.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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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서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이긍익(李肯翊)

1966년

 

선조조의 상신(相臣)

○ 임금이 부음을 듣고 놀라며 애도하여 복작(復爵)을 명하였고, 아전들과 군민(軍民) 중에는 각각 재화를 내어 수의를 만들어 바치는 자가 잇달았다.이항복이 노원(蘆原)으로부터 달려가서 대렴(大斂)할 때에 참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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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서

용재총화(慵齋叢話)

성현(成俔)

1971년

용재총화 제7권

---무릇 채소와 과실은 알맞은 흙에 따라서 모두 심어야 그 이익을 거둘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의 동대문 밖 왕십리는 무, 순무, 배추 따위를 심고 있으며, 청파(靑坡)·노원(蘆原) 두 역(驛)은 토란이 잘 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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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서

임하필기(林下筆記)

이유원(李裕元)

1999년

 

오음(梧陰)과 서계(西溪)의 구기(舊基)

오음 윤공(尹公)의 구택(舊宅)이 노원(蘆原)에 있는데, 백사(白沙) 선조께서 일찍이 꿈속에 그곳을 유람하고 지은 시에 이르기를, “복사골 안에 넓은 들이 펼쳐 있고, 녹야당 안에 여덟 용이 살고 있네.[桃花洞裏開千畝 綠野堂中有八龍]”라고 하였다. 내가 연전에 그곳을 찾아가 한 차례 유람을 하고는 그 길로 누산(樓山)에 있는 박서계(朴西溪)의 옛집에까지 갔었는데, 수석(水石)의 승경(勝景)은 노원보다 나았으나 그 기지(基址)의 형국은 그만 못하였다. 노원은 동쪽 들판 가운데 제일가는 곳이다. 오음은 문정공(文靖公) 윤두수(尹斗壽)이고, 서계는 문정공(文貞公) 박세당(朴世堂)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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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서

잠곡유고(潛谷遺稿)

김육(金堉)

1998년

 

구루정기(傴僂亭記)

수락산(水落山)은 노원(蘆原)의 뒤편에서 마치 불곡산(佛谷山)을 전송하는 것 같고, 무악산(毋岳山)은 안현(鞍峴)의 위에 있으면서 마치 부아봉(負兒峯)을 좇는 듯하여, 기괴한 형상과 이상한 모양새가 여기저기 겹쳐서 나타난다. 그리고 백운봉(白雲峯)과 인수봉(仁壽峯) 등 여러 봉우리가 저 멀리 구름 하늘 밖 아득한 곳에 삐쭉하니 솟아 있는 모습이 더더욱 경외스럽고 사랑스러우니, 아침이면 아침대로 저녁이면 저녁대로 안개와 구름이 변화함에 따라 혹 숨기도 하고 드러내기도 하며, 혹 합해지기도 하고 혹 떨어지기도 한다. 그 누가 성시(城市) 안에 이처럼 신선의 경치가 있는 줄을 알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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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서

잠곡유고(潛谷遺稿)

김육(金堉)

1998년

을묘년(1615, 광해군 7)에 호조 참의에 제수되었는데, 장령 박재(朴榟)가 정인홍(鄭仁弘)의 지시를 받고 또다시 최영경의 일을 거론하여 공을 파직시켰다. 이에 공은 노원(蘆原)의 촌사(村舍)로 물러나 살면서 도성 안으로 자주 들어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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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번역서

필원잡기(筆苑雜記)

서거정(徐居正)

1971년

 

○ 고려 숙종 때에 위위승(衛尉丞) 김위제(金謂磾)가 도선(道詵)의 비결에 의거하여 남경(南京 한양)으로 수도를 옮길 것을 청하며 말하기를, “양주(楊州)에 목멱(木覓)의 땅이 있어 도읍을 세울 만하다.” 하니, 왕이 친히 가서 시찰하고, 또 최사추(崔思諏)와 윤관(尹瓘) 등을 보내어 자세히 살펴보게 하였는데, 돌아와 아뢰기를, “노원(蘆原)ㆍ해촌(海村)ㆍ용산(龍山) 등의 산수는 도읍을 세우는 데 합당치 않고 오직 삼각산 전면 산악의 남방은 산형과 수세가 고금의 법에 부합하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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