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실

임기환의 '고구려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4>

고구려의 땅, 얼마나 광대했나

임기환의 '고구려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4>

처음에 말씀드린 바와 같이 고구려 하면, 대개는 활발한 정복활동과 광대한 영토를 차지한 대제국의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실제로 고구려는 삼국 중 가장 활발하게 동서남북 사방으로 정복 전쟁을 펼쳤으며, 그 결과 많은 영역을 확보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한반도가 답답하다고 느끼는 요즘 우리들은, 과거 고구려 영토의 크기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특히 좁은 한반도와는 달리 광대한 이미지를 주고 있는 만주 지역에 대한 관심은 대개는 고구려를 매개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요즘 중국이 ‘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고구려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려고 획책하면서 대고 있는 핑계 중의 하나가, 바로 한국에서 고구려란 역사를 통해 만주의 고토회복을 부르짖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이렇게 과거의 역사와 오늘의 현실을 혼동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지만, 어쨌거나 고구려가 우리에게 만주라는 시원한 무대에 대한 기억을 환기시키는 역사임도 부정할 수 없을 듯합니다.
  
  그러면 정말로 만주 지역에서 고구려의 영토는 얼마나 컸을까요?
  
  고구려 전성기 때 즉 장수왕에서 문자왕때의 영토를 보면, 북으로는 지금 중국의 농안에서 송화강 유역에 있는 길림(吉林)과 장춘(長春)을 잇는 선까지 올라갑니다. 여기는 옛부여의 땅이죠. 동쪽으로는 지금의 두만강 하류에서 훈춘 지역 일대가 되겠고, 서쪽으로는 요하(遼河)가 주된 경계선이 되겠습니다. 그리고 남쪽 한반도로 내려와서 고구려의 영역은 지금의 남양만에서 죽령일대를 거쳐 동해안의 울진ㆍ영덕 지역을 잇는 선이 될 것입니다.
  
  다만 당시의 영토라는 것이 오늘의 국경선처럼 분명하게 선이 그어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전체 면적을 추정하기는 어렵지만, 오늘의 한반도 면적보다는 물론 많이 크고, 대략 2~3배 정도 되는 크기였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물론 이런 정도의 영토 크기로는 대제국 고구려의 명성에 걸맞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고구려의 영역을 북쪽으로는 훨씬 북쪽의 시베리아 지역까지 확장하기도 하고, 서쪽으로는 요하를 건너 요서나, 나아가서는 한때 지금의 북경까지 진출했다는 주장들도 있습니다. 아마 일시적으로는 앞에서 말씀드린 영역 이상으로 진출한 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인 것이고, 고구려라는 나라의 중심 무대는 역시 앞에서 언급한 그런 정도 영역에 한정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고구려가 기본적으로 유목이나 수렵문화가 아닌 농경문화에 기초를 둔 나라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되겠습니다. 고구려의 북쪽 경계선은 바로 농경을 할 수 있는 북한계선을 벗어나는 것이 아닙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고구려 사람들이 순록이나 사냥하겠다고 추운 시베리아 지역으로 기를 쓰고 올라갔겠습니까?
  
  다만 서쪽 경계선은 한두가지 따져볼 점이 있습니다. 이에 답하기 전에 제가 만주의 고구려 유적들을 답사해본 소감을 먼저 말씀드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구려의 발상지인 압록강과 혼강 일대에 가보면 그 자연 조건이 산이 이어져 있고 그 사이사계곡과 평야 지대가 펼쳐져 있는 모양새가 한반도의 지형과 아주 비슷합니다. 그래서 마치 우리나라의 어떤 지역을 여행 다니는 그런 편안함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보통 만주의 광할한 평원 지대라고 하는 것은 장춘 서쪽의 요하 상류에 있는 송원 평원 지대 및 요하를 따라 남북으로 길게 펼쳐지는 유역입니다. 정말 이 지역은 하루종일 차를 타고 가도 끝없이 평야지대가 이어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곳입니다. 아주 낯선 풍광이라 저더러 그 곳에서 살라고 하면 도저히 살지 못할 것 같았습니다. 1천 5~6백년전에 고구려인들이 말을 달려 서쪽으로 진출하다가 눈앞에 펼쳐지는 이런 대평원을 만났을 때 과연 그들은 어떤 느낌을 받았고 무슨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고구려인들도 저와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요?
  
  고구려인들이 대략 요하에서 말발굽을 멈추었던 이유를, 이렇게 답사를 하면서 정서적으로는 알 수 있을 듯했습니다. 물론 이는 제 개인의 감상적인 소박한 생각에 불과하기 때문에 어떤 합리적인 근거를 갖는 것은 아닙니다만, 저는 역사 해석에서 이런 정서적인 부분도 매우 중요하다고 평소 생각하고 있습니다.
  
  물론 실증적인 자료도 몇가지 있습니다. 고구려의 영역을 보여주는 가장 중요한 자료는 바로 고구려의 산성(山城)입니다. 나중에 말씀드릴 기회가 있을 것이지만, 산성은 고구려가 자신의 영역을 지배하는 가장 중심적인 요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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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의 고구려성 분포도 ⓒ고구려성, 고구려특별대전 도록

  그런데 이런 산성의 가장 서쪽선은 그 대부분이 요하와 그 동쪽의 산악지대가 만나는 접점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그 유명한 안시성, 건안성, 백암성, 신성 등이 모두 그렇습니다. 또 고구려 말기에 쌓았다는 천리장성 역시 아직 그 위치가 명확히 밝혀진 것은 아닙니다만, 요하선을 따라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한편 5세기 이후의 국제정세를 보아도 요서 지역은 모용씨(慕容氏) 선비족이나 북위(北魏)가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고구려가 굳이 이들 강대국과 치열하게 전쟁을 치르면서 굳이 요서 지역으로 진출할 필요성이 과연 있었을까 하는 의문이 들기도 합니다.
  
  우리는 고구려의 영역을 생각할 때 너무 크기만을 생각합니다. 예나 지금이나 영토란 양의 문제만이 아니라 질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또 땅이란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생활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고구려인이 차지하려 했던 땅은 바로 그들이 살기 좋다고 생각한 땅이라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역사의 현장을 직접 답사하면서 몸으로 느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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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 한ㆍ중의 경계선인 압록강 ⓒ임기환

  제가 답사의 중요성을 체험한가지 예를 덧붙인다면, 바로 압록강의 이름입니다. 압록강은 고구려때의 이름이기도 한데 ‘푸른 강’이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강이 모두 푸른 색인데, 왜 유독 압록강에만 푸른 강이란 이름을 붙었을까 궁금했습니다. 제가 중국에 가서 그 해답을 얻었는데, 다녀보니 대릉하, 요하 등 요서와 요동의 모든 강이 다 누런 황토 강이었습니다. 이런 누런 강만 만나다가 압록강에 이르러 비로소 처음으로 푸른색 강을 만나게 됩니다. 이는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아마 옛사람도 마찬가지였을 것입니다. 누런 다른 강과는 달리 아주 짙푸른 강에 감동하여 “푸른 강”이란 이름을 붙이게 되지 않겠습니까?
  
  과거 고구려인이 살았던 땅도 오늘날 우리가 만나는 그런 모습과 그리 다르지 않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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