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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 임기환

고구려는 우리에게 무엇을 남겼나 / 임기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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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총 수렵도(狩獵圖). 고구려인의 씩씩한 기상을 전하는 대표적 그림 중 하나로 꼽힌다. 달리는 말 위에서 호랑이와 사슴을 겨냥한 고구려 무사의 역동적인 모습이 화면을 가득채우고 있다. ⓒ임기환


중국의 동북공정과 고구려사

  
근래에 중국이 고구려사를 자국의 역사로 편입시켰다고 해서, 작년 말부터 세간의 이목이 이 문제에 집중되었고, 여기저기서‘역사 전쟁’이니‘고구려사 되찾기’니 하는 위기감을 담은 목청이 높아진 바 있습니다. 사회의 이목이 이렇게 불처럼 끓어올라 역사 문제에 집중되는 것도 매우 드문 일이어서 역사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반갑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냉정을 잃지는 않을까 걱정스럽기도 하였습니다. 이 문제야말로 감정적으로 대응하거나 풀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동북공정’이니 ‘고구려사’니 하면서 많이들 이야기하고 있지만, 사실 일반인들에게는 그 중요성이나 관심의 폭만큼 구체적인 내용이 충분히 알려져 있지는 않은 듯합니다. 우선은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해 보다 정확하고 올바른 정보를 공유함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는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리라 생각합니다만, 중국은 2002년 2월부터 사회과학원에 소속된 변강사지연구중심(邊疆史地硏究中心)이란 기관이 주도하여 소위 ‘동북공정’이란 프로젝트를 5개년 계획으로 추진하고 있습니다. 동북공정의 원래 명칭은 ‘동북변강사여현상계열연구공정(東北邊疆史與現狀系列硏究工程)’으로, ‘동북 변강의 역사와 그에 따라 파생되는 현재 현상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 프로젝트’쯤으로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이 프로젝트에서는 중국의 동북 3성 지역의 역사ㆍ지리ㆍ민족 문제 등과 관련된 여러 사안을 다루고 있으며, 많은 비용이 투입되는 상당히 중요한 국가적 사업으로 추진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동북공정’ 프로젝트에는 고구려를 비롯한 고조선ㆍ발해 등 한국고대사는 물론 간도 문제 등 한국사와 관련된 주제가 많이 포함되어 있으며, 그 내용들이 우리의 고대사 인식과는 전혀 동떨어진 것이라는 데에서, 근자에 소위 ‘역사 전쟁’이 터지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중국이 고구려사를 자기 역사로 편입하려는 게 최근 1, 2년 사이에 이렇게 바뀐 게 아닙니다. 이미 1990년대 중반부터 고구려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파악하는 논리를 개발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좀더 그 연원을 살펴보면 1980년대 전반에 나타난 소위 ‘통일적 다민족국가론(統一的 多民族國家論)’까지 그 맥락이 닿게 됩니다.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은 “중국은 현재뿐 아니라 2000년 전부터 통일적 다민족국가를 형성하였기 때문에, 현재 중국 영역 내에 위치한 소수 민족은 다민족(多民族) 국가인 중국의 구성원으로서, 중원 왕조와 항상 정치ㆍ경제ㆍ문화적으로 밀접한 연계를 가지며, 중국 영역의 일부를 구성하고 중국사에 공헌하였다.”는 주장입니다.
  
사실 이러한 주장은 역사적으로 볼 때 전혀 이치에 맞지 않는 억지 주장입니다. 그러나 우리와는 달리 중국이란 국가가 한족 이외에도 55개나 되는 많은 소수 민족을 포함하고 있는 나라라는 점을 염두에 두면, 그러한 고민이 이해되는 점이 없지는 않습니다. 현재 중국의 입장에서는 소수민족이 분리 독립하게 되면 심각한 문제가 초래되기 때문에, 이러한 사태를 막기 위해서도 중국 내의 모든 민족의 융합과 통일을 표방하며 소위 ‘중화민족’이라는 새로운 민족 개념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소위 ‘통일적 다민족국가론’이란 주장이 그래서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이러한 ‘현재의 논리’를 ‘과거의 역사 해석’에 그대로 적용함으로써, 심각한 역사 왜곡의 폐해를 낳게된 것입니다. 말하자면 현재 중국 영토 안에 과거 고구려의 영역 일부가 겹쳐지게 되면서, 고구려의 역사를 중국사에 편입시키야만 하게 된 셈입니다. 그래도 얼마 전까지만 해도 고구려의 수도가 국내성(현 중국 길림성 집안시)에 있을 때에만 중국사의 일부로 파악하는 정도로서, 어느 이상의 경계선을 넘지 않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1990년대에 들어오면서부터는 태도를 바꾸어 고구려사를 중국사로 편입하려는 주장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여러 가지 배경이 있겠지만, 근자에 부쩍 커진 정치적ㆍ경제적 힘을 바탕으로 동아시아에서 패권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아닌가 짐작됩니다.
  
 물론 중국측 주장은 학문적으로는 심각한 오류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애시당초 현재 중국의 정치적 입장이 강하게 투영되어 나타났다는 점을 고려하면, 고구려사 왜곡 문제를 해결하는 실마리를 찾는 것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따라서 당장의 대책도 마련해야겠지만, 보다 차분하게 장기적으로 우리 역사에서 고구려사의 위치와 의미를 올바르게 자리매김하는 작업이 가장 중요한 일이 될 것입니다. 그럴려면 무엇보다 우리 모두가 고구려사에 대해 막연한 감상에서 벗어나서, 좀더 구체적으로 고구려사의 실상에 다가가는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의 소유란 곧 그 역사를 기억하고 잘 이해하는 사람들의 몫이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뜻에서 앞으로 고구려사의 이모저모를 살펴보면서, 또 천5백년전의 고구려사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던져주는 역사적 의미와 교훈에 대해서도 함께 생각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고구려사는 우리에게 무엇인가
  
최근 몇 달 동안 방송이나 신문 등 언론에서는 고구려사를 특집으로 많이 다루고 있습니다. 아마도 근 십몇년 동안 실린 양보다 더 많은 글과 기사들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그런데 이런 기획물을 보면서 재미있는 현상을 찾을 수 있었습니다. 즉 고구려사에 대해 오늘날 우리들이 어떤 이미지들을 갖고 있었는지 좀 더 분명하게 드러났던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지금 당장 ‘고구려’하면 금방 떠오르는 이미지들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아마도 대개는 고구려는 우리 역사상 가장 광대한 영토를 소유하였던 나라였다는 인상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입니다. 특히 광활한 만주 대륙의 지배자라는 이미지가 더욱 강렬하여, 소위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자주 나오는 기마상을 두고 “만주 대륙 말 달리던 고구려인의 활달한 기상” 같은 식의 이미지는 상투적으로 많이 이야기되는 편이죠.
  
이와 연관하여 고구려인들은 상무적 기풍이 두드러지고 군사력이 뛰어난 나라라는 점도 두드러진 이미지의 하나입니다. 특히 중국의 통일제국인 수나라와 당나라의 침략에 당당히 맞선 전쟁에서 얻은 빛나는 승리 즉, 예컨대 살수대첩이나 안시성 전투 등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면들로 기억하고 있을 것입니다. 이런 것들을 종합해보면 고구려는 우리 역사상 가장 강력한 국력과 군사력을 발휘하였던 나라, 대외적 정복활동과 팽창이 눈부셨던 나라, 만주 대륙을 호령하며 중국에 위세를 떨쳤던 나라 등등으로 요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금방 생각할 수 있는 이런 인상들이 대체로 고구려사의 중요한 특징을 보여주는 것은 사실입니다. 다만 강대한 국가라는 일측면만이 지나치게 강조되고 있다는 점에서 고구려사가 갖는 특성의 일부만이 이해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이런 고구려사에 대해 우리들이 갖고 있는 편향된 이미지는 사실상 오늘의 우리 자신이 처해 있는 현실과 무관하다고 생각되지는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갖는 상대적으로 좁은 국토, 근대 초에 경험한 식민지배, 미국이나 중국ㆍ일본 등 열강에 둘러싸여 있는 현실, 국제사회에서 초라하다고는 못해도 그다지 힘을 발휘할 수 없는 국가의 위상을 생각하면, 일종의 보상심리 차원에서 과거 역사의 영광스러운 모습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있는 측면도 부정할 수는 없으리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오히려 이러한 관점들이 고구려사를 막연하게 이해하게 되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사실 우리들은 고구려에 대해 강렬한 인상을 갖고 있습니다만, 구체적인 역사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는 실정입니다.  물론 우리에게 고구려사가 추상적이고 막연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또 있습니다. 역사란 역사 현장에서의 체험이 매우 중요합니다. 경주에 가면 우리는 신라인들이 남긴 많은 문화 유산을 만날 수 있습니다. 불국사ㆍ석굴암ㆍ첨성대 등을 통해 신라인들의 삶과 생각들을 어느 정도 피부로 느낄 수 있습니다. 또 부여나 공주에 가면 백제인들의 모습을 접할 수 있습니다. 이렇게 현장에서 만나는 역사는, 우리에게 역사란 막연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삶에 대한 이해라는 점을 확인시켜 줍니다.
  
그런데 고구려의 역사를 만나려면 북한이나 중국의 만주에 가야 되는데,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많습니다. 이처럼 역사 현장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에, 웬지 고구려사는 신라사나 백제사에 비하여 구체적인 모습으로 다가오지 않고 신비에 쌓여있는 듯합니다. 따라서 고구려사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는 것은, 오늘날 우리들이 고구려를 만나는 데 제약이 되는 조건들을 극복한다는 의미도 동시에 포함하고 있습니다. 해방 이후 지금까지 북한에서는 지리적인 조건 등으로 고구려사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상대적으로 신라사나 백제사에 더 큰 관심을 기울여 왔습니다.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지만, 이런 점에서 고구려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장차 남북의 통일에 대비하기 위해서도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고구려사의 문제가 단지 과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하면, 이제 우리는 강렬하지만 막연한 이미지에 그친 고구려상을 벗어버리고 보다 구체적인 면에서 접근하고 객관적이고 과학적 이해를 가져야 할 때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옛사람의 삶의 모습과 그들의 생각과 기억들을 만나는 작업이 쉽지는 않습니다. 특히 고대사처럼 오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갈 때에는, 워낙에 우리에게 주어진 사료가 적기 때문에 마치 수수께끼를 푸는 듯한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오히려 그러한 점 때문에 무슨 숨겨진 역사의 비밀을 탐색하는 가슴 두근거리는 매력도 적지 않습니다. 앞으로 고구려사가 갖는 그런 매력을 여러분들에게 하나씩 보여드릴까 합니다.
 

고구려 토기

고구려는 신라나 백제와는 달리 우리와는 매우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갖게 됩니다. 사실 신라와 백제는 수학 여행길이나 문화유적 답사 등을 통해 자주 그리고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물론 역사 그 자체는 아니지만 곳곳의 유적이나 유물을 통해 백제인과 신라인의 숨결을 가까이 느낄 수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고구려는 그 중심 무대가 지금의 북한이나 중국 땅이기 때문에 아무래도 우리가 그리 쉽사리 다가갈 수는 없지요. 그래서 그런지 잘 알 수는 없지만 무언가 거대한 역사가 깊이 잠들어 있으며, 아직 그 실체를 우리에게 드러내 보이지 않은 신비감마저 느낄 정도입니다. 그러나 사실은 우리 주변의 전혀 예기치 않은 곳에서 의외로 아주 쉽게 그리고 자주 고구려를 만날 수 있습니다. 전혀 믿기지 않으신다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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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토기 ⓒ프레시안

그러면 먼저 서울 아차산 보루에서 출토된 고구려 토기를 만나 볼까요. 어딘가 낯이 익지 않습니까? 글쎄 어딘가에서 본 듯하지만 잘 떠오르지 않는다구요? 요즘은 우리 주변에서 쉬이 보이지는 않습니다만, 햇살 바른 장독대에 옹기종기 모여져 있는 정감있는 옹기를 한번 떠올려 보십시오. 그 둥글고 소박한 모습은 항상 넉넉한 마음을 갖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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옹기 ⓒ프레시안

그럼 이 옹기와 고구려 토기를 비교해 볼까요?  자 어떠십니까? 정말 똑 닮았죠.  이게 우연의 일치일까요? 아님 옹기에 고구려 토기의 모습이 전승되어 남아있게 된 것일까요? 굳이 역사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왜 오늘날의 옹기가 1500년전 고구려 토기랑 그 생김새가 그리도 빼닮게 되었는지는 누구나 금방 알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고구려는 이렇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도 조용하게 우리 곁에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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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4보루성 전경 ⓒ프레시안 

어디 옹기 뿐이겠습니까. 좀더 구체적인 것은 앞으로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고, 내친 김에 여러분들이 답사할 수 있도록 남한에 남아있는 고구려 유적 한 두군데를 더 소개하지요.  먼저 좀 전에 보여드렸던 고구려 토기가 무더기로 발굴된 아차산 고구려 보루 유적을 소개합니다. 통칭 ‘아차산 4보루성’이라고 부르는 이 한 곳에서만 무려 1천여 점의 고구려 토기가 출토되었는데, 그 양과 질이 북한에서 나온 토기에 못지 않다고 합니다.
  
4보루성은 발굴 조사 결과 그 원래의 모습을 어느 정도 복원할 수 있게 되었는데, 대략 군인 1백명 정도가 거주하고 있던 군사 시설이었음이 밝혀졌습니다. 그리고 이 근처 광장동과 구리시에 걸쳐 있는 아차산 줄기와 이어지는 용마산 줄기에서는, 한강에서 임진강으로 이어지는 교통로를 방어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15개 정도의 고구려 보루성이 발견되었습니다. 그 중 발굴 조사된 곳은 2곳에 불과합니다만, 많은 유물만이 나온 4보루성 하나만으로도 고구려는 한걸음 우리 가까이 다가오게 된 셈입니다.
 
이 아차산 보루성 유적에서 멀리 한강변을 바라보면 강북쪽에 동서울터미널이 보이는데 그 근처에는 구의동 군사유적이 있습니다. 이 유적은 1977년에 택지개발 조사를 하던 중 발견되었는데, 처음에는 다들 백제 무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시는 백제 무녕왕릉을 발굴하여 백제사에 대한 관심이 높아져 있었고, 또 바로 한강 너머 가까운 거리에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이라는 백제 도성 유적이 있기 때문에, 자연스레 이 곳도 백제유적으로 판단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외형상으로 보아 고분처럼 생겼기 때문에 처음 조사하면서는 다들 백제 고분일것으로 추정했습니다. 다만 도저히 백제 것이라고는 볼 수 없는 이상한 토기들이 나와서 다들 의아하게 생각했지요. 그러다가 몽촌토성에서 고구려 토기인 나팔입토기가 나오고, 또 아차산 보루성이 발굴조사되면서, 이 구의동 유적도 고구려 군사 유적임이 밝혀지게 된 것이지요. 즉 이 구의동 유적은 그 위치나 규모로 보아 아차산 보루성의 전방 초소 역할을 한 것으로 짐작됩니다. 이처럼 눈앞에 고구려 유적을 놓고도 이를 미처 알아보지 못하였으니, 이것만 보아도 그동안 고구려가 얼마나 우리에게 멀리 떨어져 있었나 짐작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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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호로고루성 원경 ⓒ프레시안  

자 이제 발길을 좀더 북쪽으로 돌려볼까요. 경기도 연천군 장남면 임진강 북쪽의 현무암 수직단애 위에는 삼각형 모양의 평지성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유명한 ‘고구려 호로고루성’이지요. 이 호로고루성은 임진강 북안의 넓은 벌판 위에 우뚝 솟아 있어 마을 주민들은 '재미산' 또는 '재미성'으로 부르고 있습니다. 지금은 성으로 들어가는 입구 부분의 성벽이 훼손되어 있지만, 고구려의 축성술을 잘 보여주는 거대한 성벽입니다. 이 호로고루성이 자리잡고 있는 지역은 삼국시대부터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왜냐면 이곳은 장마철을 제외하고는 물의 깊이가 무릎 정도밖에 되지 않아 말을 타거나 걸어서 건널 수 있는 여울목을 이루고 있기 때문입니다.
  
조선시대에도 이 지역은 '호로탄' 이라 하여 장단을 통해 개성으로 들어가는 주요 길목이었습니다. 아마도 호로고루성은 고구려가 남진하면서 구축한 전략적 거점이었던 듯합니다. 특히 이 곳에서는 수많은 고구려 기와편들이 발견되었는데, 이 역시 그동안 우리 남한에서는 그동안 매우 귀했던 유물들이라서 그 의미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습니다. 임진강 일대에는 호로고루성과 비슷하게 생긴 고구려 성이 몇 개 더 발견되었는데 나중에 다시 소개하도록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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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로고루성에서 출토된 고구려 기와편 ⓒ프레시안

이렇게 아차산 보루성과 호로고루성은 멀리 떨어져 있던 고구려사를 우리 곁으로 한결 다가오게 하였습니다. 역사란 선인들의 발자취와 손길과 숨결이 어려있는 곳에서 더욱 가까이 느끼게 되는 법이니까요.


고구려는 언제 우리 역사에 등장하였을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삼국사기>의 고구려본기에는 기원전 37년에 시조 주몽이 동부여로부터 남하하여 졸본지역에 도착하여 고구려란 나라를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을 담아내고 있는 것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른바 주몽 설화입니다. 그렇다고 고구려란 국명이 이 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중국 한나라가 고조선을 침공하여 멸망시키고 그 땅에 낙랑군ㆍ현도군ㆍ진번군ㆍ임둔군 등 4개의 군현을 설치하였는데, 그 중 현도군이 바로 고구려 지역에 설치되었습니다. 이 현도군에는 3개의 현이 설치되었는데 그 중에는 ‘고구려현’이란 이름이 보입니다. 이 때가 기원전 107년이니, 이미 상당히 오래 전부터 ‘고구려’라고 불리는 세력집단이나 종족이 그 지역에 자리잡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고고학 자료를 보아도 고구려라고 부르는 집단이나 종족이 기원전 2세기 경부터 압록강과 혼강을 중심으로 성장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들은 철기문화와 농경을 기반으로 강가나 계곡에 자리잡은 지역 정치집단이었습니다. 그래서 이들 지역집단을 ‘나(那)’라고 불렀는데, 땅(地)이나 내(川), 또는 냇가의 평야를 뜻합니다. 곳곳에서 성장한 이들은 『삼국사기』나 『삼국지』에 조나(藻那), 주나(朱那), 소노(消奴), 절노(絶奴) 등등의 이름을 남기고 있습니다.  고구려를 세운 종족은 보통 예(濊)족, 혹은 맥(貊)족, 혹은 예맥(濊貊)족으로 중국 역사책에 기록된 종족과 관련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중에서도 맥족이 직접적으로 관련됩니다. 물론 고구려를 세운 맥족은 크게는 예족의 범주에 들어간다고 보입니다. 예족은 발해 동북지역의 종족을 가리키는 일반적인 명칭으로 사용되었기에, 부여나 옥저․동예들도 모두 예족에 해당한다고 생각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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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가 일어난 첫 수도에 남아있는 오녀산성. 중국 요녕성 환인현에 있다. ⓒ임기환

그래서 중국 역사책에는 2세기경 고구려의 풍속이 부여ㆍ옥저ㆍ동예 등과 비슷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맥’이라 칭호는 고구려가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발전하여 다른 집단과 구분되기 시작하면서 따로 불리워진 칭호로 생각됩니다. 고구려의 칭호와 관련하여 몇가지 재미있는 자료가 있습니다. 지금 외몽고 오르콘강에서는 돌궐이란 종족이 남긴 옛 비문이 발견되었습니다. 이 비문은 730년에 만들어졌는데, 그 내용 중에는 돌궐 시조인 이스타미의 장례식에 ‘동쪽의 해뜨는 나라’에서 조문사가 왔다고 하면서 그 나라 이름을 ‘배크리’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배크리는 ‘매크리’와 통하는 발음으로 곧 ‘맥(貊)구려’가 됩니다. 이는 맥족인 고구려라고 해석할 수 있습니다.
  
또 프랑스 국립도서관에는 돈황문서가 보관되어 있는데, 그 중에는 위그르족이 남긴 기록에 과거 돌궐인들이 고구려를 ‘무구리’라고 불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이 역시 ‘맥구리’와 통하는 말입니다. ‘무쿠리'라는 이름은 티베트의 기록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며, 서로마제국의 기록에는 무크리트(Mukruit)로, 동로마제국의 기록에는 '모굴리(Moguli)'라고 나와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통상 고구려라고 부르는데, 당시에는 이를 어떻게 읽고 불렀겠습니까? 정확한 발음은 알 수 없습니다만, 맥그리, 우구리의 예를 보아 아마도 ‘고구리’ 또는 ‘고우리’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추정됩니다. 비슷한 예가 중국 기록에도 보입니다. 즉 고구려가 아니라 고구리나 고우리로 부르는 것이 당시 발음에 근사한 것입니다. 그러면 고구려의 뜻을 새겨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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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원고구려비 - 고려라는 이름을 전하는 한반도 유일의 고구려비.
충북 중원군에 있다. ⓒ임기환 

 
고구려에서는 성(城)을 ‘구루’라고 불렀습니다. 고구려의 ‘구려’는 ‘구루’와 통하는 말로서 ‘성’이란 뜻이 되겠습니다. 우리말의 골, 홀이란 말과 통하는 것입니다. 고(高)자는 크다, 높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즉 고구려라는 이름은 대성, 큰 성이란 뜻으로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겠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고구려란 이름만 알고 있는데, 고구려는 ‘고려(高麗)’라는 이름으로도 불렀습니다. ‘고려’하면 흔히들 왕건이 세운 고려 왕조만을 생각하는데, 고구려도 고려라는 국명을 사용하였습니다. 잘 알다시피 왕건의 고려는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명도 그대로 따온 셈이죠.
  
고구려가 언제부터 ‘고려’라고 불렀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대략 5세기 이후의 중국 역사책에서부터 고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지금 충청북도 중원 지방에 남아있는 중원고구려비에서도 고구려인 스스로가 ‘高麗’라고 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 비는 장수왕대 세운 것으로 짐작되고 있는데, 아마도 장수왕이 평양으로 천도한 이후에 분위기를 쇄신하는 뜻에서 ‘高麗’라는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나 추측되기도 합니다. 따라서 우리 역사상 고려라고 불리운 왕조는 두 번 있었던 셈입니다. 여기서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칭호를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오늘날 우리 남한의 국호는 대한민국이라고 하는데, 여기의 ‘한(韓)’은 과거에 ‘삼한(三韓)’ 등으로 불리운 바 있듯이 우리 민족을 가리키는 대표적인 칭호에서 나온 것입니다. 북한의 공식 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데, 여기의 ‘조선’ 역시 역대에 조선이라 불리운 왕조가 2차례나 있었으며, 근세의 왕조 명칭이기도 하였기 때문에 우리 민족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칭호의 하나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만약에 남북한이 통일된다면, 통일 국가로서의 칭호를 어떻게 부르는 것이 좋을까요. 이미 한(韓)이란 이름과 조선(朝鮮)이란 이름을 남북한이 각각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 둘 중의 하나를 사용하게 되면 아무래도 다른 쪽에서 반대하겠지요. 그러면 결국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칭호로는 ‘고려(高麗)’라는 칭호가 남게 됩니다. 역대에 고려로 불리운 왕조가 2번이나 있었고, 또 고려에서 유래하여 지금도 서구에서는 ‘코리아’라고 부르고 있기 때문에 더더욱 적당하다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그 이름부터가 다시금 통일을 지향하는 오늘 우리들에게 새롭게 다가오게 되는 것입니다.



필자 소개
필자 임기환은 서울대 국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았다. 경희대 강의교수와 한신대 연구교수를 거쳐 현재 고구려연구재단 연구위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고구려 정치사 연구> <고대로부터의 통신>(공저) 등의 저서가 있다. 이메일: kh303@kore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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