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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수대첩 승리로 이끈 을지문덕 장군

살수대첩 승리로 이끈 을지문덕 장군
지혜로운 '청야 전술'로 수양제 30만 대군 대파

‘출렁이며 흐르는 저 푸른 살수에/
수나라 백만 대군 장사 지냈지./
낚시꾼 나무꾼들 신나는 말이/
그까짓 대국 놈들 별 것 아니로구나!’

조선을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운 조준이 청천강이 내려다보이는 누각에서 명나라 사신 축맹과 더불어 술을 마시며 지은 시입니다. 조준은 이 자리에서 옛날 조선의 조상인 고구려 을지문덕 장군이 명나라의 조상인 수나라 백만 대군을 물리친 살수대첩을 시로 읊어, 큰 나라라고 우쭐대는 명나라가 조선을 얕잡아 보지 못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렇듯 을지문덕 장군이 수나라 대군을 물리친 살수대첩은 우리 역사에서 큰 자랑거리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조선 시대에서도 영양왕과 을지문덕 장군에게 제사를 지내며 자랑스런 조상을 잘 대접해 주었습니다. 오늘은 살수대첩이 일어난 과정을 알아 보고 고구려가 어떻게 수나라를 이길 수 있었는지를 살펴볼게요.

▲ 수나라 등장으로 고구려에 큰 위기 닥쳐

광개토태왕이 임금에 오른 후 고구려는 몽골 초원의 유목제국, 양자 강 이남의 한족 왕조, 황하 유역의 선비족 등이 세운 호족 왕조와 더불어 동아시아의 4대 강국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200 년 동안이나 평화롭던 고구려에게 위기가 닥쳤습니다. 바로 581년 건국한 수나라의 등장이었습니다.

수나라의 문제는 양자 강과 황하 유역의 북제, 진 등을 통합해 강력하고 거대한 제국을 건설했습니다. 게다가 유목제국인 돌궐마저 굴복시켰습니다. 한 나라가 지나치게 강해지면, 주변의 나라들은 생존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습니다. 고구려도 마찬가지로 수나라로 인해 큰 위기 의식을 느꼈습니다. 하지만 언젠가 수나라와 전쟁을 해야만 할 것이라면, 앉아서 기다릴 필요가 없겠지요. 고구려 영양왕은 598년 자신이 직접 말갈 군사 1만을 거느리고 수나라의 동쪽 전진 기지인 영주를 공격했습니다. 수나라는 즉시 30만 대군을 동원해서 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군은 수나라 군대가 요하에 이르지 못하게 만드는 등 적을 물리쳤습니다.

마침내 598년 고구려와 수나라의 1차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끝났고, 수나라의 문제는 더 이상 고구려와 전쟁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버지 수문제와 형을 죽이고 왕위에 오른 수양제는 온 세상이 자신의 발 밑에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야심가였습니다. 그는 대운하를 건설했으며 만리장성을 보수하는 등 백성들을 괴롭혔습니다.

▲ 수양제의 대군을 청야 전술로 크게 무찔러

그런 그에게도 한 가지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있었습니다. 바로 고구려였습니다. 마침내 수양제는 612년 무려 113만 3800 명의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해 왔습니다. 아버지가 못 이긴 고구려를 이기겠다는 욕심, 고구려를 굴복시켜 천하의 지배자가 되겠다는 야망이 전쟁을 일으키게 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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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실총에 그려진 고구려 군대가 수나라 군을 공격하는 모습. 용맹스러움이 넘친다. 

하지만 고구려는 요하 전투ㆍ요동성 전투ㆍ평양성 전투 등에서 수나라 군대를 계속 격파했습니다. 수양제는 화가 나서, 정예병 30만 5000 명으로 하여금 곧장 고구려 수도인 장안성을 공격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 때 수나라 정예병을 대적한 사람이 바로 을지문덕입니다. 그는 적의 군량이 부족해 상당히 지쳤다는 것을 너무나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일부러 적과 싸우며 지는 척을 했습니다. 대신 수나라 군대가 가는 길에는 식량을 한 톨도 얻지 못하게 들판을 비워 두는 청야 전술을 폈습니다. 즉, 수나라 군대가 지나는 지방의 모든 시설과 양식을 불태우고 고구려인을 대피시켰던 것입니다.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의 꾐에 빠진 줄 모르고 계속 깊숙이 진격해 왔습니다. 하지만 군량 보급이 안 되고 또 현지에서 식량도 얻지 못하자 수나라 군대는 고구려 수도 인근에 이르러 지치고 말았습니다. 그제서야 꾐에 빠짐을 안 수나라 군대가 후퇴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때를 놓치지 않고 을지문덕 장군은 총 공격을 명령했습니다. 고구려군은 도망가는 적들을 살수(지금의 청천강)에서 거의 전멸시켰습니다. 30만 5000 명 가운데 살아 돌아간 병사가 겨우 2700 명뿐이었습니다. 세계 전쟁사에서 이 같은 대승은 쉽게 찾아 보기 어렵습니다.

▲ 살수대첩은 고구려인 모두의 정신력 승리

살수대첩의 결과 수나라는 크게 패했습니다. 이후 613년과 614년에도 30만 명의 군사를 보내 고구려를 공격했지만, 역시 이기지 못했습니다. 수나라는 결국 고구려 공격의 실패로 인해 멸망의 길로 들어섭니다. 이처럼 을지문덕 장군의 살수대첩은 우리 역사에서 길이 남을 큰 승리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살수대첩에서 쓴 청야 전술이 고구려 사람들이 서로 믿고 적을 돕지 않아야 승리할 수 있는 작전이었다는 것입니다. 만약 배신자가 생겨 수나라 군대가 식량을 구할 수 있었다면, 고구려는 결코 이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고구려가 수나라를 이긴 것은 을지문덕 장군만의 공이 아니라 적을 물리치겠다는 강한 정신력을 지닌 고구려인 전체의 승리였던 것입니다.


당나라와의 대전쟁
연개소문 "자유를 억압하는 세력은 용납하지 않는다"
30 년 간 줄기찬 공격 맞서 승리 또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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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 육ㆍ해군의 줄기찬 공격을 막아 내 고구려의 승리에 일조했던 둘레 7 km의 거대한 성인 건안성. 

고구려가 당나라와 치른 전쟁은 우리 역사상 가장 큰 전쟁입니다. 또 동아시아 역사를 바꾼 대전쟁입니다. 당나라는 당시 세계 최강의 나라였고, 고구려도 수나라를 물리친 자부심 강한 나라였습니다. 두 나라의 대결은 30 년 간 이어졌고, 특히 645년 1차 전쟁은 고구려의 승리로 오래 기억되어 왔습니다.

▲ 당 태종 이세민, 고구려 멸망 야심

618년 수나라가 멸망한 후 등장한 당나라는 처음엔 고구려와 평화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626년 형과 동생을 죽이고 아버지를 핍박해 임금의 자리에 오른 당 태종 이세민은 달랐습니다. 그는 수양제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못된 행동을 감추기 위해,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전세계를 자신의 발아래 두려는 야심을 키우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당나라는 642년경에 이르러 고구려를 제외한 주변의 거의 모든 나라를 굴복시킬 만큼 국력이 강해져 있었습니다.

당나라의 위협이 점점 커지는 상황에서 고구려 영류왕은 전쟁보다는 평화를 원했습니다. 이를 위해 그는 당나라의 무리한 요구도 들어 주었습니다. 하지만 연개소문은 이러한 영류왕의 정책에 반대했습니다. 마침내 642년 9월 연개소문은 영류왕과 몇몇 귀족들을 죽이고 권력을 쥐었습니다. 연개소문은 고구려의 자유를 억압하는 어떤 세력도 용납하지 않았습니다.

▲ 고구려군, 잇달아 당나라군 격파

두 나라는 마침내 전쟁을 하게 되었습니다. 644년 연개소문은 군사를 보내 당나라의 전진 기지를 공격하기도 하고, 요동 지역의 여러 성도 보다 튼튼히 수리했습니다. 645년 당나라는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로 공격해 왔습니다. 그런데 전쟁 초기 당나라 대군의 공격을 받자 개모성과 비사성ㆍ요동성ㆍ백암성 등 여러 성이 함락되고 말았습니다. 특히 요동성은 수나라 100만 대군도 함락시키지 못한 중요한 성이었기에 고구려의 충격은 더욱 컸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반격도 만만찮았습니다. 먼저 국내성ㆍ오골성 등 후방의 성에서 군사를 뽑아 당나라 군이 고구려 내부로 진격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특히 요동 지역에서 고구려 내부인 압록강 일대로 진격하기 위해 반드시 넘어야 할 천산산맥을 당나라 군이 끝내 넘지 못하게 막았습니다. 당나라가 노리던 주요 성인 신성과 건안성에서도 당군을 거듭 격파했습니다. 또 요동반도 남단의 비사성을 함락시킨 당나라 해군이 압록강 방면으로 공격해 오는 것도 고구려 해군이 막아 냈습니다. 군량 보급을 책임질 당나라 해군이 진격하지 못하자, 당나라 육군도 고구려 내부로 진격하지 못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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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지대인 요택. 이 곳에서 당나라 군대는 엄청난 패배를 맛보았다. 

▲ 당나라 군, 안시성 줄기차게 공격

당나라의 군대는 충분한 식량과 공격 기지를 차지하기 위해 안시성을 줄기차게 공격해 왔습니다. 연개소문은 고정의로 하여금 병사 15만을 보내 당나라 군과 맞서게 했습니다. 그런데 선봉장인 고연수와 고혜진이 첫 전투의 승리에 자만해, 적진 깊숙이 들어갔다가 도리어 패배하고 포로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의 군대는 곧 당나라 군대를 포위하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요동성 북쪽의 신성과 안시성 남쪽의 건안성, 그리고 뒤쪽의 요하 등 사방으로 당나라 군을 둘러싸기에 이릅니다. 고구려군은 당나라의 식량 보급을 차단하면서, 당나라 군대가 지치기 만을 기다렸습니다. 당나라는 이 상황을 극복코자 안시성 공격에 매달렸지만, 고구려 군인은 철저히 지켜 냈습니다. 그리고 당의 군대가 안시성 성벽을 넘기 위해 만든 흙 산이 무너지고, 이를 고구려군이 빼앗자 당나라 군대의 사기는 떨어졌습니다.

▲ 30 년 동안의 전쟁 승리로 이끌어

결국 고구려의 포위 작전에 말려 식량마저 부족해진 당나라는 9월 18일에 서둘러 철군을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군의 포위로 인해 편안한 길로 가지 못하고, 늪지대인 요택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 곳에서 당나라 군의 소와 말 70∼80 %가 죽고, 수만의 군사가 목숨을 잃었습니다. 당태종도 요택에서 병들었고, 겨우 목숨만 건져 도망갈 수 있었습니다.

결국 고구려는 당나라를 물리치는 승리의 기쁨을 누렸고, 당나라는 처참한 패배를 맛보아야 했습니다. 하지만 당태종은 고구려에 패한 것을 인정치 않고, 647년과 648년에도 공격해 왔지만 다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당나라는 고구려에 대한 야심을 버리지 못했습니다.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661년 100만 대군을 동원해 고구려를 공격해 왔습니다. 연개소문은 662년 2월 사수에서 적의 주력군을 전멸시켰고, 이로 인해 당나라는 다시 패배했습니다.

고구려가 당나라를 물리친 이 사건은 우리 역사의 큰 자랑거리입니다. 아쉬운 것은 우리 기록이 부족해 이 전쟁의 자세한 상황과 의미가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못한 점입니다. 지금부터라도 세계인에게 고구려의 바른 역사를 널리 알리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고구려 유목민족들과의 만남
각기 다른 삶의 방식 존중… 적국과의 전쟁 땐 서로 도와

우리가 생각하는 고구려인들은 대륙을 호령하며 활보하는 용감한 모습입니다. 이 같은 이미지는 말을 타고 초원을 달리며 양과 말을 키우며 떠돌아다니는 유목민과 많이 닮았습니다. 고구려 주변에는 흉노ㆍ선비ㆍ거란ㆍ유연ㆍ돌궐ㆍ실위를 비롯한 여러 유목민이 시대를 달리하며 살았습니다. 그리고 고구려와 깊은 영향을 주고받았습니다. 그럼, 고구려와 유목민의 관계는 어땠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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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암성. 고구려군과 돌궐군이 싸웠던 역사의 현장이다. 

▲ 선비족은 후한과의 전쟁 때 활용

고구려 2대 유리명왕은 서기 전 9년에 선비족을 공격해 이들을 굴복시킨 바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이후 서기 49년까지 농경 국가인 후한과 전쟁을 할 때 선비족을 활용했습니다. 고구려가 후한 땅 깊숙이 쳐들어가고, 포로를 많이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기동성이 뛰어난 선비족 군대를 잘 활용했기 때문입니다.

광개토대왕은 395년 유목민인 거란족 부락을 공격해 이들을 굴복시켰습니다. 이후 거란족에 대한 고구려의 통제력은 매우 강해졌습니다. 고구려는 거란족을 이용해서 북중국을 지배했던 북위의 변방을 수시로 공략하기도 했습니다. 또 600년 경에는 거란족을 이용해 수나라의 해안 기지를 공격하기도 했고, 거란족에 대한 통제력을 놓고 당나라와 650년대에 치열하게 전쟁을 했습니다. 거란족의 일부는 고구려가 멸망할 때까지 운명을 같이하기도 했습니다.

▲ 유연과는 북위 견제하며 힘 합쳐

사냥과 가축 키우기가 중요한 생업이었던 말갈족은 건국 직후부터 꾸준히 고구려인이 포섭해왔던 대상이었습니다. 영양대왕은 말갈군 1만 명을 이끌고 수나라 전진 기지인 영주를 공격한 적이 있었습니다. 말갈 장수 생해는 고구려를 위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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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석대자산성. 유목민들은 심양시에 있는 이 성처럼 튼튼한 성벽을 결코 넘을 수 없었다. 

실위족은 고구려가 부여를 통합하면서 만나게 된 북쪽에 사는 유목민 입니다. 이들은 자체에서 철이 생산되지 않아 고구려에게 철을 의지해야 했습니다. 고구려는 실위족뿐만 아니라 거란족에게도 철을 수출하면서 이들을 고구려를 돕는 세력으로 만들었습니다. 백제와 신라ㆍ가야 그리고 왜국과 같은 남쪽의 나라와 후한ㆍ위ㆍ북위ㆍ수ㆍ당과 같은 서쪽의 나라들은 고구려와 많은 관련을 가졌습니다. 이에 못지않게 북서쪽의 흉노ㆍ선비ㆍ유연ㆍ돌궐ㆍ설연타ㆍ철륵 등과도 시대를 달리하며 고구려와 깊은 관련을 가졌습니다.

특히 유연은 5∼6세기에 고구려의 우방으로 북중국의 북위를 견제하는데 서로 힘을 합쳤습니다. 고구려는 유연과의 평화관계를 기반으로 초원길을 말을 타고 달려 멀리 서역의 나라와 교류를 하기도 했습니다. 또 서로 협력하여 양국 사이에 좋은 말을 생산하는 지두우를 분할하여 서로 나누어 갖기도 했습니다. 돌궐은 고구려와 전쟁을 하기도 했지만, 수나라가 등장하자 서로 사신을 왕래하며 도움을 주고받을 것을 모색하기도 했습니다. 돌궐인이 남긴 비석에는 고구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어 두 나라간의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알려 주기도 한답니다.

645년 당나라와 전쟁을 하던 고구려는 설연타에 사신을 보내 당나라를 견제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습니다. 설연타는 곧 대군을 보내 당을 공격했고, 당나라는 이들을 막기 위해 서둘러 고구려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도 했습니다. 철륵의 경우도 비슷합니다. 661년 고구려와 당나라가 전쟁을 하는 도중, 철륵은 당나라와 전쟁을 시작합니다. 따라서 고구려를 공격하던 당나라 군대의 일부가 철륵을 막기 위해 급히 철수를 하게 됩니다.

▲ 유목민의 탁월한 기동력 이용

고구려는 이처럼 유목민들과 때로는 연합하고 때로는 일부 부족들을 세력권 안에 두고 활용해 적국과 싸우기도 했습니다. 특히 유목민 기병은 탁월한 기동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에 서쪽의 수ㆍ당과 싸울 때 큰 힘이 되었습니다. 고구려가 강했던 것은 단지 고구려 혼자의 힘만이 아니라, 이웃들의 힘도 적절히 활용할 줄 알았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인들은 유목민이 강대해져서 고구려를 위협할 것에 대비해 말 타고 활쏘기를 열심히 훈련하기도 했습니다. 우씨왕후의 사례에서 보이는 형사취수제라는 결혼 풍습, 하늘에 제사를 지내며 나라 사람들이 함께 모여 춤추고 노래하며 신을 맞이하는 제천 행사, 윗옷을 왼쪽으로 여미고 바지를 입는 복장 등은 모두 북쪽 유목민과 비슷한 풍습들입니다. 또 동복ㆍ각배 등 유목민이 사용하던 식기류가 고구려에서도 발견됩니다.

고구려와 유목민의 관계에서 한 가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고구려가 거란 등을 억압하기보다는 그들의 삶의 방식을 존중해 주고 공존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이 고구려의 편에 서서 끝까지 고구려를 도운 것입니다. 만약 고구려가 이들을 억압하기만 했었다면, 이들은 고구려에게 등을 돌리고 적이 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왜 고구려는 멸망했나요?
안으론 분열, 주변국 공격 대비는 소홀

동아시아를 호령했던 고구려가 왜 멸망했을까요? 만약 고구려가 지금까지 존재했다면 우리 역사는 크게 달라졌겠지요. 하지만 고구려는 멸망했습니다. 오늘은 고구려가 왜 멸망했는지, 우리는 여기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지 생각해 볼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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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양 시. 과거 유성이라 불렸던 이 곳에 고구려 사람들이 많이 끌려가 살았다. 이들 중 걸걸중상과 대조영 부자가 나타나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를 세웠다. 


▲ 연개소문 가문의 세습ㆍ독재로 나라 어려워져

고구려 멸망의 첫 번째 원인은 세습 독재 체제 때문입니다. 연개소문은 645년과 661년∼662년에 있었던 당나라 대군의 침략을 거듭 물리치고 고구려를 지킨 위대한 영웅입니다. 그는 병법 등 군사 문제에 있어서 능력이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는 이유로 영류왕과 많은 대신들을 죽였습니다. 또 자신을 지지하는 인물 위주로 정치를 이끌었기 때문에, 다양한 의견들이 무시되었습니다. 따라서 여러 사람의 지혜를 모으는 데 한계가 있었습니다.

그가 죽자 남생ㆍ남건ㆍ남산 세 아들이 권력을 나뉘어 가졌습니다. 그러자 권력에서 소외된 사람들은 외국으로 탈출하는 일까지 벌어졌습니다. 독재 권력이 20 년 이상 지속되면서 권력자들은 점점 부패에 물들었습니다. 능력이 부족한 남생이 단지 연개소문의 큰아들이란 이유로 지도자가 되자, 정치는 크게 어지러워졌습니다. 독재 권력이 결국은 고구려를 쇠약하게 한 중요 원인이 된 것입니다.

▲ 형제간의 다툼과 배반으로 몰락의 길

두 번째 원인은 내분과 배반입니다. 당나라와 신라가 연합해서 고구려를 공격하려는 시점에서도 고구려 내부에서는 권력 다툼이 일어났습니다. 아버지에 뒤이어 대막리지(고구려 말 행정과 군사권을 가진 최고의 관직)에 오른 남생은 얼마 후, 지역 순방에 나섰습니다. 이 때 동생인 남건ㆍ남산에게 형을 믿지 말라고 꼬드기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남생 역시 두 동생을 믿지 못했고, 결국은 두 세력 간에 내란이 생겼습니다. 이 전쟁은 고구려의 중요 지역에서 크게 벌어졌습니다. 이로 인한 국력의 손실도 매우 컸습니다.

게다가 고구려 최고 지도자였던 남생이 동생과의 싸움에서 패하자, 적국인 당나라에 자신을 도와 달라고 부하를 보내기도 했습니다. 당나라가 자신을 돕겠다고 하자, 남생은 666년 6월에 나라를 배반하고 당나라에 투항했습니다. 당나라와 신라는 남생이 가져온 최고의 정보를 이용하고, 내란으로 힘이 약해진 고구려의 허점을 최대한 이용했습니다. 100만 대군이 협공을 해 오자, 마침내 668년 9월 26일 고구려는 멸망하고 말았습니다. 힘을 합쳐 적을 물리치던 과거의 고구려라면 쉽게 멸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연개소문은 자식들에게 “너희 형제는 고기와 물과 같이 화합하여 작위를 다투는 일을 하지 말아라. 만일 그런 일이 있으면 반드시 이웃들의 웃음거리가 될 것이다.”고 유언을 남긴 바 있었습니다. 하지만 못난 자식들이 서로 싸운 탓에 나라까지도 멸망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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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어져 가는 백암성. 나라가 망하면 그들이 남긴 유적도 허물어져 간다. 

▲ 주변 정세 변화에 대한 늦은 대응

고구려 멸망의 세 번째 이유는 무엇보다 변화에 대한 대응이 늦었다는 점입니다. 고구려는 주변의 변화를 정확히 이해하고, 제대로 대응하면서 나라를 발전시켜 왔었습니다. 하지만 5∼6세기와 달리 동아시아에는 강력한 신흥제국 당나라가 들어섰습니다. 당나라는 아주 치밀하게 고구려를 상대했습니다.

당나라는 혼자 힘만으로 고구려를 이기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신라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였습니다. 또 고구려의 요동 방어망이 워낙 튼튼해 공략하지 못하자, 바다를 통해 고구려를 공격했습니다. 이 때 고구려의 중요 농경지를 크게 파괴했습니다. 또 거란족ㆍ말갈족 등 고구려의 영향을 받는 족속들을 끝없이 꾀어 내어 고구려를 약화시켰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다양한 대비책을 세우지 못한 채, 성벽을 더욱 높이 쌓으며 당나라에 대한 무력 대응에 치중했습니다.

그럼에도 요동의 굳센 성 방어만을 믿고서 당나라 해군의 공격이나, 신라가 공격해 올 것에 대한 대비에는 다소 소홀했습니다. 또 백제ㆍ왜국ㆍ유목의 제국들과는 고구려를 돕는 구체적인 협조 체제도 갖추지 못했습니다. 그 밖에 오랜 전쟁으로 농사지을 땅이 못 쓰게 돼 백성들이 가난해진 것도 고구려 멸망의 한 원인이 되었습니다. 만약 남생 형제의 내분이나 반란, 독재 정권의 나쁜 점들이 없었고 주변 세상의 변화에 보다 철저하게 대비했다면 고구려의 운명도 달라졌을지 모릅니다.

누구나 그렇듯이 실수는 있고, 잘못을 저지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잘못을 통해 다시는 그런 잘못을 저지르지 않겠다는 교훈을 얻는 것이겠지요. 지금 남보다 앞서 가더라도 나쁜 습관에 빠지고, 자만하며 게을러진다면, 그의 미래는 도리어 남보다 뒤쳐질 것입니다. 고구려도 당나라를 이겼다고 자만하다가 멸망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소중한 경험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고구려는 살아 있습니다
부흥 의지 계속 이어져 발해·고려로 부활
"우리가 역사를 옳게 계승하고자 할 때 고구려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이제 고구려 역사 기행을 마칠 시간이 되었군요. 지금까지 고구려사의 중요한 흐름과 고구려의 여러 특징 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그런데 지난 주 고구려의 멸망 이야기를 쓰고 나니 못내 아쉬움이 남습니다. 고구려가 당과 신라 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후, 고구려는 완전히 사라지고 잊혀진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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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발굴된 아차산 홍련봉 1보루. 


▲ 668년 멸망 후 고구려 부흥을 위한 전쟁 시작

고구려 사람들 가운데 일부는 당나라에 끌려가고, 일부는 신라인이 되었습니다. 또 전쟁을 피해 일부는 돌궐과 일본 등지로 이주를 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옛 땅에는 그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남았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다시 고구려를 세울 준비를 했습니다. 668년 고구려가 공식적으로 멸망은 했지만, 신성ㆍ요동성ㆍ안시성ㆍ북부여성 등 고구려 대부분의 성들은 여전히 당과 신라 연합군이 점령하지 못했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이 성들을 중심으로 고구려 부흥을 위한 전쟁을 시작했습니다.

669년 당나라 장군 이적이 당 고종에게 “압록강 이북에서 아직 항복하지 않은 성은 11 개 성이며, 도망간 성도 7 개나 됩니다. 당군이 공격하여 빼앗은 성은 3 개에 불과하며, 항복해 온 성은 11 개 성입니다.”라고 보고했을 정도로 고구려의 땅에는 당군의 힘이 제대로 미치지 못했습니다. 당나라는 고구려를 제대로 지배할 힘이 없었고, 그저 자신들을 위협하는 강한 세력을 제거하는 것에 만족했습니다. 당나라는 고구려 전역을 통치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지만, 고구려인의 완강한 투쟁을 이길 수가 없었습니다. 당나라 군대는 고구려의 동부 지역에는 전혀 나아가지 못했고, 겨우 요동에서 평야에 이르는 정도만을 점령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 당을 몰아내기 위해 신라와도 손잡아

홍련봉 1보루에서 출토된 연화문 와당. 이 유물에서 보듯 남한 지역에도 고구려의 숨결이 많이 남아 있다. 이제 고구려를 말로만 사랑할 것이 아니라, 이러한 고구려의 유적과 유물들부터 먼저 아끼고 잘 보존 관리해야 한다.  남의 지배를 받기 싫어한 고구려인들은 당의 군대를 몰아내기 위해 때로는 신라와도 손을 잡았습니다. 670년 3월 고연무가 이끄는 1만 명의 고구려 부흥군은 신라 설오유가 이끄는 1만 군대와 연합해 압록강 건너 옥골에서 당나라군을 크게 격파하기도 했습니다. 또 검모잠은 보장왕의 서자인 안승을 모셔다가 고구려 부흥군의 왕으로 삼고, 황해도 지역을 중심으로 큰 세력을 이루기도 했습니다.

그러자 당나라는 대군을 파견하여 고구려 부흥군을 공격했습니다. 게다가 안승이 검모잠을 죽이는 사건 등이 생기고, 안승이 신라에 의지하는 등 고구려 부흥군은 점차 약해졌습니다. 672년 백수성 전투, 674년 호로하 전투 등에서 당군과 맞붙었던 고구려 부흥군은 끝내 이기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인의 강력한 투쟁 탓에 당나라는 겨우 요동성에 안동도호부를 두고 요동 지역만을 장악했습니다.

당은 요동을 다스리기 위해 고구려 마지막 왕인 보장을 요동주도독 겸 조선왕으로 삼아 이 곳에 파견했습니다. 그렇지만 보장왕은 당나라의 꼭두각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는 고구려 사람들의 힘을 모으며 4 년 간 치밀하게 고구려를 세울 준비를 했습니다. 그는 고구려의 자존심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보장왕의 계획은 681년에 당나라에게 발각되어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 발해ㆍ고려 등 고구려의 계승 노력 이어져

고구려의 부흥 의지는 그러나 여기서 끝난 것이 아니라, 다시 시작되었습니다. 마침내 698년 당나라에 끌려갔던 유민들이 탈출하여 다시 고구려 옛 터로 돌아왔고, 이들의 지도자였던 대조영이 마침내 고구려를 계승하는 발해를 건국할 수 있었습니다. 발해의 왕들은 스스로 고구려왕이라고 하였으며, 고구려의 옛 터를 대부분 회복할 수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망했지만, 이처럼 끝없는 생명력으로 부활했습니다.

고구려를 계승했던 발해로 부활했고, 고구려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한 고려로 부활했습니다. 고려의 서희는 고려가 고구려의 후계자임을 내세워 고려를 공격해 온 거란 군대를 되돌아가게 만들었습니다. 조선은 고구려를 선조의 역사로 높이 받들어 해마다 고구려 시조왕과 영양왕과 을지문덕 등에게 제사를 지냈습니다. 명나라도 조선이 고구려의 후계자인 만큼, 늘 경계하기도 했습니다. 고구려는 이후에도 우리 겨레의 정신 속에 뿌리 깊게 살아 있습니다. 우리가 고구려의 후손임을 잊지 않고, 그 역사를 옳게 계승하고자 할 때 고구려는 영원히 죽지 않을 것입니다.

최근 중국인들이 억지로 고구려사를 자기 나라의 역사라고 주장한다고 해도, 중국의 역대 사서에는 고구려를 자국의 역사라고 본 기억이 없습니다. 단지 영토에 대한 욕심 때문에 억지로 고구려를 자기 역사라고 주장할 따름입니다. 우리가 고구려를 영원히 살아 있는 역사로 만들려면, 그 어떤 나라 사람들보다도 고구려를 더 사랑하며, 제대로 알고, 이를 계승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한다면 고구려는 언제까지나 우리 곁에서 살아 숨쉴 것입니다.

김용만(우리역사문화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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