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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문화 유산, 고구려 고분 벽화

세계 문화 유산, 고구려 고분 벽화
삶의 모습·생각·종교 고스란히… 예술로서도 걸작

지난 7월, 31 개의 고구려 벽화 무덤이 장군총ㆍ광개토대왕릉비 등과 함께 유네스코에서 선정한 세계 문화 유산 목록에 등록되었습니다. 고구려 고분 벽화가 얼마나 대단하기에 세계 문화 유산으로 선정된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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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강서대묘(6세기 말~7세기 초)의 현무도(위)ㆍ청룡도(아래). 

▲ 초기에는 사냥 등 일상 생활 주로 담아

고구려 고분 벽화는 차분하면서도 신비로움을 주는 놀라운 색채감과 구성으로 세계 어느 벽화에도 뒤지지 않는 걸작품입니다. 그리스ㆍ로마ㆍ이집트 등 세계적인 고대 문명국마다 멋진 벽화를 남기곤 했는데, 고구려 또한 돈황 석굴의 벽화와 더불어 동아시아를 대표하는 벽화를 창조했습니다. 현재까지 알려진 벽화가 그려진 고구려 무덤은 106 기로, 평양 등 북한 지역에 76 기ㆍ집안과 환인 등지에 30 기가 있습니다. 벽화가 그려진 무덤은 돌로 된 방 형태의 내부 구조를 갖고 있습니다. 돌로 된 방의 네 벽과 천정 그리고 입구의 좌우 벽에 벽화가 그려져 있습니다.

3세기 말부터 그려지기 시작한 고분 벽화에는 초기엔 무덤 주인공의 집ㆍ사람이 즐겨했던 사냥 등의 놀이ㆍ주인공 부부의 모습ㆍ야외 행차ㆍ연회 장면 등이 담겨져 당시 고구려인의 일상 생활 풍습을 사실적으로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벽화는 무덤의 네 벽에 주로 현실 세계를 그렸지만, 천정에는 하늘 세계 등 당시 고구려인의 생각을 알 수 있는 그림들이 그려져 있습니다.

덕흥리 고분 벽화에는 무덤 주인공 부부의 주거 생활, 주인공의 공식 업무 생활, 천정에 각종 괴이한 괴수들, 해와 달을 비롯한 별들, 견우와 직녀 이야기 등이 그려져 있습니다. 안악 3호분의 경우 마굿간과 외양간은 물론 부엌과 우물ㆍ방앗간ㆍ수레창고와 고기창고 등도 그려져 있습니다. 또 춤추는 사람들과 사냥하는 그림이 멋진 무용총, 씨름하는 사람들이 그려진 각저총, 가족이 바깥 나들이를 하면서 놀이를 구경하는 수산리 고분, 야외 놀이 장면과 주인공의 불교 신앙을 전해주는 장천 1호분 등이 이와 같은 인물 풍속도를 대표하는 벽화 무덤입니다.

▲ 후기부터 영혼의 안식 바라는 그림 주로 그려

같은 시기 당나라 금등촌 7호묘의 현무도ㆍ청룡도. 고구려의 예술 수준이 얼마나 높은지를 미뤄 짐작할 수 있다.  5세기 중엽 이후에는 점차 생활 풍속 장면과 함께 무덤 안을 장식해 주는 아름다운 장식 무늬가 많이 그려졌습니다. 연꽃 무늬ㆍ동심원 무늬ㆍ왕자 무늬ㆍ화초 무늬ㆍ구름 무늬 등이 무덤 내부를 화려하게 장식합니다. 연꽃 무늬만을 그린 산연화총, 태양을 상징하는 원형 무늬가 그려진 환문총, 왕자 무늬와 연꽃 무늬가 그려진 동명왕릉 등이 이 시기에 만들어집니다.

특히 고구려 후기가 되면서 무덤 내부에는 점점 더 종교적이고, 영혼의 안식의 도움이 되는 그림들이 그려집니다. 특히 사신(四神)이라 불리는 4방위의 수호신이 점차 벽화의 핵심 주제가 되어 갑니다. 동쪽의 청룡ㆍ남쪽의 주작ㆍ서쪽의 백호ㆍ북쪽의 현무가 그것입니다. 이 사신들은 모두 상상 속에 존재하는 동물입니다. 청룡과 백호는 서로 그 모습을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로 비슷하기도 하며, 하늘을 나는 주작은 때로는 수탉으로 표현되기도 하고, 현무는 거북과 뱀이 서로 얽힌 조화로운 형상을 갖고 있습니다.

▲ 고구려인의 삶과 생각 고스란히 담겨 있어

고구려인들에게 사신은 저승 세계로 가는 길을 호위해 주는 신으로 받아들여졌습니다. 또 무덤을 영혼이 머물며 저승에 가기 위해 준비하는 장소로 생각했던 사람들인 만큼, 나쁜 기운이 들어오지 못하게 사신도를 무덤 방의 벽 전면에 크게 그리기도 합니다. 특히 강서대묘의 현무도와 청룡도 · 강서증묘의 백호도와 주작도는 너무나도 뛰어난 걸작입니다.

또한 오회분 4호묘와 5호묘의 아름다운 색채를 간직한 사신도 아름답습니다. 사신도를 주요 주제로 그린 것은 고구려만의 특징으로, 주변국의 사신도와 비교해 보면 얼마나 고구려의 예술 수준이 높은 것인지를 잘 알 수 있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이 입었던 의복, 그들이 사용했던 무기, 춤과 놀이, 천문학을 비롯한 고구려의 과학, 죽음 뒤의 세계에 대한 생각을 비롯한 당시의 종교 사상 등도 고분 벽화를 통해 엿볼 수 있습니다. 고분 벽화는 고구려 사람들이 현대인에게 자신들의 삶과 생각을 알려 주는 타임 캡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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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왜 한강 유역을 빼앗겼을까?
돌궐 침략 막기 위해 군대 북쪽 배치, 약해진 틈타 백제·신라에 공격 당해

고구려는 장수왕 시기 동아시아 최강국의 위상을 자랑했습니다. 이즈음 고구려는 백제를 공격해 개로왕을 죽였고, 신라를 신하의 나라로 여겼습니다. 그렇게 막강하던 고구려였지만, 551년 백제와 신라의 공격을 받고 한강 유역을 빼앗겼습니다. 왜 고구려는 이 곳을 지키기 못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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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를 위협했던 돌궐족 귀족의 석인상. 석인이란 무덤 앞에 세운 돌로 만든 사람이다. 

▲ 나라 안의 권력 다툼으로 국력 점차 약해져

고구려는 장수왕과 문자명왕 시기에 전성기를 누렸지만, 내부적으로는 문제점이 하나 둘씩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귀족들이 권력을 잡고, 왕의 힘은 상대적으로 약해지기 시작한 것입니다. 급기야 안원왕이 병들어 눕게 됐고, 귀족들은 왕의 둘째 왕후와 셋째 왕후의 가문을 중심으로 나뉘어져 싸우게 되었습니다. 다음의 왕을 자신들의 가문에서 내놓은 왕비가 낳은 자식으로 삼기 위함이었습니다. 양측은 그래서 안학궁성 앞에서 무력으로 충돌했습니다.

이 때 둘째 부인 측에서 승리했고, 상대방은 약 2000 명이나 죽었습니다. 전쟁과도 같은 엄청난 내란이 끝난 후, 545년 양원왕이 왕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551년까지도 고구려의 정치는 안정을 찾지 못했습니다. 귀족회의 의장인 대대로의 자리를 놓고 귀족들이 치열하게 싸워 힘으로 그 자리를 차지했고, 왕은 이를 제지하지도 못하는 상황이었습니다.

▲ 돌궐과 맞서느라 백제ㆍ신라의 통제력 약화

이즈음 고구려에게 커다란 위협이 닥쳤습니다. 북쪽 초원지대를 지배했던 유연제국이 새롭게 등장한 돌궐족에게 망하고 만 것입니다. 유연은 고구려와 사이좋게 지냈는데, 돌궐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551년 돌궐은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의 신성을 향해 공격해 왔습니다. 성은 포위됐지만 고구려군이 강하게 방어하자 돌궐의 군대는 백암성으로 공격 목표를 바꾸었습니다. 고구려에서는 고흘 장군에게 1만 군대를 딸려 보내 돌궐군을 공격하게 했고, 이 때 적군 1000 명을 죽이거나 포로로 잡았습니다.

돌궐의 침략은 그러나 고구려로 하여금 많은 군대를 북쪽에 배치하게 했습니다. 고구려와 돌궐은 두 나라 사이에 있는 거란족ㆍ말갈족의 통제권을 놓고도 여러 차례 전쟁을 했습니다. 이 때 고구려는 동쪽 진출을 막고 북쪽으로 더욱 진출했습니다. 북쪽 국경의 안정과 거란ㆍ말갈ㆍ실위족 등에 대한 통제력의 유지는 고구려가 대국의 위상을 유지하는 데 가장 중요한 문제였던 것입니다.

▲ 한강 유역은 빼앗기고 돌궐에겐 승리

고구려의 어려운 상황을 주변에 있던 백제와 신라가 모를 이유가 없었습니다. 마침 두 나라에는 성왕과 진흥왕이란 뛰어난 왕이 있었습니다. 백제와 신라는 힘을 합쳐 함께 고구려를 공격해 왔습니다. 이후 백제는 한강 하류의 6 개 성을 차지하고, 신라는 한강 상류의 10 개 성을 차지합니다. 고구려는 순식간에 지금의 경기도와 강원도 일대의 넓은 땅을 빼앗겼습니다. 설상가상으로 고구려는 돌궐뿐만 아니라 서쪽에 있는 북제와도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남쪽에만 힘을 쏟을 수만 없었습니다.

이즈음 신라가 고구려에게 평화 제의를 해 왔습니다. 고구려는 신라와 평화 조약을 맺는 대가로 신라의 한강 유역 점령을 인정했습니다. 그러자 신라는 553년 백제를 공격하여 한강 하류를 빼앗았습니다. 백제는 신라를 공격하다, 성왕이 신라군에게 죽임을 당합니다. 결국 가장 약했던 신라가 삼국간 경쟁에서 가장 중요한 한강 유역을 모두 차지하게 됩니다. 이 때의 전쟁으로 세 나라는 이전과 달리 보다 치열하게 싸우게 되었고, 이것이 결국에는 신라의 삼국통일이란 결과로 이어지게 됩니다.

고구려는 비록 남부 영토를 빼앗겼지만, 백제와 신라가 서로 싸우도록 해 남쪽 국경에서의 전쟁을 멈추게 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북쪽에 힘을 쏟아 돌궐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어 동북아의 강자의 위치를 지켜 냈습니다. 이처럼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에게 한강 유역을 빼앗긴 것은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고구려는 너무 많은 문제를 한꺼번에 모두 해결할 수는 없었지만, 가장 중요한 사건부터 처리하면서 위기를 극복해 나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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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의 새로운 수도 장안성
고구려의 마지막 수도였던 장안성의 칠성문. 성벽이 웅장하다. 

고구려는 신라가 수도인 평양과 가까운 한강 유역과 함흥 평야를 차지함에 따라, 수도를 더욱 튼튼히 방어해야 할 필요성이 생겼습니다. 이에 따라 고구려는 35 년 간에 걸친 대규모 공사를 거쳐 튼튼한 장안성을 만들고 586년에 수도를 옮깁니다. 이 장안성은 기존의 안학궁성과 가까운 현재의 평양시 중심지에 위치합니다. 당나라 대군의 공격도 막았던 고구려 최대의 성(城)입니다.
 

평강 공주와 온달 이야기로 본 고구려
능력 위주로 인재 등용, 노력하면 '인생 역전' 가능

울보 공주 평강과 바보 온달 이야기를 들어 보았나요? 바보 온달이 평강 공주와 만나서 결혼하고, 뛰어난 무사가 돼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이야기 말입니다. 이 이야기 속에 담겨진 고구려는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알아 보도록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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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달이 신라군에 맞서 싸우다가 죽은 충북 단양의 온달 산성. 

▲ "너무 울어서 바보 온달에게 시집 보내야겠다"

온달은 가난한 백성이었습니다. 그는 밥을 빌어다가 장님인 늙은 어머니를 봉양하며 살았습니다. 떨어진 옷과 신을 신고 평양 시내를 다니면서도 늘 명랑했기에 사람들은 그를 ‘바보 온달’이라고 불렀습니다. 한편 고구려 25대 평원왕에게는 울보 공주가 있었습니다. 왕은 공주에게 ‘너는 너무 잘 울어서 나를 시끄럽게 하니, 귀족의 아내는 될 수 없고 바보 온달에게나 시집 보내야겠다.’고 자주 놀렸습니다.

공주가 16 세가 되자, 왕은 귀족인 상부 고씨에게 시집 보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공주는 ‘아버님이 항상 저를 온달의 아내가 된다고 했는데, 이 무슨 말입니까. 저는 그렇게 결혼할 수 없습니다.’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아버지의 미움을 산 공주는 보물 팔찌 수십 개를 팔꿈치에 매고 궁궐을 나와 혼자서 온달을 찾아갔습니다. 공주는 왕인 아버지의 말을 이치에 맞지 않는다고 당당하게 거부하고, 자신의 의지대로 새 인생을 찾은 것입니다.

장님인 온달의 늙은 어머니는 공주를 가까이서 만나 보고는 ‘그대의 냄새를 맡으니 향기가 보통이 아니고, 손을 만지니 부드럽기가 솜과 같으니 천하의 귀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했다고 합니다. 이렇게 볼 때 당시 고구려 여인들도 향수를 비롯한 화장품을 사용했었습니다.

▲공주는 가져온 귀중품 팔아 온달의 집 일으켜

평강 공주는 금팔찌를 팔아 논과 밭ㆍ집ㆍ소ㆍ말ㆍ가구ㆍ노비까지 샀습니다. 이 때 공주는 온달에게 나라에서 쓰는 말을 사고, 시장에서 파는 말을 사지 말라고 할 정도로 생활에 필요한 경제 정보까지 모두 알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즉, 공주였지만 그저 아무것도 모른 채 곱게만 자란 것은 아니었던 것입니다. 당시 고구려 시장에는 없는 물건이 없을 정도로 번창했었습니다. 국가에서도 시장에 물건을 내다 팔았고, 노비도 거래될 정도였지요.그리고 상거래에는 금과 은ㆍ베 등이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한편, 온달은 느릅나무 껍질을 벗겨 식량을 삼을 정도로 가난했습니다.그래서 한때 시장을 돌아다니며 구걸도 했지요. 이처럼 고구려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사람간의 경제적ㆍ신분적인 차별이 매우 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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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 학계에서 온달과 평강 공주의 무덤으로 추정하고 있는 진파리 4호분. 

▲온달은 공주의 도움으로 무사로 성장

온달은 공주와 결혼한 이후, 사람이 변하여 뛰어난 무사로 성장했습니다. 매년 3월 3일 낙랑 언덕에서 열리는 사냥 대회에 나가 온달은 왕이 보는 앞에서 당당히 1등을 차지했습니다. 온달은 이를 계기로 장군이 돼 후주와의 전쟁에서 선봉장으로 출전합니다. 그리고 큰 공을 세워 평원왕에게 정식 사위로 인정 받고 또 높은 벼슬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아무리 공주와 결혼했다고 하더라도, 온달 자신이 큰 공을 세우지 못했다면 왕의 사위로서 인정 받기는 무척 어려웠을 것입니다. 즉 고구려 자체가 능력 위주로 인재를 등용하는 나라였고, 따라서 신분이 낮았던 온달도 벼슬길에 나갈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었던 것입니다. 590년 영양왕이 왕위에 오르자, 온달은 왕에게 자신에게 군대를 준다면, 신라에게 빼앗겼던 한강 북쪽의 땅을 되찾아오겠다고 건의를 했습니다.

▲노력으로 신분 뛰어넘은 고구려인의 상징

온달은 전쟁에 나가기 전 공주에게 다짐했습니다. “조령과 죽령까지의 땅을 모두 귀속시키지 못하면 결코 돌아오지 않겠소.” 온달은 그러나 아단성에서 신라군과 맞서다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장례를 치르고자 했는데, 시신을 넣어둔 관이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이에 공주가 관을 어루만지면서 “이제 죽고 사는 것이 결정되었으니 돌아갑시다.”라고 하자 관이 움직였다고 합니다. 이는 고구려 사람들이 얼마나 옛 땅을 되찾고자 하는 열망이 강한가를 말해줍니다. 또한 공주의 말에서 고구려인의 삶에 대한 태도도 엿볼 수 있습니다.

온달은 비록 비천한 신분에서 태어났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나라에 공을 세우고, 임금님께도 인정 받는 왕의 사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뜻을 다 이루지 못하고 죽은 비극의 주인공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온달을 고구려 백성들의 영웅으로 오래오래 기억해 왔습니다. 다시 말해 고구려 사람들은 온달이 공주를 만나서 자신의 운명을 바꾼 행운아로 보기 보다는, 자신의 부단한 노력으로 신분마저 뛰어넘은 고구려인의 상징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지금도 온달이 죽었던 온달산성이 있는 충북 단양군에서는 해마다 온달 축제를 개최해 그의 뜻을 기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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