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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고구려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살았을까?
솥에 밥 짓고 시루에 떡 쪄 함께 먹어, 불고기 비슷한 '맥적' 외국에도 유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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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악3호분 벽화. 고구려인이 부엌에서 음식 만드는 모습을 살펴볼 수 있다.

▲ 철제 솥 보급되면서 밥 지어 먹어

고구려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생활했을까요? 요즘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햄버거와 피자는 구경조차 못했을 것이고, 고추와 감자ㆍ옥수수ㆍ커피 등도 없었는데 대체 무엇을 먹었을까요. 지금은 우리 먹을 거리에서 사라지거나 소외된 것이겠지만, 당시 이들이 즐겨 먹었던 것을 알아봅시다. 고구려인의 주식은 지금처럼 밥이었겠지요. 그런데 초기에는 쌀보다 기장이나 수수ㆍ조 등의 잡곡을 많이 먹었습니다. 신석기와 청동기 시대의 우리 조상들은 곡식을 물에 불리거나 가열해서 죽을 만들어 먹었지만, 시루가 개발되면서 점차 떡을 만들어 먹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철제 솥이 널리 보급되면서부터는 밥을 지어 먹었습니다. 대무신왕은 부여를 공격할 때, 저절로 밥이 되는 신기한 솥을 얻어 전쟁 중에도 포식했다고 합니다. 당시 솥의 주인인 부정이 전쟁 중에 솥을 짊어지고 따라다녔다고 합니다. 솥은 당시 서민들의 가장 중요한 재산이었고, 군대에서도 필수였습니다. 하지만 357년께 만들어진 안악3호분 벽화에는 시루에 음식을 만들어 먹는 모습이 보입니다. 즉, 솥이 등장했다고 해서 시루가 사라진 것이 아니고 떡과 밥을 함께 먹었던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임진강 무등리에서 발견된 5~6세기 고구려 군량 창고에서는 쌀과 조가 함께 발견된 바 있었습니다. 쌀과 조가 섞인 밥이 당시 군인들의 주식이었다고 할 수 있겠지요. 고구려 지역은 또 콩의 원산지입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콩을 발효시켜 된장 등을 만들어 먹기도 했답니다. 고구려는 소ㆍ돼지ㆍ양ㆍ닭ㆍ말ㆍ개 등 다양한 가축을 길렀던 만큼, 이 역시 주요 식량 자원이 되었습니다.

▲ 겨울 길어 장기 보존 식품 필요

멧돼지ㆍ사슴ㆍ토끼ㆍ꿩 등 지금 우리들이 거의 먹지 않는 고기들이 당시에는 중요한 양식이 되었습니다. 안악3호분 벽화에는 고기를 꼬챙이에 걸어 둔‘육고’라 불리는 별도의 건물이 부엌 옆에 그려져 있습니다. 고구려에는 또 ‘맥적’이라 불리는 고기 요리가 외국에 널리 알려졌는데, 고기를 된장 등으로 양념해 불에 구워 먹는 것이지요. 이것이 발전해 지금의 불고기라는 음식이 된 것으로 짐작됩니다.

고구려 남자들은 평소 허리 왼쪽에는 갈돌을 달고, 오른쪽에는 오자도를 차고 있었습니다. 사냥을 나가거나 먹을 고기를 썰기 위해 오자도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그만큼 고기는 고구려인의 중요한 식량이었습니다. 압록강과 요하를 비롯한 큰 강과 바다에서 나는 물고기 등도 고구려인의 중요 먹을 거리였습니다. 고구려 초기에는 동해안에 자리한 동옥저에서 바다 고기와 해초류ㆍ소금 등을 공급 받아 먹기도 했답니다.

채소류도 중요한 양식입니다. 부루ㆍ아욱ㆍ쑥ㆍ무ㆍ배추 등이 재배됐는데, 아욱과 배추ㆍ무 등을 이용해 김치를 만들어서 먹었습니다. 물론 고추가 없었기 때문에, 소금에 절여서 발효시키고 마늘ㆍ파ㆍ생강 정도만 곁들어진 백김치와 같은 것을 먹었을 것입니다. 겨울이 춥고 긴 고구려의 환경에서는 김치나 된장ㆍ말린 고기 등의 장기 보존 식품이 필요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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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용총 벽화에 보이는 음식 나르는 모습.
 

이렇게 볼 때 고구려인의 식탁에는 밥과 장국ㆍ고기요리ㆍ김치ㆍ나물ㆍ젓갈 등이 올라왔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하지만 벽화에는 소반 위에 4∼5 개의 그릇만이 보일 뿐이어서 한 끼에 무엇을 먹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술도 잘 빚었습니다. 산상왕의 둘째 부인은 술을 전문적으로 빚어 내다파는 사람들의 마을인 주통(酒桶-香?촌 출신입니다. 이런 마을이 있다는 것은 고구려에서도 술이 널리 사고 팔린 식품이었음을 잘 보여 줍니다. 동맹 축제를 비롯해 평소에서 밤늦게까지 노래하고 춤추며 술을 마신 사람들인 만큼 술 역시 중요한 음식이었던 것입니다.

▲ 참막 중요 간식거리

과일로는 복숭아ㆍ배ㆍ밤ㆍ오얏 등을 즐겨 먹었는데, 이것이 중요한 간식거리였습니다. 감자와 고구마는 없었지만, 백제 서동이 신라 선화공주를 부인으로 삼기 위해 아이들에게 노래를 부르라며 주었던 ‘참마’는 당시 고구려인에게는 중요한 간식이었을 것입니다.

고구려 귀족의 집에는 부엌이 안채 건물과 별도로 있었습니다. 안악3호분 벽화에는 부엌 아궁이에서 불을 지펴 음식을 만들고, 그릇을 닦고, 소반에 음식을 차려 안채 사람들에게 음식을 전해 주는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음식을 담는 그릇은 토기ㆍ자기ㆍ목기 등으로 만들었는데, 특히 조두라는 좋은 식기류와 맥반 이라고 불리는 작은 소반을 사용하기도 했답니다.


고구려인의 주거 문화
'쪽구들'로 부분 난방… 실내서도 신발 신으며 입식 생활


조선 시대가 배경인 사극들을 보면, 온돌방에 앉아서 대화를 나누는 사람의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습니다. 이 시대에는 또 앉아서 생활 하기에 편하도록 집안의 가구도 모두 높이가 낮았습니다. 그런데, 뜀박질 잘 하고 말 타며 돌아다니기를 좋아하던 고구려 사람들도 조선인들처럼 좌식 생활을 즐겼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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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저총에서 보이는 고구려인 실내 생활도. 

▲ 잠자는 공간만 따뜻한 '쪽구들'

고구려인들은 실내에서도 엉덩이를 방바닥에 붙이며 사는 좌식 생활보다는 요즘 아파트에서 사는 것처럼 입식 생활을 많이 했습니다. 고구려의 겨울은 몹시 추웠습니다. 이들은 추위를 피하기 위해 온돌을 만들어 실내를 따뜻이 했습니다. 하지만 방 전체에 구들장을 놓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잘 수 있는 공간만 온돌방으로 꾸몄습니다. 이를 쪽구들이라고 합니다.

군사 유적지인 아차산 4보루(작은 성)의 발굴 때에도 12 개의 쪽구들이 발견됐습니다. ‘ㄱ’자형과 직선형 두 종류의 쪽구들은 옆에 평평한 돌판을 세워 벽을 만들고 그 위에 납작하고 긴 돌을 뚜껑을 덮은 형태를 지니고 있습니다. 쪽구들이 끝나는 부분은 원형으로 마무리돼 있는데, 여기에 연기가 빠져 나가는 굴뚝을 세웠습니다.

▲ 방 안에 의자·평상·장방 놓아

이렇게 전체가 아닌 부분 난방을 했다면, 나머지 공간은 무엇이 있었을까요. 각저총 널방 북벽에 그려진 주인공 부부의 실내 생활도를 보면 이들의 생활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생활도에서 남자 주인공은 꽤 높은 의자에 앉아 있는 반면, 그의 두 부인은 바닥에 무릎을 꿇고 앉아 있습니다. 부인들이 앉은 곳은 주황색으로 칠해져 있고, 방바닥이 방 바깥보다 약간 더 높은 곳으로 보아 쪽구들 방임을 알 수 있습니다.

방 안의 나머지 공간에는 이처럼 의자와 평상ㆍ장방을 놓아 그 위에 앉아서 생활했습니다. 평상은 평평한 넓은 의자로 혼자 또는 여럿이 함께 앉기도 했는데, 평상 아래에는 신발을 가지런히 벗어 놓았습니다. 즉, 실내에서도 신발을 신었던 것입니다. 장방은 평상의 세면에 낮은 둘레 벽을 치고, 천으로 지붕을 만들어 마치 작은 방처럼 꾸민 곳입니다. 장방은 주로 신분이 높은 귀족이 즐겼던 것으로 여기에 비단이나 자수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하기도 했습니다.

고분 벽화에 등장하는 귀족들의 정면 초상화는 대개 장방에 앉은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장방에는 휘장(커튼)을 둘러 때로는 접거나, 내려서 밖을 볼 수도 있고 없게도 했습니다. 휘장은 방에도 둘러서 내부의 공간을 구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평상과 장방ㆍ휘장 문화는 조선 시대에 와서 온돌과 마루 문화가 발전하면서 점차 사라졌습니다. 특히 온돌이 방 안 전체를 따뜻이 하게 되면서, 신을 벗고 실내에 들어와 살게 된 것은 주거 문화의 큰 변화였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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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방에 앉아 있는 무덤 주인공. 안악 3호분에서 나온 그림이다. 


▲ 부엌ㆍ마구간ㆍ차고는 따로 지어

집은 또 용도에 따라 건물을 별도로 지었습니다. 부엌ㆍ마구간ㆍ고기 창고ㆍ식량 창고ㆍ방앗간ㆍ수레를 넣어 두는 차고는 물론이고 남녀가 사는 건물도 구분되어 있었습니다. 또 연못과 활 쏘기를 연습할 수 있을 정도의 마당도 있었고, 노비들의 잠자는 장소도 따로 있었습니다. 기와 지붕을 얹은 귀족들의 집과는 달리, 가난한 사람의 집은 초가 지붕 혹은 나무껍질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북쪽 사람들은 겨울철 추위를 막기 위해 무덤처럼 생긴 굴을 파고 지하에서 살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고구려 서민들의 집에는 쪽구들이 있어서 난방을 했습니다.

고구려 시대의 집들은 나무와 흙으로 벽체를 만들어 불에는 약하지만, 시멘트 집보다 맙?효과가 뛰어나 쪽구들에다 부분적으로 화로를 통한 난방을 해 한겨울을 따뜻하게 보낼 수 있었습니다. 물론 서민들의 집은 집 내부에 여러 건물들이 없었고, 마구간이나 창고 정도만이 따로 만들어졌을 뿐입니다.

옛 사람들이 쓰던 가구류 대부분은 나무로 만든 것들입니다. 따라서 불에 타거나 훗날 연료 등으로 태워져 고구려의 가구 가운데 현재 전해 오는 것은 없습니다. 다만, 벽화나 무덤에서 나온 나무 조각을 보면 고구려에서는 옻칠을 한 칠기류 제품을 많이 사용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옻칠을 하면 벌레나 열ㆍ직사광선으로부터 나무를 보호할 수 있고, 때도 잘 타지 않습니다. 고분 벽화에는 의자와 탁자ㆍ소반ㆍ책상 등이 등장하지만, 장롱 등 다른 가구류를 더 이상 확인할 수 없어 당시 사람들의 실내 생활을 모두 다 알 수 없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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