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자료실

활발한 무역·강력한 해군으로 동·서해 장악

활발한 무역·강력한 해군으로 동·서해 장악
동아시아 바다를 제패한 해양 강국
고구려, 4세기부터 ‘해양 강국’으로 떠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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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동반도 남단의 고구려 수군 기지인 비사 성에서 바라본 서해. 
고구려는 서해와 동해 바다를 소유했던 해양 강국이었습니다.

흔히 사람들은 백제를 ‘해양 강국’이라 일컫고, 해외에 영토를 개척하고 활발한 무역 활동을 한 것을 높게 평가합니다. 그런데 4세기 말인 광개토대왕 때 고구려는 백제로부터 동아시아 바다의 지배권을 빼앗아 옵니다. 드넓은 대륙의 주인공이었던 고구려가 바다의 주인이 된 것입니다. 말을 타고 빠른 이동을 즐겼던 고구려인은 그러나 일찍이 정보의 고속 도로이자, 많은 물자와 사람을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바다에 관심을 가져왔습니다. 그 중 추모왕의 외할아버지 하백은 강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한 큰 세력가로서 ‘물의 신’으로 숭배되기도 했습니다.

고구려가 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긴 이유 가운데 하나는 압록강을 이용한 수상 교통의 이점과 물고기 등의 수산 자원을 얻기 위함이었습니다. 고구려 옛 수도였던 집안 시의 박물관에는 철제 낚싯바늘과 어망추가 전시되어 있습니다. 특히 JYM3283호 고분에서 나온 유물은 무덤 주인이 생전에 물고기를 즐겨 먹었고, 그 당시 어망을 이용한 고기잡이가 행해졌음을 보여 줍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또 요하ㆍ송화 강ㆍ눈 강ㆍ우수리 강ㆍ혼하ㆍ태자하ㆍ압록강과 두만강ㆍ청천강ㆍ대동강 등의 수많은 하천을 누비면서 많은 양의 수산 자원을 획득했고, 풍부한 물을 이용해 농업을 크게 발전시키기도 했습니다.

▲ 송ㆍ오나라와 해상 교역

강에서 키워 온 이러한 해운력은 바다와 만났을 때 급격히 발전되었습니다. 고구려는 동해안의 동예를 복종시키고, 소금과 바다고기 등의 산물을 획득한 데 이어 서해 바다를 통한 여러 나라와의 교류 관계도 활발히 맺었습니다. 특히 북중국의 위 나라에 막혀 육지로는 직접 관계를 맺을 수 없는 양자 강 유역의 오나라와 233년 배를 통해 서로 교류를 맺기 시작했습니다. 고구려는 오나라가 의복과 보물을 바치자, 말 수백 필을 답례로 주었습니다. 이후 200 년이 지난 장수왕 시절 고구려는 송나라에 말 800 필을 수출하기도 합니다. 점차 해상 교류의 규모가 커져 갔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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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와 서해를 장악한 5세기 고구려의 모습. 

▲ 백제 이어 동아시아 바다의 지배자로 등장

고구려가 동아시아 바다의 지배자로 등장한 것은 이전까지 ‘바다의 왕’으로 군림했던 백제를 물리치고 난 이후부터입니다. 광개토대왕은 백제 수군의 핵심 기지이며, 난공불락의 성인 관미성을 점령했습니다. 이어 백제의 수도 한성을 공략하여 아신왕의 항복을 받아 냅니다. 전쟁 승리 이후 고구려는 백제를 대신해 서해 중부는 물론 대륙 동해안과의 교역권까지도 장악하게 됩니다. 또한 5세기 초에는 울산 등지에 고구려 전초기지를 설치해 두고, 신라 해안가를 넘보는 왜국의 배를 공격하여 격퇴하는 등 동해도 장악했습니다. 한편, 478년에는 왜국이 양자 강 유역의 송나라에 보낸 국서에, 두 나라의 왕래를 중간에 고구려가 방해한 적도 많았다고 합니다. 이는 고구려가 남해에서도 상당한 지배력을 행사했음을 보여 줍니다.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는 백제가 북위ㆍ송ㆍ남제ㆍ당과 교류하는 것을 바다에서 막았다는 기록이 자주 보입니다. 고구려 해군은 신라 김춘추가 당나라에 갔다가 돌아올 때에 바다에서 그의 배를 검문하기도 했습니다. 반면 백제나 신라가 고구려의 바다를 통한 활동을 막았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고구려는 이처럼 동해와 서해의 패권을 장악하고 활발한 해상 무역을 통한 이익을 얻어 나라를 부강하게 키웠습니다. 또 바다를 통해 만난 나라와의 교류를 통해 국제 외교 무대에서 큰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 강력한 해군도 육성

그러나 바다가 고구려에게 반드시 기회만 준 것은 아닙니다. 고구려는 바다를 통해 적이 공격해 올 것에 대비하여 요동반도 남부와 장산군도에 비사성을 비롯한 해양 방어성을 세워 강력한 해군을 육성했습니다. 이를 바탕으로 고구려는 598년 수나라와의 전쟁에서는 적의 해군기지를 격파, 해상 보급로를 막아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기도 했습니다.

고구려가 수ㆍ당과의 전쟁에서 거듭 이길 수 있었던 주요 원인은 바다에서의 전쟁에서도 승리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처럼 동아시아 바다는 백제에서 고구려로 또 고려로 이어지는 우리 겨레의 터전이었습니다. 하嗤?13세기 원나라의 고려 침공 이후 우리 겨레는 바다를 한동안 잊고 살았습니다. 이제 바다의 중요함이 커 가는 시대에 우리는 옛 조상들의 전통을 되새겨 보아야겠습니다. 바다는 우리가 개척해야 할 또 하나의 미래이기 때문입니다.


고구려에도 스파이가 있었다
도림 스님·덕창·고죽리… 정보전으로 승리 이끈 일등 공신들


007 시리즈를 비롯해 영화에서 스파이가 등장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나요? 적진 깊숙이 홀로 침입해서 적을 혼란에 빠뜨리게 하거나, 중요한 정보를 빼내오는 스파이는 어느 시대나 중요한 존재였습니다. 고구려에도 이런 역할을 하는 스파이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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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차산 홍련봉 1보루. 백제 수도(풍납토성ㆍ몽촌토성 등 아차산에 마주 보이는 한강 이남 지역) 지역을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군이 주둔한 군사 유적지다. 

▲ 백제 정복에 결정적 역할 ‘도림’

도림 스님은 장수왕이 백제를 정복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유명합니다. 그가 어떻게 백제를 궁지에 빠뜨렸는지 살펴볼까요? 472년 고구려에 온 북위의 사신은 백제가 북위와 협력해 고구려를 공격하자는 제안을 해 왔다는 사실을 고해 바쳤습니다. 396년 광개토대왕이 이끄는 고구려군에게 패배한 후, 오랫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던 백제가 이 무렵 점점 힘을 길러 강국으로 거듭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북위와 힘을 합해 고구려를 공격할 의지까지 야심차게 드러냈으니, 장수왕은 크게 걱정이 되었습니다.

‘어떻게 백제를 다시 굴복시킬 수 있을까?’를 고민하던 장수왕은 먼저 스파이를 비밀리에 모집했습니다. 이 때 도림이란 스님이 찾아왔습니다. 장수왕은 그를 비밀리에 백제로 보냈습니다. 도림은 자신이 고구려에서 죄를 짓고 도망 온 것이라 속이고, 백제에 정착할 수 있었습니다. 백제 개로왕은 평소 바둑 두기를 좋아했는데, 마침 도림이 자신이 바둑을 잘 두니 왕께 바둑의 재미를 알려 드리겠다고 청을 넣었습니다. 이에 개로왕은 도림을 불러 바둑을 뒀습니다. 개로왕은 도림의 바둑 실력이 무척 뛰어나자, 그에게 바둑을 배우고자 손님으로 잘 대접을 했습니다.

개로왕과 바둑을 두며 친해진 도림은 얼마 후 왕에게 말을 건넸습니다. 백제가 매우 부유하고 강한 나라임에도 성곽과 궁궐이 수리되지 아니하고, 죽은 왕들의 무덤도 볼품이 없으며, 백성들의 집도 자주 하천의 범람으로 무너지니 이는 좋지 않은 일이라고 했습니다. 도림은 개로왕이 나라를 부유하고 강대하게 한 만큼, 그에 맞는 나라의 위엄을 갖추라고 부추긴 것이었습니다.

개로왕은 그의 말을 전적으로 옳다고 생각하고, 백성들을 강제로 동원해 화려한 성과 궁궐을 짓도록 했습니다. 또 왕의 아버지인 비유왕의 무덤도 크고 화려하게 만들었고, 한강 연안을 따라 긴 제방을 만들었습니다. 이렇게 한꺼번에 많은 공사를 한 탓에 나라의 창고는 텅텅 비었고, 백성들의 생활은 곤궁해졌습니다. 이렇게 되자 백제는 국력이 크게 악화되었습니다. 그러자 도림은 백제를 탈출하여 이 사실을 장수왕에게 아뢰었습니다.

장수왕은 즉시 3만의 군대를 동원하여 백제의 수도 한성을 포위하였습니다. 개로왕은 성문을 닫고 저항했지만 고구려군이 사방에서 공격하는 바람에 위기에 몰렸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항복하려는 백제군이 점점 많아졌습니다. 개로왕은 자신이 도림의 말만 믿고 나라를 잘못 다스린 것을 후회했습니다. 개로왕은 내가 죽어도 나라의 명맥은 유지해야겠다는 생각으로 태자 문주를 먼저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자신도 탈출을 시도했습니다. 하지만 금세 고구려 군에게 잡혔고 결국 처형당하고 말았습니다. 백제는 이 사건을 계기로 웅진으로 천도해야만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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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촌동 백제3호분. 동서 55.5 mㆍ남북 43.7 m의 백제 고분으로, 고구려 적석총과 닮았다. 백제는 이 같은 대형 무덤을 갑작스레 만들다가 국력이 쇠해졌다. 

▲ 덕창ㆍ고죽리 등도 뛰어난 활약

장수왕은 무조건 힘만으로 백제를 이긴 것이 아니라, 스파이를 활용해 적은 힘으로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정보전의 효과입니다. 667년 당나라는 고구려가 정보를 잘 캐낸다는 것을 알고, 군대의 중요한 정보를 ‘이합시’라는 암호문으로 작성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스파이들은 이 암호문을 해독, 당나라 군대를 압록강에서 곤경에 빠뜨리기도 했습니다.

고구려는 특성상 여러 나라와 관계를 맺어, 외국 사정을 잘 알아야 했습니다. 그런 이유로 외국에 수시로 스파이를 보냈던 것입니다. 그 가운데 스파이 덕창은 연개소문의 부하로, 신라 김유신의 군대가 고구려를 공격해 온다는 정보를 미리 얻어 고구려에 알렸습니다.

고죽리는 645년 당나라 진영에 들어가 그들의 움직임을 상세히 보고하던 스파이였는데, 적에게 잡혔다가 풀려 난 탓에 이름이 널리 알려졌습니다. 한편, 신라 김유신도 스파이를 잘 이용한 사람으로 유명합니다. 김유신의 명을 받은 조미곤은 백제 좌평 임자를 통해 백제를 혼란스럽게 만들었고, 주요 정보를 틈나는 대로 빼냈습니다. 즉, 조미곤은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던 것입니다. 정보는 이처럼 고구려 시대에도 지금처럼 매우 소중한 것이었습니다. 그 시대에도 나라의 생존과 번영을 위해 치열하게 살았던 것입니다.


어떻게 농사를 지었을까?
소와 쟁기로 '농업 강대국' 우뚝, 농민 우대 정책으로 농업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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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회분 4호묘에 그려진 소머리를 한 농사의 신. 

우리 나라에서는 현재 도시 생활을 하는 사람이 대다수입니다. 반면, 농촌에서 농사를 짓거나 어촌에서 고기를 잡는 사람의 숫자는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최근 100 년 전만 해도 많은 이들이 농사를 짓고 살았습니다. 때문에 한 해 농사가 잘 되면 나라가 부유해지고, 농사가 안 되면 백성들이 굶주리게 돼 나라의 임금도 식사량을 줄이기까지 했습니다.

옛날 임금님은 또 백성이 농사를 잘 짓도록 돕는 것을 중요히 여겼습니다. 고구려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구려가 대륙의 광활한 땅을 차지하고 있었으니까 목축과 수렵을 통해 고기를 많이 먹었을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요? 하지만 고구려인의 가장 중요한 생업은 역시 농업이었습니다. 고구려는 건국 당시 농사 짓기에 좋은 넓은 평야를 갖지 못했지만, 힘을 키운 다음에는 요동ㆍ한반도 서북부ㆍ만주 평원의 좋은 농경지를 모두 차지했습니다. 이 땅을 차지하기까지 고구려 사람들은 엄청난 피와 땀을 들였습니다.

하지만 좋은 농경지가 있다고 갑자기 부자가 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농부가 많고, 농사짓는 기술도 발달해야 나라가 부자가 될 수 있었지요. 따라서 고구려는 외국에서 건너오는 사람들도 호의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세금도 낮추고, 새롭게 정착할 땅도 주면서 적극적으로 이민을 받았습니다. 고구려가 농민들을 우대한다는 소문이 나고 많은 사람들이 고구려로 건너가자, 후연은 세금을 낮추어 백성들이 떠나가는 것을 붙잡기도 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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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양시 상원2호 무덤에서 출토된 길이 35 cm의 대형 쇠보습. 

▲ 2~3세기부터 소를 이용 엄청난 양의 식량 저장

고구려 말기 요동성에는 50만 석이라는 엄청난 식량이 저장되어 있었습니다. 개모성ㆍ백암성 등 각 성에도 많은 식량이 저축돼 장기간 전쟁을 치를 수 있는 힘을 갖게 됐습니다. 이렇게 식량을 쌓아 놓을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은 소를 널리 이용해 농사를 지었기 때문입니다.

조선 시대에는 소가 부족해서 소를 함부로 잡아먹지 못하게 법으로 단속을 했고, 사람들도 수레를 끌 소가 적은 탓에 가마를 타고 다녔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소가 무척 많았습니다. 광개토대왕은 395년 거란을 정복하면서 엄청난 양의 소와 말을 끌고 옵니다. 소가 농업에 중요하다는 것을 잘 알았기 때문이지요. 또 외출을 할 때는 소에 수레를 메워 타고 다녔습니다. 이렇듯 소가 농업에 이용되자 농민들은 더 넓은 땅을 일굴 수 있었습니다.

소가 끄는 보습(쟁기)은 밭을 깊게 또 많이 갈 수 있어서, 농부 한 명이 경작하는 땅을 크게 넓혀 주고 작물의 생산도 많게 해 주었습니다. 또 황무지도 쉽게 개간할 수 있고, 물길도 쉽게 뚫어 보다 좋은 논밭을 만들 수 있게 했습니다. 신라는 502년에서야 소로 농사를 지었고, 백제도 6세기에서야 소를 농업에 활용했지만, 고구려는 이보다 앞선 2∼3세기에 소를 농업에 이용했습니다.

▲ 앞선 농기구로 강대국 유지ㆍ발전

소가 끄는 보습은 보통 10 kg이 넘고 길이도 40∼80 cm나 되는 큰 것입니다. 이전까지 사람이 밭을 갈기 위해 사용하던 U자형 따위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앞선 농기구입니다. 고구려는 이와 같은 큰 보습을 많이 만들 정도로 철 산업도 무척 발달해 있었습니다. 고구려는 특히 요동과 두만강 가까운 곳에서 생산되는 철로 이 같은 농기구를 만들어 널리 사용했습니다.

고구려는 소를 이용한 농사가 본격적으로 보급되는 4세기 이후 농업이 크게 발전했습니다. 농업이 발달되자, 많은 농산물을 저축할 수가 있게 되었습니다. 645년 당과의 전쟁 당시 요동성에도 50만 석의 군량이 있었습니다. 이는 조선 성종 때 전국의 군량과 같을 정도로 엄청난 양입니다. 많은 식량 생산은 곧바로 백성들을 부유하게 했고, 남은 식량은 물자 교환으로 이어졌습니다. 나아가 상업의 발달, 국제 무역의 발달까지 가져왔습니다.

부자 나라가 된 고구려는 멋진 성도 쌓고, 화려한 문화도 꽃피울 수 있었습니다. 또 이웃 유목민에게 식량도 공급하면서 그들을 용병으로 활용했습니다. 고구려가 대제국을 유지하고 발전할 수 있었던 힘은 농업의 발달로 나라가 부유해졌기 때문이었습니다. 고구려의 번영은 농경지를 확보하려고 노력했던 역사와, 농민을 보호했던 나라의 정책, 그리고 많은 소 덕택이었던 것입니다.

오회분 4호묘와 5호묘 고분 벽화에는 벼 이삭을 들고 있는 소의 얼굴을 한 신이 그려져 있습니다. 바로 농사의 신입니다. 소가 농업에서 얼마나 중요했는지 이 벽화가 무척이나 잘 보여 줍니다. 고구려의 전사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뛰어난 기동성을 지닌 말(馬)이겠지만, 고구려의 농민들이 진정으로 필요했던 것은 바로 소(牛)였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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