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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태왕 그는 누구인가?

광개토태왕 그는 누구인가?
역사상 가장 눈부신 정벌 활동 동북 아시아 대국으로 이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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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구리시에 세워진 광개토대왕 동상. 그는 말을 타고 갑옷을 입은 정복 군주에 머무르지 않았다. 나라를 잘 다스린 위대한 성군(聖君)이기도 했다. 그래서 동상도 힘있는 성군의 모습을 띠고 있다.
 

▲ 18 세에 왕의 자리에 오른 뒤 21 년 간 고구려 이끌어

373년 고구려 왕실에 담덕이란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이 아이가 바로 고구려 역사에서 가장 널리 이름을 날린 광개토대왕입니다. 광개토대왕은 18 세의 비교적 어린 나이에 왕의 자리에 올라 39 세의 나이로 일찍 돌아가셨습니다. 하지만 391년부터 412년까지 그가 다스린 21 년의 시간은 고구려 역사를 크게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그가 유명해진 것은 그의 아들 장수왕이 아버지의 무덤 앞에 거대한 비석을 세웠고, 그것이 120여 년 전 새롭게 발견됐기 때문입니다. 오랫동안 잊혀졌던 광개토대왕릉비에 기록된 글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그의 진면목을 볼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광개토대왕은 고구려 역사상 가장 눈부신 정벌 활동을 펼쳤습니다. 이 때문에 후손들이 ‘크게 영토를 넓힌’(廣開土) 그의 훌륭한 업적을 기려 대왕(大王)이라고 불렀으며, 더 나아가 ‘태왕(太王)’이라 칭했던 것입니다.

▲ 거란 정벌과 후연 공격으로 북방 진출의 초석 다져

능의 비문에 따르면 광개토대왕 최초의 공적은 395년에 거란족을 정벌한 일입니다. 대왕은 친히 군사를 이끌고 의무려 산과 노노아호 산맥을 지나 서요하 유역의 염수 지역을 공격하여 거란족 3 부락 6~700 명을 쳐부쉈습니다. 그리고 엄청난 소ㆍ말ㆍ양 등을 얻어 고구려로 돌아왔습니다. 기병을 육성하기 위한 좋은 말들을 마련하고, 오랜 적인 모용선비족이 세운 후연을 북쪽에서 압박할 수 있는 거란족 정벌은 고구려의 북방 진출에 큰 성과였습니다.

그리고 광개토대왕은 계획대로 후연을 적극적으로 공격했습니다. 요하를 넘어 후연의 수도와 가까운 숙군 성을 공략하여 평주자사를 패배시켰습니다. 404년에는 후연의 후방인 현재의 북경 부근의 연군을 공격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고구려의 일방적인 승리가 계속되는 가운데 후연은 고구려와의 항쟁 과정에서 내분이 일어나 고구려인의 후손인 고운이 왕위에 오르게 됩니다. 그래서 고구려는 고운이 세운 북연을 신하의 나라로 삼게 됩니다. 북연은 고구려의 영향력 아래 있던 나라고, 특히 435년 북위의 공격을 받아 멸망의 위기에 닥칠 때에는 고구려에게 구원을 요청하였고, 그 왕과 많은 백성들이 고구려로 넘어오게 됩니다.

▲ 동북쪽과 남쪽으로 세력 크게 확장시켜

광개토대왕은 또 동북쪽으로도 세력을 크게 넓혔습니다. 410년 광개토대왕은 친히 군대를 이끌고 동부여를 공격해 64 개성, 1400 촌락을 정벌했습니다. 그러자 동부여왕은 대왕에게 곧바로 항복하게 됩니다. 고구려는 이 때 동부만주와 연해주 지역도 함께 차지하게 됩니다.

또 소규모의 군사를 보내 숙신족을 돌아보고 이들을 신하의 나라로 삼아 버립니다. 대륙쪽만이 아니라, 광개토대왕은 남쪽으로는 백제를 공격하여 굴복시켰습니다. 그리고 신라 땅에 쳐들어온 가야ㆍ왜 연합군을 격파합니다. 더 나아가 백제와 왜 연합군도 계속해서 물리칩니다. 이처럼 광개토대왕은 신라를 속국으로 삼고, 금관가야를 멸망에 이르게 하였으며, 백제를 굴복시켜 한반도 전체를 크게 호령했습니다.

▲ 영토 확장 못지않게 나라의 내실 다지는 데도 노력

그가 이렇듯 빠르게 고구려의 영토를 크게 넓힐 수 있었던 것은 먼저 최고 군사령관으로서의 능력이 뛰어났기 때문입니다. 또 철갑옷을 입은 군사를 많이 키우고, 왕의 친위군인 왕당군을 따로 편성하였습니다. 해군을 별도로 육성하여 수륙 양면에서 입체적인 작전을 펼치게 하는 등 군사 부분에서의 개혁을 성공적으로 이뤄 냈기에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보다 더 중요한 요인은 따로 있습니다.

앞서 보았듯이 소수림왕과 고국양왕 때에 법과 교육 그리고 종교 분야 등에서의 개혁을 통해 국력을 꾸준히 키워 왔기 때문에 그의 활발한 정복 활동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이 점을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던 광개토대왕은 밖으로 팽창하는 것 못지않게, 고구려의 내실을 다지는 데도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능비문에는 ‘그의 은혜와 혜택이 하늘에 가득 찼고, 위엄과 무공은 온 세상을 덮었으며, 못된 자들을 없애 치우고 생업을 편안케 하니 나라는 부유하고 백성은 넉넉하고 오곡이 풍요롭게 무르익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비문에서 보듯 광개토대왕은 단지 땅만 넓힌 왕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고구려를 잘 사는 나라, 당당한 대국으로 변모시켰던 것입니다.

그의 등장 이후 고구려는 지역 강국에서 벗어나, 동북 아시아의 대제국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그래서 그는 고구려 사람들에게 나라를 건국한 추모왕과 더불어 대표적인 영웅으로 칭송을 받은 것입니다. 그 때문에 후손인 우리에게도 세종 대왕과 더불어 가장 존경하는 역사적 인물로 기억되고 있는 것입니다. 


광개토대왕은 왜 삼국을 통일하지 않았을까?
백제·신라와는 형제 관계로… 다른 나라들과는 잦은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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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의 부하인 유주자사 진의 무덤인 덕흥리 고분에서 나온 벽화 모습.오늘날의 북경 일대를 다스린 13 명의 태수들에게 보고 받는 장면이 등장한다. 

고구려에 관심을 가져 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 갖게 되는 궁금증이 있습니다. 그것은‘왜 그토록 강력한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지 못했을까?’하는 것입니다. 특히 광개토대왕 때라면 충분히 삼국을 통일할 수 있었고, 그랬더라면 우리 역사도 달라지지 않았을까,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이런 생각을 해 보았나요?

▲ 백제와 신라는 형제의 나라

잘 알다시피 광개토대왕 시기의 고구려는 분명 백제와 신라ㆍ가야를 완전히 통일할 강한 힘을 갖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고구려는 왜와 가야의 침입을 받은 신라가 구원을 요청하자, 즉시 5만의 군대를 보내 신라 지역에 쳐들어온 왜구는 물론 가야까지 공격해 금관가야를 멸망에 이르게 합니다. 그 고마움의 표시로 신라는 고구려에게 조공을 바칩니다. 그 뒤 고구려는 신라 수도에 100 명 이상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왕위 계승 문제까지 간섭하게 됩니다. 하지만 신라를 직접 영역으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396년 광개토대왕이 직접 백제를 공격해 궁성을 포위하자, 백제 아신왕은 노비 1000 명ㆍ베 1000 필을 바치며 “영원히 신하가 되겠다.”고 맹세합니다. 그런데 광개토대왕은 백제 왕의 성의를 받아들여 58 개의 성과 700 촌을 얻고, 백제 왕의 아우와 대신 10 명만 포로로 잡고 본국으로 돌아갑니다. 위에서 보듯 광개토대왕은 백제와 신라 두 나라를 통합할 의지가 없었습니다. 광개토대왕은 다만 백제와 신라ㆍ동부여 등을 고구려를 중심으로 하는 세계의 중요한 구성원으로만 보았던 것입니다. 즉, 고구려는 신라와 백제를 같은 언어와 생활 습관, 피가 섞인 형제의 나라로 생각했던 것이지요.

▲ 왜ㆍ거란족ㆍ후연은 멸망시켜야 할 대상으로 여겨

광개토대왕은 그러나 왜국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악당의 무리로 보았습니다. 왜국은 못된 짓만 하는 존재로서, 고구려를 중심으로 한 세계의 질서를 파괴하는 대상이기 때문에 반드시 멸망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이와 함께 문화적으로 이질적인 거란족도 물리칠 대상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마찬가지로 후연도 철저히 공격해 멸망시켜야 할 대상으로 여겼습니다.

하지만 후연에 정치적 변동이 생겨 고구려의 후예인 고운이 북연을 세우자, 광개토대왕은 그 나라를 같은 종족의 나라로 여기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고구려는 북연을 제후국으로 규정해 더 이상은 공격하지 않았습니다. 광개토대왕과 고구려 사람들은 자신들과 같은 뿌리를 가진 나라와 그렇지 않은 나라와는 이처럼 아주 분명히 구분을 했던 것입니다. 일부 학자들은 따라서 이 당시부터 고구려ㆍ백제ㆍ신라 사이에서 같은 민족의식이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 다른 나라와는 잦은 전쟁

하지만 고구려가 형이고, 신라가 아우인 관계는 영원히 지속될 수 없었습니다. 왜냐 하면 신라와 백제 모두 자신들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하고 싶어 했고, 다른 나라의 명령을 듣는 것을 싫어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백제와 신라는 서로 전쟁을 하는 사이였지만, 고구려를 몰아내기 위해 동맹을 맺었습니다. 그 결과 광개토대왕이 죽은 후 140 년이 지난 550년대에는 두 나라가 고구려 남부 지방을 함께 공격해 빼앗기도 합니다.

고구려가 백제와 신라를 완전히 자기 영토로 삼지 못했던 또 다른 이유는 고구려가 잦은 전쟁을 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특히 후연과는 408년까지 치열하게 전쟁을 치렀습니다. 고구려는 후연을 무너뜨리기 위해 당시 북경 인근까지 공격하는 등 전쟁에 많은 힘을 쏟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그만큼 백제와 신라 지역에 많은 군대를 두고 이들을 완전히 정복하기가 힘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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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대왕의 이름이 새겨진 호우. 신라의 수도 경주 호우총에서 출토됐으며, 당시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를 잘 알려 준다. 

▲ 백제와 신라에 기술과 문화ㆍ제도에 큰 영향

백제는 또한 비록 고구려에 패배하기는 했지만 지속적으로 고구려에게 저항할 만한 강한 국력을 가진 나라였습니다. 때문에 고구려도 백제를 완전히 멸망시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처럼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했다고 해도, 우리 역사가 더 좋은 방향으로 발전했을지 아니면 더 나쁜 방향으로 변했을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고구려가 백제ㆍ신라 두 나라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입니다. 특히 신라는 당시 앞선 고구려의 기술과 문화ㆍ제도 등을 받아들여 급속하게 성장, 장차 삼국을 통일할 기반을 마련하기도 했습니다. 광개토대왕 시기에 삼국이 완전한 통일을 이루지 못했지만, 서로 밀접히 만나 문화를 주고받으며 우리 민족 발전에 중요한 계기가 되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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