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길에 떨어진 물건도 함부로 줍지 않는 고구려인
어린이 여러분은 법 없이 살 수 있나요? 만약 세상에 법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사람들은 단 하루도 살기가 어려울지 모릅니다. 당시 고조선에도 8 조로 된 법이 있었는데, 후기에 와서 점차 지켜야 할 법 내용이 많아져 60여 항목에 이르렀습니다. 이처럼, 사람이 사는 곳이라면 예나 지금이나 법이 없을 수는 없겠지요. 지금부터 고구려에는 어떤 법이 있었는지, 고구려에서 법은 어떤 의미를 지녔는지 알아 보겠습니다.
옛날 중국의 나라들은 속고 속이며, 범죄를 저지르는 일이 무척 많았습니다. 그런데 이들 나라에서 기록한 역사책에서는 고구려는 범죄가 적고 감옥이 없었다는 사실을 무척이나 놀라운 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길거리에 떨어진 것도 함부로 줍지 않았답니다. 고구려 사람들이 워낙 착했기 때문일까요?
▲ 소와 말도 함부로 죽이면 노비로 만들어
그보다는 법을 위반하면 처벌이 엄했기 때문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다른 나라와 수시로 싸워야 했던 민족이었던 만큼, 배신자가 생긴다면 국가의 생존이 위태로울 수 있었겠지요. 그래서 나라와 왕을 배반한 사람은 먼저 불로 지진 다음 목을 베고, 그의 전 재산을 빼앗았습니다. 또 도둑질한 사람은 그 물건의 10 배를 갚도록 했습니다. 만약 그것을 갚을 수 없다면 그와 그의 자식들을 기어이 노비로 삼아서 보상하게 했답니다.
고구려에서는 또한 소와 말을 매우 중하게 여겼는데, 소와 말을 함부로 죽이면 그 사람을 노비로 만들었습니다. 당시 소는 농사 짓는 데, 말은 전쟁에 반드시 필요한 귀한 동물이었습니다. 그리고 강한 나라가 되려면 소와 말이 많아야 하기 때문에 이렇듯 엄격하게 법을 적용한 것입니다.
고구려 초기에는 범죄자가 생기면 부족의 지도자들이 회의를 통해 사형을 시키고, 부인과 자식들은 전부 노예로 삼았습니다. 알다시피 사회에서 범죄자로 낙인찍히면 사람들의 냉대를 받아 살아가기가 힘겨워집니다. 당시 을불이 관가에서 벌을 받은 후 다시는 장사도 못 하고, 거지처럼 살았던 것도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 소수림왕 때 국가 공식법 ‘율령’반포
부족별로 관습처럼 법을 집행하거나, 수시로 만든 법을 기준으로 집행해 오던 고구려는 373년 소수림왕이 이를 정비해 율령(국가의 공식적인 법)을 반포하기에 이릅니다. 법이란 단순히 형벌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의 여러 가지 기준도 포함됩니다. 즉, 관청의 조직은 어떻게 만들고, 물건의 크기를 재는 도량형은 어떤지 등 사회의 기준이 되는 것이 다 법으로 정해질 수가 있습니다.
소수림왕이 율령을 반포함에 따라 각 지방별로 달리 집행되던 법의 집행이 통일되었습니다. 같은 죄를 지었는데, 누구는 가벼운 벌을 받고 누구는 중형을 받는 일이 사라진 것이지요. 또 물건의 크기와 무게를 재는 도량형도 통일돼 물건을 거래할 때 보다 편리하게 되었습니다. 아울러 국가가 백성들에게 세금을 징수하거나, 일을 시키는 요역(徭役)도 보다 체계적으로 집행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각 관리들의 높고 낮음과 봉급을 주는 것, 각자 맡은 업무도 명확하게 규정되어 보다 책임 있게 일을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또 국가적인 행사의 절차와 의미 등에 대해서도 하나의 기준이 생겨 전국적으로 같은 행사도 치룰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앙과 지방의 문화적 격차도 줄어들었습니다.
▲ 광개토대왕 무덤 비문에서도 세세한 법 규정 있어
소수림왕의 조카인 광개토대왕의 무덤의 비문을 보면 전체의 1/3이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에 대한 법 규정입니다. 릉비에는 광개토대왕이 몸소 잡아 온 한인과 예인 220 호만으로 자신의 무덤을 지키라고 명령했는데, 비를 세운 장수왕은 한인과 예인이 무덤을 관리하는 예법을 잘 모를 것을 걱정해 경험 있는 110 호를 더 데려왔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이처럼 묘를 지키고 청소하고, 수시로 제사 지내는 일은 다양한 절차와 격식이 규정되어 있는 쉽지 않은 일이었음을 짐작케 합니다. 릉비에는 또 수묘인을 배출할 지역과 그 숫자를 구체적으로 기록하고 있고, 법령을 위반할 경우에는 형벌을 내리겠다는 것까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고구려의 법은 신라에도 큰 영향을 줬습니다. 신라가 만든 단양적성비, 울진봉평비 등에도 각?법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고구려는 철저히 법에 의해 집행되고 관리되는 나라였습니다. 과거와 달리 대충 감으로 일이 처리되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기준에 의해 일 처리가 진행되었던 만큼 고구려의 국력도 크게 성장하게 됩니다. 소수림왕의 율령 반포가 고구려 발전의 큰 계기가 되었던 것입니다.
고구려 학생들은 어떤 교육을 받았을까?
백성들은 글공부ㆍ군사 훈련 '경당' 귀족의 국립 대학 '태학'
아차산 고구려 군사 유적지에서 출토된 토기. 다양한 글자가 적혀 있다.
▲ 문지기 등 가장 미천한 신분까지 경당서 책 읽게 해
고구려 시대에는 학교가 존재했을까요? 당시 학생들은 무엇을 배웠을까요? 그 때 어린이들도 지금처럼 학원 과외를 많이 받았을까요? 그래요. 고구려 시대에도 물론 학교는 있었습니다. 그 때에도 학생들이 1등을 하려고 열심히 노력을 했겠지요. 다만 과외 공부까지 했는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문헌에서 살펴보면 고구려 사람은 공부를 매우 열심히 했습니다. 중국인이 쓴 ‘구당서’라는 책에는 고구려 사람들은 워낙 글읽기를 좋아해 각 거리마다 큰 집을 지어 이를 경당이라 부르고, 문지기 혹은 말의 먹이를 주는 사람과 같은 가장 미천한 신분에 이르기까지 밤낮으로 이곳에서 책 읽기와 활쏘기를 익히게 한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고구려에서 미천한 신분에 이르기까지 글공부를 했다는 것은 조선 시대와 비교해 보면 큰 차이가 납니다. 조선에서는 일반 농민들이나 노비들은 서당에서 공부를 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서기 191년까지 농부로 지냈던 을파소는 평소 엄청난 공부를 한 지식인이었습니다. 그 때문에 하루 아침에 국상에 임명될 수가 있었습니다.
▲ 주변에서 살아 남기 위해 백성들에게 글 가르치고 활쏘기 시켜
고구려 고분 무용총에 그려진 활쏘기 장면 벽화.
고구려 사람들은 경당에서 배운 활쏘기를 평소에 사냥 등을 통해 솜씨를 다듬었다. 아차산 고구려 군사 유적지에서 나온 각종 그릇에는 소유자를 표시하는 글자가 적혀 있습니다. 이를 통해 고구려 군인 대부분이 교육을 통해 글자를 알고 있었음을 엿볼 수가 있습니다.
고구려에서 이처럼 글공부를 강조한 것은 살아 남기 위한 자구책이었습니다. 백성들이 글을 알아야 국가에서 행한 법령을 집행하기가 쉽고, 상거래를 할 때에도 서로 편리하기 때문입니다. 또 군사들도 보다 정교한 군 작전을 쉽게 수행할 수 있습니다. 만약 군인과 백성이 글을 전혀 모른다면, 군대의 작전 능력이 떨어지는 것은 물론 상거래도 위축되고 법을 몰라 죄를 범하는 사람들이 많아질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나라가 약해지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주변의 많은 적들과 상대하면서 살아 남기 위해서 고구려가 선택할 것은 국민 개개인을 교육시켜 사람들을 스스로 강하게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고구려도 초기에는 ‘좌식자’라 불리는 소수의 전문 전사 집단이 전쟁을 담당했습니다. 하지만 나라가 커지면서 전쟁에 동원할 군사의 숫자가 많아지고, 백성들도 군사로 활용해야 했습니다. 따라서 일반 백성에게 군사 훈련을 시켜야 했습니다. 그로 인해 경당을 세우고 활쏘기ㆍ말타기 등과 함께 글공부도 함께 시킨 것입니다.
중국인들이 기록한 글에는 유교 경전인 시경ㆍ서경ㆍ역경ㆍ예기, 춘추ㆍ사기 등의 역사서, 옥편을 비롯한 글자학 서적, 문선과 같은 문학책까지 폭넓은 중국 서적이 고구려에서 널리 보급되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경당 등에서 교육한 책들이 중국에서 들여온 책들만은 아니었겠지요.당연히 고구려의 역사와 종교 사상과 관련된 서적을 더 많이 가르쳤습니다. 고구려는 나라의 역사를 기록한 유기 100 권을 만들었습니다.
경당에서는 또 글공부 못지않게 전사를 양성하는 교육을 강조했습니다. 이것은 신라 화랑 제도와 많이 비슷합니다. 경당에서 전사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평소에도 사냥 등을 통해 말 타고 활 쏘는 기술을 익히는 데 힘썼습니다. 이를 열심히 해야 나라의 관리도 되고 출세도 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 교육 기관 태학 세워 전문적 지식인도 길러 내
소수림왕은 372년 태학이란 교육 기관을 세웁니다. 신라에서는 태학과 비슷한 국학을 682년에 만들기도 합니다. 태학은 교육을 담당하는 박사들이 학생을 가르쳤는데, 귀족의 자제들을 9 년 정도 가르쳤고, 이곳을 졸업한 학생들은 관리를 도맡아 했습니다. 이처럼 체계적이고 전문 지식을 배운 이들이 나라의 관리가 되면서, 고구려 정부의 능력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391년에 등장한 광개토대왕이 나라를 잘 다스릴 수 있었던 것도 태학에서 배출된 전문적 지식을 갖춘 관리들이 이 때 많이 등장했기 때문입니다. 태학 박사 이문진은 600년 고구려 역사를 기록한 신집 5 권을 만들었고, 역시 태학 출신으로 생각되는 을지문덕은 멋진 시를 짓는 뛰어난 지식인이었습니다.
소수림왕이 국력을 정비하는 과정에서 만든 태학이 광개토대왕 시기 고구려 번영의 기초가 된 것입니다. 또한 고구려가 강대국이 된 것은 경당에서 많은 백성을 교육했기 때문입니다. 교육은 국가의 최고 자원입니다. 어린이 여러분들도 열심히 공부하여 많은 지식과 지혜를 갖출 때 우리 나라는 분명 더 좋은 나라, 더 강한 나라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어떤 종교를 갖고 있었을까요?
평안남도 평원군 원오리 절터에서 나온 흙 부처. 미소 띤 얼굴과 균형 잡힌 몸매, 곱게 주름진 옷 등 입체감이 두드러진 조각품이다.
▲ 해마다 10월에 동맹 축제 열어
고구려 사람은 어떤 종교를 믿었을까요? 당시에는 기독교나 이슬람교가 전혀 전파되지 않았고, 372년 소수림왕이 비로소 불교를 나라의 종교로 인정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 사람들은 평소 최고의 신인 천신을 비롯해 고등신ㆍ부여신ㆍ해와 달의 신ㆍ별신ㆍ조상신ㆍ농사의 신ㆍ불의 신 등을 믿었습니다. 고등신은 나라를 세운 추모왕이며, 부여신은 왕의 어머니 유화 부인입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특히 매년 10월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동맹 축제를 했습니다. 이 때 가장 중요한 의식은 나라의 동쪽에 있는 큰 굴에서 수신을 맞이해 강가로 모셔 제사를 지내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해모수가 변신한 태양의 빛을 받아 유화 부인이 추모왕을 탄생시킨 것의 재현입니다. 고구려는 왕이 직접 주관하는 이 행사를 통해 고구려가 신의 후손임을 확인했습니다. 이 날 왕과 귀족들은 비단에 수놓은 의복과 화려한 장신구로 치장하고 식장에 나오며, 행사 후에는 함께 노래하고 춤추는 화합의 축제를 벌였습니다.
고유 종교를 받들었던 장소마다 추모왕을 모신 사당이 있었고, 수신을 맞이한 동굴과 여러 신을 모신 신전이 곳곳에 있었습니다. 특히 국내성 지역의 동대자 유적은 고구려 고유 종교의 신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답니다.
▲ 각 지방마다 서로 다른 신 섬겨
고구려인들은 조상에 대한 제사도 자주 지냈습니다. 특히 무덤은 제사가 행해지는 아주 중요한 장소였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사람이 죽어도 영혼은 살아 있다고 믿었으며, 조상이 후손들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습니다. 따라서 무덤을 잘 만들고 오래오래 보존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영원히 죽지 않는 신선의 삶을 갈망했고, 이러한 믿음은 고분 벽화 등에서 잘 나타납니다. 이것은 때로 중국의 도교와도 비슷한 면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고구려 고유 종교는 교단의 조직과 교리가 체계적이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각 지방이나 부족마다 서로 다른 신들을 섬기기도 했습니다.
▲ 소수림왕 때 불교를 종교로 인정
고구려 종교의 이런 문제점을 안 소수림왕은 불교를 받아들였습니다. 당시 불교는 교리 체계가 합리적이고 교단 조직도 갖추고 있었으며 인도에서 중국을 거쳐 서서히 전해져 고구려인의 정서에 이미 친숙해져 있었습니다. 소수림왕이 이 불교를 공식적으로 인정한 것은 전진이란 나라에서 순도 스님이 불상과 경전을 전한 때부터였습니다.
장천1호분에 그려진 그림. 후손들이 죽은 무덤 주인을 향해 절하고 있다.
가운데 주인공이 앉은 좌대에는 북두칠성이, 머리 위에는 부처가 지키고 있다.
그로부터 3 년 후 소수림왕은 소문사와 이불란사라는 절을 짓고 순도ㆍ아도 스님으로 하여금 고구려에 불교를 전하도록 했습니다. 고구려의 불교는 고국양왕이 적극 불교를 높이 받들고, 광개토대왕이 평양에 사찰 9 개를 만드는 등 불교를 적극 보호함에 따라 번창했습니다. 고구려의 스님들은 또 해외로 나가 널리 불교를 전파하기도 했는데, 일본의 법륭사 금당 벽화를 남긴 유명한 화가인 담징도 당시의 스님이었습니다. 특히 혜량 스님은 신라로 건너 가서 신라 불교의 지도자인 국통에 올라 팔관회를 개최하기도 했습니다.
▲ 국력 향상과 한국 종교 발전의 계기돼
고구려 왕들이 불교를 적극 지원한 것은 불교가 왕의 권위를 강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됐기 때문이었습니다. 또 불교는 국가에 대항 충성을 강조하는 호국 불교의 성격도 지니고 있었으므로 국가의 지원을 많이 받았습니다. 현재 남아 있는 고구려 불교 유적으로는 정릉사ㆍ금강사 등의 절터, 신묘명금동아미타여래상, 원오리 흙부처, 연가7년명금동여래입상 등입니다. 특히 장천1호분 벽화에는 부처와 보살의 모습이 그려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고구려 불교는 신라와 비교해 보면 크게 발전하지 못 했습니다. 고구려 고유 종교의 힘이 워낙 강했기 때문입니다. 장천1호분 벽화의 그림처럼 조상신 숭배와 부처님 신앙이 서로 공존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고구려에서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결과적으로 한국의 종교 발전에 계기가 되었고, 고구려의 국력 정비에도 커다란 도움이 되었습니다. 고국원왕 때 국가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광개토대왕 시기에 고구려가 전성기를 맞이한 것도 소수림왕 때에 이뤄진 법과 교육 그리고 종교 이렇게 세 분야의 큰 변화와 개혁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