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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그토록 많은 무덤을 만들었을까?

왜 그토록 많은 무덤을 만들었을까?
내세의 삶 믿어 '신성한 공간'으로 관리

고구려의 수도였던 집안 시를 처음으로 방문하던 날이었습니다. 흥분된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다 보니 주위엔 온통 무덤들이었습니다. 그것도 밑변 길이가 85 m나 되는 천추총, 밑변 길이 31.6 mㆍ높이 13 m의 장군총, 밑변 길이 65 m의 태왕릉을 비롯해 임강총, 오회분 2호묘, 서대총 등 거대한 무덤과 아름다움 벽화가 그려진 이름난 무덤이 참 많았습니다. 집안 시에는 무려 1만 2358 개의 고구려 무덤이 있었다고 합니다. 많이 훼손되기는 했지만, 지금도 절반 이상이 남아 있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왜 이렇게 많은 시간과 힘, 비용을 들여 정성을 다해 거대한 무덤들을 만들었던 것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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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너무나 커서 마치 산처럼 보이는 천추총. 밑변길이가 85m에 이른다. 

장군총에 사용된 돌 가운데에는 무게가 수십 톤이나 되는 것도 있습니다. 이런 돌들은 집안 시 외곽에 있는 채석장에서 캐내 온 것인데 겨울에 언 강물을 이용해 운반했거나, 또는 큰 수레에 실어서 무덤 만드는 곳까지 힘겹게 운반했을 것입니다. 당시에는 대형 트럭이나 포크레인 등이 전혀 없었고, 기중기와 비슷하게 무거운 것을 쉽게 들어올리는 간단한 장비 정도만 있었습니다. 돌을 매끈하게 다듬는 기계도 물론 없었습니다. 따라서 대부분의 일을 사람과 동물의 힘으로 해내야 했습니다. 당시에도 전문 기술자가 있었지만, 무덤을 만드는 일은 대단히 힘들고 비용도 많이 드는 일임이 분명합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사람이 죽으면 영혼이 죽지 않고 무덤에서 머문다고 생각했었습니다. 죽은 이후의 세상에 대해 관심이 많았던 고구려 사람들은 살아 있을 때부터 자신의 무덤을 만들기도 했습니다. 또 결혼을 하면 자신이 죽어서 장사 지낼 때 쓸 옷을 미리 만들기도 했습니다. 물론 장례식도 비용을 아끼지 않고 성대하게 치렀습니다. 그리고 무덤에는 많은 금은보화(金銀寶貨)를 묻어 두기도 했답니다.

하지만 차츰 보물을 노리고 외국인들까지 무덤을 도굴하는 경우가 생기자, 고구려 후기에는 죽은 사람이 살았을 당시 사용하던 옷과 노리개ㆍ수레ㆍ말 등을 무덤 옆에 놓아 두고 장례에 참석한 사람이 나눠 가지도록 했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은 사람이 죽었을 때는 크게 슬퍼하지만, 막상 영혼이 저승에 가는 장례식 날에는 북치고 춤추고 노래하며 죽은 사람을 떠나 보냈습니다. 현재의 삶은 끝나지만, 죽은 후 내세의 삶이 다시 시작된다는 믿음이 있었던 것입니다.

9대 고국천왕과 10대 산상왕의 부인이었던 우 씨 왕후는 죽기 직전 유언을 통해 자신을 산상왕릉에 묻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무당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고국천왕이 내게 강림하여 말하기를 우 씨가 산상왕의 무덤에 묻힌 것을 보고 내가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 하겠으니, 네가 조정에 고하여 무슨 물건으로 나를 가리어 달라고 해라.”

죽은 고국천왕이 질투하는 모습은 산 사람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죽어도 현재의 관계가 지속된다고 여겼기 때문에 동천왕이 죽었을 때 사람들이 따라 죽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고구려 사람들이 돌아가신 왕을 부를 때 사용한 ‘고국천왕’ㆍ‘산상왕’ 등에서 ‘고국천’ㆍ‘산상’ 등은 왕이 묻혀있는 장소의 이름입니다. 즉, 어느 곳에 묻혀 있는 왕이라고 임금의 호칭을 그대로 사용한 것입니다. 그곳에 아직도 임금의 영혼이 살아 있다고 믿었던 것이지요.

죽은 자가 머무는 공간이 무덤인 만큼, 잘 만들고, 잘 지켜야 합니다. ‘광개토대왕릉비문’은 흔히 광개토대왕의 업적이 쓰여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비문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것은 무덤을 지키는 수묘인에 대한 규정입니다. 무려 330여 가구가 수묘인으로 차출되어 광개토대왕의 무덤을 관리하도록 법으로 정해졌었습니다. 국상이었던 명립답부의 무덤을 관리하는 수묘인도 20 가구나 되享윱求? 광개토대왕은 자신의 무덤이 만 년 후에도 잘 보존되기를 바랐습니다.

후손들 역시 무덤을 찾아가서 제사를 지내고 조상오黴킵湧?돌봐 주기를 기원했습니다. 무덤이 이렇게 신성한 공간이었기에 화려하게 치장을 하기도 했던 것입니다. 고구려의 아름다운 고분 벽화는 이러한 믿음과 생활 습관 때문에 만들어진 것이랍니다. 지금은 고구려 시대처럼 거대한 무덤을 만드는 것은 곤란하답니다.

전 국토가 다 무덤으로 사용되면 살아 있는 사람이 살 수 있는 공간이 부족해지니까요. 고구려가 국내성에서 평양으로 層돋?옮긴 이유의 하나도 너무나 많은 무덤 때문에 산 사람이 살 공간이 부족했기 때문이랍니다. 조상이 돌아가신 후에 화려하게 무덤을 만드는 것보다는 오늘 당장 아버지, 어머니, 할아버지, 할머니께 효도하는 것이 더 소중하겠지요.


왕궁서 피신해 소금 장수를 했던 제 15대 미천왕
고생했던 경험 밑거름 삼아 영토 넓히고 국력 크게 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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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인의 삶의 자취가 물씬 풍겨 나오는 압록강의 모습.
당시 을불도 이 강을 오르내리며 소금 장수를 했었다.
 

▲ 왕 가운데는 의심쟁이 유독 많아

어린이 여러분은 한 나라의 왕이라면 어릴 적부터 궁궐에서 여러 사람들의 보살핌을 받으며 행복하게 성장했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요. 그런데, 고구려 15대 미천왕은 놀랍게도 소금 장수를 했었답니다. 대체 어찌 된 일이었을까요?

서기 248년 12대 중천왕 때는 동생인 예물과 사구가 반란을 시도하다가 죽임을 당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286년에도 13대 서천왕의 동생인 일우와 소발이 반란을 계획하다가 죽음을 당했습니다. 오직 한 명만이 가질 수 있는 왕의 자리는 누구에게나 탐이 나는 자리였지요. 그래서 왕들 가운데는 남을 믿지 못 하는 의심쟁이가 유독 많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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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도 황주군 석정리에서 출토된 벽돌. 고구려 서민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특히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일을 지켜 본 14대 봉상왕은 의심이 많았습니다. 봉상왕은 달가를 의심하여 그를 죽였습니다. 그는 숙신족(말갈족)을 정벌한 공이 있어서 백성들의 존경을 받고 있는 자신의 작은아버지였습니다. 봉상왕은 또 아우인 돌고도 왕위를 넘본다고 의심하여 죽였습니다. 돌고의 아들인 을불은 큰아버지인 봉상왕이 언제 자신을 의심할지 몰라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는 왕궁에서 몰래 도망쳐야 했습니다. 을불은 처음에는 음모라는 사람의 집에 가서 일을 해 주면서 살아야 했습니다. 음모는 그가 왕자인 줄도 모르고 아주 힘든 일을 시켰습니다.

▲ 왕궁서 몰래 도망쳐 머슴살이

그 집 곁에 있는 연못에서 개구리가 요란하게 울자, 음모는 을불로 하여금 밤에 기와와 돌을 연못에 던져 개구리가 울지 못 하게 하도록 시켰습니다. 또 낮에는 땔감용 나무를 베어 오도록 시켜서 잠시도 쉬지 못 하게 했습니다. 자기 재산이 없어서 남에게 의지하며 살아야 하는 을불의 신세는 개인적인 자유가 전혀 없는 노예와 별 차이가 없었습니다. 결국 을불은 고생을 이기지 못 하고 일 년 만에 그 집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을불은 이번에는 재모란 사람과 함께 소금을 팔러 다녔습니다. 어느 날 배를 타고 압록강에 가서 소금을 가지고 내려와 강의 동쪽 사수촌 사람의 집에 머물렀습니다. 그 집의 노파는 숙박비로 소금을 요구했고, 을불은 한 말 가량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노파는 다시 소금을 더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하지만 을불은 거절하고 말았습니다. 그러자 노파는 화가 나서 을불 몰래 자신의 신발을 소금 속에 넣어 두었습니다.

을불은 이런 일을 전혀 모르고 길을 나섰다가, 쫓아온 노파에 의해 도둑으로 몰렸습니다. 노파는 압록 태수에게 고소했고, 소금 속에서 신발이 나오자 을불은 벌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신발값으로 소금을 내놓고, 몽둥이로 매를 맞은 후에야 풀려 나올 수 있었습니다. 벌을 받은 신세여서 을불은 제대로 일자리를 얻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또 제대로 먹지도 못해 얼굴이 야위고, 옷도 다 해져서 누구도 그가 왕자였음을 알지 못할 지경이었습니다.

한편 봉상왕은 백성들을 삶을 돌보지 않고, 마구 부려먹었습니다. 특히 300년에는 2월부터 7월까지 비가 오지 않아 큰 흉년이 들었습니다. 백성들은 먹을 것이 없어서 서로를 잡아먹을 정도였습니다. 이렇게 백성들이 어려움에 처했는데도, 봉상왕은 8월부터 나라에 15 세 이상의 남녀들로 하여금 궁궐을 수리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굶주린 백성들은 나라에서 강제로 일까지 시키자 고통을 참지 못 하고, 고향을 떠나 이리저리 떠돌 수밖에 없었니#?p> 백성들의 고통을 보다 못한 국상 창조리는 왕에게 간청하여 궁궐을 수리하는 일을 중지하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하지만 봉상왕은 궁궐이 웅장하고 화려하지 않으면 나라의 권위를 내보일 수가 없다며 거절했습니다. 또한 창조리가 백성에게 인기를 얻으려고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이라며, 그를 의심했습니다.

▲ 왕위에 오른 뒤에는 백성 돌봐

이처럼 봉상왕은 스스로 왕으로서 자신감이 부족했기 때문에, 왕위를 넘볼 형제와 친척들을 죽였고, 궁궐 등 보이는 것만을 화려하게 만들어 과시하려는 삐뚤어진 사람이었습니다. 창조리는 왕이 잘못을 고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여러 신하들과 의논하여 봉상왕을 왕위에서 몰아 냈습니다. 그리고 사람을 시켜 을불을 찾아 냈고 그로 하여금 왕위에 오르게 했습니다. 그가 바로 미천왕입니다.

왕위에 오른 미천왕은 백성들을 잘 살게 하는 일은 좋은 농토에서 마음 편히 농사를 지으며 일할 수 있게 해 주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넓은 농경지를 개척하기 위해 주변의 낙랑군과 대방군 등을 몰아 내고, 요하 유역으로 영토를 넓히려는 노력을 하였습니다. 물론 미천왕 이후에는 왕의 형제들 간에 왕위를 놓고 싸우는 일도 없어졌습니다. 그가 고생했던 경험은 이처럼 그를 좋은 왕이 되도록 이끌었던 것입니다.  


고구려는 전쟁에서 항상 승리만 했을까?
고국원왕의 잇단 패배와 죽음 강대국으로 거듭나는 발판돼

전연, 342년 고구려 공격

우리는 고구려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 승리 혹은 놀랍거나 아름다운 것을 듣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패배하고, 괴로웠던 이야기도 귀담아 들어 봐야 합니다. 강대국 고구려도 언제나 승리만 한 것은 아니었으니까요.

미천왕이 왕위에 오른 300년 무렵 고구려는 요동 지역의 지배권을 놓고 전연과 자주 전쟁을 해야 했습니다. 전연은 모용선비족이 세운 나라로, 고구려 서쪽인 요서 지역을 중심으로 크게 발전한 나라입니다. 특히 전연의 왕 모용황은 대단히 야심만만한 인물로, 고구려를 이겨 보려고 무던히 애를 썼습니다. 마침내 342년 전연의 대군이 고구려를 공격해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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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한 모용선비족 전사의 사냥 모습. 고구려는 3~4세기 모용선비족과 치열한 경쟁을 했다. 5세기 초 광개토대왕 등장 이후 비로소 고구려는 이들을 굴복시킬 수 있게 된다.

▲ 고구려의 쓰라린 패배, 복수 기회 엿봐

이 때 미천왕의 아들인 고국원왕은 전연의 군대가 공격해 올 두 가지 길 가운데 넓고 평탄한 북쪽 길을 방어하기 위해 정예 병사 5만을 보냈습니다. 그리고 자신은 약한 병사들을 거느리고 좁고 험한 남쪽 길을 방어했습니다. 그런데 북쪽길로 공격해 온 전연의 군대는 1만 5000 명에 불과했고, 도리어 남쪽길로 모용황이 이끄는 정예 병사 4만 명이 쳐들어왔습니다. 북쪽길에서는 고구려 군대가 전연 군대를 전멸시켰지만, 남쪽길에서는 고구려 군이 크게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고국원왕은 전투에서 패배하자, 후퇴를 하여 다시 군대를 모았습니다. 그 사이 전연의 군대는 빠르게 고구려 수도인 환도성에 들어와서 노략질을 했습니다. 모용황은 북쪽길에서 전연의 군대를 물리친 고구려의 정예 병사들이 곧 공격해 올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또 전쟁이 길어지면 자신들에게 불리할 것이라고 판단했지요. 모용황은 서둘러 미천왕의 시신을 파헤쳐 가져가고, 고국원왕의 어머니인 주태후와 포로 5만 명을 잡아갔습니다.

전연에 비해 군사력에서 뒤진 것도 아니었지만, 작전을 잘못 세운 탓에 고구려는 큰 수모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고국원왕은 미천왕의 시신과 주태후를 되돌려 받기 위해 진귀한 물건을 바치며 이들에게 복종해야 했습니다. 반면 전연은 고구려를 굴복시킨 후, 서쪽으로 진출하여 황하 하류를 차지하는 대국으로 성장하게 되었습니다. 고구려는 어쩔 수 없이 전연의 발전을 지켜 보아야 했습니다. 고국원왕은 355년 주태후를 되돌려 받은 후에는 전연과의 관계를 끊고, 복수할 기회만을 엿보고 있었습니다.

▲ 백제에 잇따른 공격, 고국원왕의 죽음

한편, 고국원왕은 369년 영토를 넓히기 위해 남쪽의 백제를 공격했습니다. 당시 백제는 뛰어난 왕인 근초고왕과 그 아들 근구수 태자가 다스리고 있었습니다. 고구려의 보병과 기병 2만 명이 황해도 지역인 치양에 도착하여 백제의 민가에서 식량을 얻으려고 움직이고 있을 때였습니다.

근구수 태자가 이끈 백제군이 불시에 공격을 해 왔습니다. 기습을 당한 고구려 군은 5000 명이나 죽는 패배를 당하고 말았습니다. 2 년 후 고구려는 다시 군사를 내어 백제를 공격했습니다. 하지만 백제군이 패하 강가에서 복병을 배치하고 있다가 갑작스레 공격해 오는 바람에 또다시 패배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그 해 겨울 백제 근초고왕과 근구수 태자가 이끄는 3만의 군대가 평양성을 공격해 왔습니다.

당시 60 세가 넘은 고국원왕이었지만, 용감하게 군사들을 독려하며 백제군과 맞섰습니다. 그런데 고국원왕은 백제군이 쏜 화살에 맞아 죽고 말았습니다. 고구려 역사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왕이 적과 싸워 죽는 일이 생겼습니다. 백제에게 패배한 것은 고구려인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왜냐 하면 백제를 건국한 소서노와 온조가 추모왕의 부인과 아들이었기에 서로 같은 뿌리에서 나왔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동생의 나라로 여겼던 백제에게 당했으니, 고구려 泳宕湧?질투심은 클 수밖에 없었습니다.

▲ 쓰라린 패배가 강대국으로의 길 터

고국원왕의 거듭된 패배는 고구려 역사에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일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성공이 아니라, 너무도 쓰라린 패배를 당했기 때문에 이를 극복하기 위해 고구려는 일대 변화의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습니다. 고국원왕의 두 아들인 소수림왕과 고국양왕은 고구려를 대대적으로 정비하며 새로운 준비를 합니다. 두 왕이 노력한 끝에 고구려는 크게 변신을 하게 되고, 이후 광개토대왕 시기에는 전성기를 맞게 됩니다.

만약 성공만 하고 실패가 없다면 사람들은 과거 그대로의 습관을 따라 하며 아무런 변화도 없이 그저 그렇게 살아가기가 쉽습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좌절할 수도 있습니다. 실패를 어떻게 극복하느냐에 따라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가 되기도 합니다. 즉, 실패를 거울삼아 새롭게 변신할 때 새로운 미래가 열리는 것이지요. 고구려도 마찬가지로 고국원왕의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서게 됩니다. 고구려의 진정한 힘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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