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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에 대해 알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될까요? 부모님의 어린 시절 이야기는 할머님께서 이야기해 주시면 알 수 있지만, 1000 년도 넘게 지난 고구려 시대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직접 이야기해 줄 수는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책이나 방송 프로그램을 보면 알 수 있다고요? 또 신문 기사를 읽으면 알 수 있다고요?
▲서울과 구리시 사이의 아차산에는 고구려 군사 유적지가 많이 발견되고 있다. 연천 호로
고루 유적과 서울 구이동 군사 유적지 등 남한 내에도 고구려 유적이 많이 분포하고 있다.
◆ 고구려 고분 벽화
그럼, 고구려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분들은 어떻게 그 먼 옛날의 일들을 시시콜콜 알 수 있는 것일까요? 아주 오래 전에 있었던 나라일지라도, 그 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이 남긴 물건, 또는 그 시대 이야기를 가까이서 듣고 적은 기록들을 찾아 연구함으로써 그 시대의 모습을 알아 낼 수 있습니다. 고구려의 경우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직접 그린 고분 벽화가 남아 있습니다. 고분 벽화는 고구려인의 생활 모습이나 신앙은 물론, 죽은 후의 세계를 어떻게 생각했는지까지도 알려 줍니다. 고분 벽화를 보는 것만으로도 고구려 시대의 모습을 생생히 알 수가 있다는 뜻입니다.
그림은 대개 1000 년의 세월이 지나면 본 모습을 간직하기 어렵지만, 다행히도 고구려 사람들이 그린 고분 벽화의 상당수는 지금까지도 옛 모습 그대로 우리에게 고구려 이야기를 들려 주고 있답니다. 최근 북한과 중국이 세계 문화 유산으로 고구려 고분 벽화를 신청한 것은 그만큼 고분 벽화의 가치가 크기 때문입니다. 전문 연구자들은 고분 벽화를 통해 고구려 사람들이 어떻게 생겼고, 무엇을 입었고, 또 어떤 믿음을 가졌는지 등을 연구한답니다. 하지만 벽화는 그림일 뿐이어서 각 시대별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자세히 알 수는 없습니다.
◆ 역사책과 유물
그럴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삼국사기'라는 책입니다. 이 책은 고구려가 멸망한 지 500 년쯤 후 고려 시대 김부식이란 분이 전래의 자료와 외국의 자료를 취합해서 만든 역사책입니다. 고구려에 관해서 가장 체계적으로 설명되어 있지만, 그 양이 많지 않아 고구려 역사 전체를 알기는 어렵답니다.
고구려 시대 사람들이 쓴 역사책으로는 '신집'과 '유기'가 있었습니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금은 전해지지 않습니다. 대신 고구려를 지켜 본 당나라, 혹은 일본 등에서 기록한 책들이 남아 있어 고구려의 모습을 살펴볼 수가 있답니다. 책은 아니지만 고구려 사람들이 만든 성벽이나, 그릇, 기와, 무덤과 무덤 속에 넣어 둔 각종 물건, 글자가 새겨진 비석 등도 고구려를 아는 데 도움이 된답니다.
고고 학자란 땅 속에 묻혀 있던 이런 자료들을 발굴해 옛 시대의 모습을 찾아 내는 사람들이랍니다. 또 민속 학자들은 우리들의 생활 풍습 가운데 과거부터 전해 오는 풍습을 연구해 옛 시대를 되찾습니다. 언어 학자들은 언어를 통해 이 같은 일을 하지요.
▲시루봉 유적지 발굴 현장. 서울 광진구 광장동 아차산 줄기에 있는 시루봉에서 발견된 고구려 군사 유적嗤?발굴하는 현장.
◆ 가까운 곳에 있는 고구려 유적들
고구려인이 남긴 유물이나 기록을 눈으로 확인해 보려면 박물관이나 도서관, 혹은 서점에 가면 됩니다. 직접 역사의 현장에서 살펴볼 수도 있고요. 고구려를 가장 잘 느낄 수 있는 곳은 물론 고구려의 수도가 위치했던 중국의 환인 시나 집안 현 등입니다. 이 지역에는 장군총이나 광개토대왕릉비가 있지요. 북한의 평양시 등을 방문하여 대본瑗별?장안성, 강서대묘, 안학3호분 등을 직접 볼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그런 기회를 얻기도 힘든 데다, 비용도 많이 듭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남한 땅에도 고구려 유적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나요? 특히 서울 동부 지역과 구리시 사이에 있는 아차산에는 고구려 군사 기지가 무려 15 개나 있었답니다. 또 임진강변에도 호로고루 성벽 등 고구려 유적지가 아주 많습니다.
충주에 가면 장수왕 시대에 만든 중원고구려비가 있고, 울산에는 고구려인의 무덤인 적석총이 있지요. 경주를 비롯한 여러 지방에도 고구려 유적과 유물이 있습니다. 긴 역사와 넓은 영토를 지녔던 나라였던 만큼 고구려와 관련된 유적과 유물은 한반도 전역에서 찾아 볼 수 있답니다.
옛 역사는 박물관이나 도서관에서만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말과 습관, 그리고 길가에 떨어진 작은 토기 조각, 돌덩이에서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이 땅에 줄곧 살아 왔던 조상들이 그 흔적을 남겼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21세기도 언젠가는 역사가 되어 먼 후손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로 전해질 것입니다. 그 이야기 속에 여러분은 어떤 인물로 등장할까 상상해 보는 것도 즐겁지 않을까요?
고구려는 어떻게 건국되었을까?
천하를 호령했던 강대국 고구려는 어떻게 탄생했을까요? 처음부터 크고 강대한 모습으로 멋지게 출발했을까요? 아니랍니다. 대부분의 나라가 그러하듯이 고구려도 처음에는 아주 작은 나라에서 출발했답니다. 오늘은 고구려 건국에 대해 알아 봅니다.
▲오녀산성의 성벽. 2000 년의 숨결이 살아 있는 고구려 초기의 성벽이다.
고구려 건국 이야기는 이규보의 ‘동명왕편’이란 글에 재미있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미 알고 있는 사람도 많을 것입니다만, 한번 들어 볼까요? 천신의 아들인 해모수가 땅에 내려와 부여의 왕이 되었는데, 어느 날 웅심연 물가에서 하백의 딸 유화와 만나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해모수는 유화를 버리고 떠나고 말았습니다. 결국 유화는 아버지에게도 버림받게 되었습니다. 그 후 유화는 동부여 금와왕을 만나게 되었는데, 금와왕은 그녀를 궁궐로 데려와 살게 했습니다. 그 곳에서 유화는 햇빛을 받아 임신을 한 후 커다란 알을 낳았습니다. 그 알을 깨고 태어난 사람이 바로 주몽입니다.
주몽은 어릴 적부터 활을 잘 쏘고 힘도 센 데다 세상을 보는 눈이 뛰어난 인재였지만, 동부여에서는 자신의 뜻을 펼칠 수가 없었습니다. 도리어 금와왕의 자식들에게 질투를 받아 마구간 지기를 해야만 했습니다. 주몽은 희망 없는 현실에 안주하기를 거부하고 동부여를 떠나 미지의 세계를 찾아 길을 나서는 용기를 보여 줍니다. 그것이 곧 고구려 건국의 시작이 됩니다. 이 이야기는 고구려인이 직접 쓴 ‘광개토대왕 비문’에도 간략히 나온답니다. 다만 고구려를 건국한 분의 이름을 추모(鄒牟)왕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몽은 활을 잘 쏜다는 뜻의 별명이랍니다.
추모왕의 건국 이야기는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신화적인 이야기가 담겨 있기도 합니다. 추모왕이 남으로 내려오다 엄리대수를 건널 때에 나룻가에서 “나는 천제(天帝)의 아들이며, 하백의 따님을 어머니로 한 추모왕이다. 나를 위하여 갈대를 연결하고 거북이 무리를 짓게 하라.”고 명하였답니다. 추모왕의 이야기가 신화처럼 기록된 것은 고구려 사람들이 추모왕을 고등신으로, 어머니 유화를 부여신으로 섬겼기 때문입니다. 추모왕은 고구려인의 사랑을 독차지한 아주 위대한 왕이었던 것이지요.
추모왕은 비류곡에 이르러서 홀본 서쪽 성산(城山) 위에 도읍을 세우고 나라이름을 고구려라고 했습니다. 현재 고구려 첫 수도는 압록강 북쪽에 있는 환인시의 오녀산성으로 보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오녀산은 해발 800 m나 되는 산으로, 산 정상에는 둘레 2 km의 넓은 평지와 연못이 있습니다. 그 곳에 궁궐로 보이는 많은 건물 터가 발견되었습니다. 추모왕이 이 곳에 도읍을 정하고 거주했다면 산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당연히 우러러 볼 수밖에 없을 만큼 오녀산 정상은 참으로 신비한 곳이랍니다. 추모왕이 처음 고구려를 세웠을 때는 아주 작은 나라에 불과했습니다. 그래서 궁궐도 초가로 이어 지을 정도로 작고 초라했습니다. 땅도 농사짓기에 적합하지 못하여 늘 가난하게 살아야 했습니다. 게다가 그 곳 사람들은 말갈부락 사람들에게 시달림을 당하고 있었습니다.
▲천혜의 요새인 오녀산성. 해발 800 m 고지에 넓은 평지와 연못이 있다.
이들을 변화시킨 사람이 추모왕입니다. 소극적이던 사람들에게 힘과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답니다. 추모왕은 자신을 천신의 자손이라고 내세우며 고구려인에게 강한 자부심을 갖도록 하는 한편, 결속력을 키워, 사람들의 시선을 바깥으로 돌리게 만들었습니다. 고구려는 변화하기 시작했습니다. 주변의 말갈, 비류국, 행인국, 북옥저 등 여러 나라들을 하나하나 굴복시켜 갔습니다. ‘동명왕편’에 비류국을 정복하는 이야기는 매우 재미있습니다. 추모왕과 비류국 송양왕이 서로 활쏘기 시합을 비롯한 여러 대결 끝에 마침내 하늘의 도움을 받아 비를 내려 굴복시켰다고 합니다.
아마도 엄청난 전쟁을 치렀고, 특히 물을 이용하여 비류국을 공격해 정복했다는 뜻이겠지요. 고구려는 빠르게 강한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옛날의 대제국인 고조선의 뒤를 이을 국가로 성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추모왕이 만일 동부여에 머물렀다면, 고구려는 탄생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용감하게 새로운 길을 개척한 탓에 우리 역사에서 멋진 고구려가 탄생하게 된 것입니다. 추모왕은 우리 나라 최초의 벤처 사업가라고 할만 하답니다.
왜 고구려인들은 활을 잘 쏘았나?
▲약수리 고분 수렵도. 사냥은 몰이꾼과 사냥꾼의 협동으로 이루어지는 작은 군사 훈련이기도 하다.
◆ 사냥은 작은 군사 훈련
고구려 사람들은 사냥하는 것을 매우 즐겼습니다. 유명한 무용총 수렵도를 비롯해, 덕흥리 고분, 장천 1호분 등의 벽화는 고구려인의 사냥 모습을 생생하게 보여 주고 있지요. 약수리 고분 벽화를 보면, 말을 타면서 활을 쏘는 사람들과 숨어서 사냥감을 몰아 주는 사람들이 각자 맡은 역할대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사냥감을 한쪽으로 몰면, 길목을 지키던 사람들이 나와서 공격하고, 뒤에서 활을 쏘며 쫓아오는 장면은 마치 적을 섬멸하는 군대의 움직임처럼 보입니다.
말을 탄 사람을 보세요. 발에 걸치는 등자도 없이 말 위에 올라탄 채 뒤로 몸을 돌려 화살을 쏘고 있습니다. 참 멋있게 보이지만, 이는 쉽게 흉내낼 수 없는 동작이에요. 아주 어린 시절부터 말 타기와 활 쏘기를 연습한 결과랍니다. 말을 탄 상태에서 자유자재로 몸을 움직이고 균형을 잡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게다가 활을 쏘려면 말 고삐를 놓아야 하므로, 말과 사람이 한 몸처럼 되어야 합니다. 말 타기는 어려서부터 최소 10 년은 훈련해야 능숙해질 수 있답니다.
활 쏘기 역시 쉽지 않답니다. 활시위에 화살을 올려 놓고 그냥 잡아 당겼다가 놓는다고 되는 것은 아니지요. 시위를 당기는 힘이 세지 않고서는 화살을 멀리 보낼 수 없습니다. 자세가 안정되어야 하고, 목표를 정확히 바라보고 흔들리지 않은 상태에서 화살을 쏘아야 제대로 맞힐 수가 있습니다. 갑자기 맹수나 적이 뛰쳐나올 때를 대비해 화살 통에서 화살을 꺼내어 재빠르게 화살을 날리려면 엄청난 훈련을 해야 합니다.
▲덕흥리 고분의 활 쏘기 경기 장면. 말을 타고 몸을 뒤로 돌려 활을 쏘는 고구려인의 모습이 잘 나타나 있다.
◆ 어려서부터 글 공부와 활 쏘기 배워
고구려 시대 학교인 경당에서는 글공부와 활 쏘기를 가르쳤습니다. 말 타기도 물론 어릴 때부터 훈련했지요. 이런 훈련을 거쳐 정말 활을 잘 쏘는 사람을 ‘주몽’이라고 불렀습니다. 고구려를 건국한 추모왕의 별명이 ‘주몽’이었던 것 기억하지요? 부여와 고구려에서 ‘주몽’이라 불리는 사람은 요즘 말로 ‘스타’였던 것입니다.
고구려에서는 매년 3월 3일 낙랑언덕에서 사냥 대회를 열었습니다. 국왕이 직접 참여하는 이 행사에는 젊은이들이 참가하여 저마다 사냥 솜씨를 뽐내었습니다. 이 날 가장 사냥을 많이 해 온 사람에게는 관직을 주고 나라의 일을 맡기기도 하였습니다. 이렇게 뽑힌 사람 가운데 가장 유명한 사람은 평강공주의 남편인 온달입니다. 온달은 가난한 평민 출신이지만, 사냥 대회에서 뛰어난 실력을 보여 임금의 사위로 인정 받았답니다.
고구려 청소년들이 말 타고 활 쏘는 것을 배우는 데 열심이었던 것은 이처럼 높은 벼슬길에 오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글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벼슬길에 올랐지요. 고구려는 학문도 매우 발달한 나라였지요. 태학박사 이문진을 비롯한 많은 학자들이 있었습니다. 고구려 사람들이 평소 사냥을 즐긴 것은 그것이 일종의 군사 훈련이 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냥감을 적군이라고 생각해 본다면 이해가 되겠지요. 고구려는 처음부터 많은 나라들과 싸워야 했기 때문에 강한 군대, 능력 있는 전사가 필요했답니다.
◆ 일반 국민들도 군사 훈련 받아
초기 전쟁에서는 ‘좌식자’라고도 불리는 전문 군사 집단이 앞장 섰습니다. 하지만 점차 위, 돌궐, 수, 당 등 큰 나라와 전쟁을 해야 했기 때문에 군사의 수가 많아야 했습니다. 따라서 전문 군인만이 아닌 일반 국민들에게도 군사 훈련을 시켰던 것입니다. 평소 활 쏘기를 잘한 사람은 전쟁이 났을 때에 즉시 뛰어난 궁병(弓兵)이 될 수 있고, 말을 잘 탄 사람들은 날랜 기병(騎兵)으로 활약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구려 시대의 국경은 지금처럼 함부로 넘어 올 수 없는 선이 아니라, 수시로 적군이나 도적들이 쳐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반대로 고구려도 부족한 식량이나 노동력, 재물 등을 얻기 위해서 초기에는 다른 나라를 수시로 공격하기도 했답니다. 전쟁을 피할 수 없다면 맞서 싸워 이기자는 것이 고구려인의 생각이었습니다.
고구려가 건국 초기의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고 주변국과 싸워 이기면서 강국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평소부터 날쌔고 용감한 군인을 길렀기 때문입니다. 고구려가 우연히, 또는 운이 좋아서, 똑똑한 지도자 몇몇 때문에 강국이 된 것은 결코 아니랍니다. 세상에 공짜란 없는 것이니까요.
국내성으로 수도를 옮긴 '유리명왕'
부여에 맞선 천연 요새서 고구려 발전 토대 마련
고구려 2대 유리명왕 때인 서기 2년,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쓰기 위해 나라에서 키우던 돼지 한 마리가 달아나는 일이 생겼습니다. ‘설지’라는 사람이 돼지를 뒤쫓아 국내 위나암이란 곳에서 겨우 잡을 수 있었습니다. 설지는 유리명왕에게 이 일을 보고하면서, 국내 위나암 지역이 수도로 적합하다고 추천을 했습니다.
▲환도산성. 최근 이 곳에서는 고구려 궁궐 유적이 발견되기도 했다
유리명왕은 다음해에 위나암성을 쌓고 국내(國內)로 수도를 옮겼습니다. 광개토대왕릉비를 비롯한 많은 유물이 남아 있는 압록강 북쪽의 집안 지역이 곧 고구려의 두 번째 수도인 국내성입니다. 그렇다면 고구려는 돼지로 인해 수도를 옮긴 셈이 됩니다. 그런데 과연 수도를 옮기는 거대한 일이 단지 도망간 돼지와 돼지를 키우는 관리의 말 때문에 진행될 수 있었을까요?
펄펄 나는 저 꾀꼬리 암수 서로 정다워라
외로워라 이 내몸은 뉘와 함께 돌아갈꼬.
황조가라 불리는 이 시는 몹시 외로운 주인공의 심정을 노래합니다. 이 시의 주인공은 놀랍게도 유리명왕이었답니다. 왕이라면 모든 것을 가질 수 있고, 많은 사람들에게 명령하며 자기 뜻대로 살아갈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기가 쉽지요. 하지만 왕이기 때문에 하지 못하는 일도 많습니다. 또 왕이기에 남보다 불행해진 경우도 많습니다.
유리명왕은 어린 시절에는 아버지가 누구인지 모른 채 살다가, 뒤늦게 아버지가 고구려 왕이 된 것을 알고 동부여에서 탈출해 온 분입니다. 그가 왕이 되자, 가장 힘들어 한 사람은 추모왕이 고구려를 건국할 때에 크게 도와 준 소서노와 그녀의 자식인 비류와 온조였습니다.
소서노는 자신의 아들들이 고구려 왕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접어야만 했습니다. 결국 소서노와 비류, 온조는 무리들을 이끌고 고구려를 떠나 남쪽으로 가서 백제를 세웠습니다. 소서노 세력이 빠져 나가자 고구려의 국력은 약화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유리명왕은 새롭게 자신을 지지하는 세력을 모아야 했습니다. 첫째 부인인 송씨 왕후가 1 년 만에 죽자, 왕은 강력한 힘을 가진 골천 출신의 화희와 한족 출신의 치희를 새로운 왕후로 맞이합니다. 유리명왕은 결혼을 통해 고구려의 힘을 모으려고 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화희와 치희 왕후가 서로 질투하며 싸우다가 끝내 치희가 화가 나서 궁궐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왕이 치희를 쫓아갔지만, 그녀를 돌아오게 하지는 못했습니다. 유리명왕은 큰 힘을 가진 화희의 세력에 의지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의 뜻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유리명왕은 이 때 황조가를 부르며 슬픔을 달래야 했을 뿐입니다.
▲집안 시 전경. 지금은 한적한 소도시지만, 과거에는 고구려의 중심지였다.
유리명왕은 주변의 선비족을 공격하여 그들을 복종시키는 등 고구려를 힘센 나라로 만들어 갔지만, 고구려는 여전히 부여에 비하면 약한 나라였습니다. 부여의 대소왕은 고구려에게 세금을 바치라고 강요하고, 태자 도절을 인질로 보내라고 요구해 왔습니다. 유리명왕은 사랑하는 자식을 인질로 보낼 수 없어 버티다가 부여의 공격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태자 도절이 20 세도 못 되어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부여국의 억압은 거세지고, 아내에 이어 자식까지 잃어버리자 유리명왕은 크게 마음이 상했습니다. 이 때 유리명왕이 선택한 것이 부여의 위협을 막아 내기도 쉽고, 국력을 키우기에도 적합한 국내성으로 도읍을 옮겨 새로운 변화를 꾀해 보자는 것이었습니다. 국내성은 산과 물이 깊고 농사짓기와 사냥과 고기잡이에도 좋아 백성들도 살기 좋고, 전쟁의 피해도 줄일 수 있는 곳입니다.
약한 나라에게는 방패 막이 되어 주는 높은 산이 둘러싸고 있고, 힘이 강해졌을 때에 주변으로 뻗어갈 수 있는 압록강을 비롯한 여러 교통로가 연결되어 있어 수도로서는 아주 좋은 조건을 갖춘 곳潔鄕熾? 돼지 사건 때문에 수도를 옮긴 것만은 아니랍니다. 고구려는 국내성을 수도로 삼아 나라를 크게 키울 수가 있었습니다.
고구려 발전의 토대를 이룬 국내성 일대의 주요 유적들은 최근 중국에 의해 세계 문화 유산으로 등록 신청이 되었답니다. 장군총, 환도산성, 춤무덤과 오회분5호묘, 태왕릉 등 고구려의 대표적 유적들을 이 곳에서 찾아 볼 수 있답니다. 하지만 국내성은 큰 나라의 수도로서는 면적이 좀 좁다는 단점이 있습니다. 그래서 장수왕은 427년 넓은 평야 지대에 위치한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습니다. 국내성은 오랫동안 고구려의 정치, 경제, 문화의 중심지로 크게 번영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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