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게시판

유홍준과 인사동

언제나 그렇듯이 많은 것 중 하나를 고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내 마음 속의 공간을 쓰기 위해 책상머리에 앉으니 주마등처럼 수많은 공간이 스쳐간다.
강진의 다산초당, 안동의 병산서원,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 일본 오사카의 동양도자미술관, 내 어린 시절을 보낸 포천 왕방골의 외가...

그 모두가 내 마음 속의 공간이고 지금 당장이라도 홀연히 떠날 여유만 있다면 며칠이고 거기에 가서 내 몸을 파묻고 싶은 어머니 품속 같은 곳이다.

그러나 그 공간들은 내가 어쩌다 찾아가서 인생의 위안을 받는 곳일 뿐 내 일상이 숨쉬는 곳이 아니다.

내 가슴 깊이 박혀 있는 사랑의 공간은 아무리 생각해도 인사동이다. 실제로 나는 인사동에서 예술과 문화를 배웠고 나의 예술적 이상을 거기에서 실천하며 살아온 미술사와 미술비평의 현장이다.

인사동은 나의 어떤 친구보다 정이 많이 들었고, 대학에서 배운 것보다 더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내가 영남대에 재직하면서도 대구로 내려가 살지 못하는 이유는 인사동이 서울에 있기 때문이다.

내가 인사동에 처음 발을 디딘 것은 1968년 대학교 2학년 때 고유섭(高裕燮)의 『한국미술문화사논총』이라는 책을 사기 위해 이곳의 통문관을 찾아왔을 때부터다. 그로부터 30여년 내 나이와 함께 인사동도 끊임없이 변해오고 있다.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인사동은 단연코 고서점과 고미술의 거리였다. 복사기의 등장으로 고서점은 사양길로 접어들어 오늘날에는 통문관.호고당.영창서점.문우서림.문고당.한국서적.관훈고서방 등 열을 꼽기 힘들지만 그 때는 고서점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었다.

표구점으로는 박당표구.낙원표구.상문당 등이 대까지 이어가며 여기에 자리잡고 있었고, 엄청난 사건과 주인의 타계로 문을 닫았지만 고옥당.금당.호고재.고정실 같은 고미술상들이 미술거리를 형성하고 있었다.

여기에 인사동을 미술거리로 만든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상업화랑의 등장이었다.

70년대 초만 해도 인사동 네거리 가까이에 문을 연 현대화랑(갤러리현대의 전신)과 항상 적자를 보면서도 현대미술만 고집하던 명동화랑 두 곳밖에 없었다. 그러다 70년대 후반으로 들어서면서 '미술붐' 과 함께 2~3년 사이에 20여 화랑이 문을 열었다.

동산방화랑.선화랑.예화랑.가람화랑.송원화랑(노화랑).국제화랑.가나화랑…. 처음엔 동양화붐으로 시작된 미술붐이 민화와 목기, 그리고 고화로 옮겨 붙으면서 고도사.공창화랑.대림화랑.삼경화랑.통인가게.한국공예 등이 자리잡았다.

나중에 학고재.예나르.장생호.민예사랑.보고사.해동화랑.나락실.문향관 등이 합류하면서 인사동은 현대미술과 고미술이 공존하는 미술거리로 품격을 높여 놓았다.

여기에 80년대 들어와서는 젊은 작가를 위한 대여공간으로 관훈미술관.그림마당민.경인미술관.백악미술관 등이 등장하면서 거리는 젊은 작가들로 새로운 활기를 찾게 됐고, 80년대 민중미술운동도 이곳 인사동에서 일어났다. 이것이 오늘날 말하는 인사동 미술거리의 주역들이다.

한편 인사동 뒷골목은 한정식의 메카라 할 정도로 많은 품위있는 밥집이 들어찼다. 지금은 없어진 '경향' 을 필두로 60년대말에는 선천집.사천집이 문을 열고, 한성식당.영희네집(주인이 바뀌었음).이모집.두레.우정.지리산 등이 생기면서 문화.예술인들의 사랑받는 곳이 됐다.

사회 규모가 작던 그 시절에는 펜클럽 모임, 미술평론가협회 총회, 앙가주망이나 목우회 같은 미술단체의 망년회가 대개 이 한정식집에서 열렸다.

뿐만 아니라 인사동에는 최고급 요정도 있어 공화당 요정정치의 상징이던 옥류정도 인사동에 있었는가 하면 반대로 실비집으로 콩밥을 아주 맛있게 해주는 부산식당이나 조미료를 안쓰는 동락다주 같은 밥집이 골목마다 즐비하니 사람들이 모여들 수밖에 없다.

90년대에 들어서면서 인사동은 미술계의 혹심한 불경기로 많은 화랑들이 속속 문을 닫았지만 인사동을 찾아오는 발길은 늘어나 이들을 맞이할 카페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사계' 와 '그리고' 는 화랑카페로 간판을 바꾸어 달았으며, 토담집.평화만들기.솟대.수희재.귀천.이화 같은 찻집과 술집에는 돈은 없어도 분위기가 있는 사람들로 항시 가득했고, 지금도 그 여운은 사라지지 않고 있다.

이렇게 지난 30년 동안 형성된 고서점.고미술상.표구점.화구와 화방.전통한지점.상업화랑.대여미술관.한정식집.실비집.찻집.카페로 인사동은 서울에서 가장 전통이 살아 있고 인간적 살내음이 있는 문화의 거리, 미술의 거리로 정착된 것이었다.

그러던 인사동에 90년대 말부터 어디서 몰려왔는지 젊은이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거리가 젊어진다고 모두들 반가워했다.

그러나 서울특별시와 종로구청이 인사동을 전통문화의 거리, 관광특구로 만들겠다고 갖은 행사를 벌이면서 거리의 질을 완전히 바꾸어 놓고 말았다.

엿장수와 호떡장수가 판을 치고 황학동 고물상에나 있던 중국.동남아의 싸구려 복제품이 좌판과 점포를 차지하고 관상쟁이들이 길목을 잡으면서 인사동은 더 이상 품위있는 문화의 거리라 할 수 없게 돼 가고 있다.

도로를 정비하면서 길바닥을 시커먼 전돌로 깔아 인간적 정취는 사라지고 작위적인 청결만 생겼다. 젊은이를 맞이하는 신생 카페는 모두 '블랙 앤드 화이트' 일색으로 문을 열고 있다.

인사동 거리는 이렇게 발디딜 틈 없이 붐비지만 전시장 관객은 오히려 줄어드는 불행한 일만 생기고 있다. 이제 화랑들은 서서히 사간동과 평창동으로 떠나고 있다. 실제로 화랑이라고 해야 몇 안남았다.

이러다가 만약에 학고재가 피자집이 되고 선화랑이 설렁탕집으로 바뀐다면 인사동은 끝이다.

뉴욕의 문화인 마을이던 그리니치 빌리지에서 화랑들이 소호로 떠난 뒤 '빌리지 보이스' 의 영광이 쇠락하고, 그렇게 형성된 소호에 보석가게.옷가게가 들어오면서 그 옛날 소호가 아니듯 인사동은 그렇게 죽어가고 있다.

디자이너 이신우는 잡상인으로 망친 '명동유감' 을 말했고, 건축가 김수근은 무교동 낙지골목이 도시계획으로 사라진 것을 아쉬워했는데, 나는 지금 땅거미 내리는 인사동을 쓸쓸히 말하고 있다.

이러다가 언젠가는 인사동은 그저 내 마음 속에만 남아 있는 공간으로 될 것이라 생각하니 좀처럼 이 글의 끝을 맺지 못하겠다.

유홍준 (미술평론가)

▶1949년 서울 출생.

▶서울대 미학과 졸업, 홍익대 미술사학 석사, 성균관대 예술철학 박사.

▶동아일보 신춘문예 미술평론 당선.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대표. 영남대 박물관장. 문화재전문위원. '2001 지역문화의 해 추진위원회' 문화예술기획 추진위원.

▶저서 : 『화인열전』『나의 문화유산답사기』『나의 북한 문화유산답사기』『한국미술사의 새로운 지평을 찾아서』

▶수상 : 금마문화예술상.간행물윤리상(제9회.저작부문)
중앙일보 [내 마음속의 공간1번지] 24·끝  
[연예오락, 기획/연재] 2001년 07월 03일 (화) 1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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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a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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