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문

포은 정몽주 선생 대책문 10곡병

* 대책문이란 과거시험의 답안지를 가리킨다. 그 내용이 시대를 넘어 오늘의 현실과 너무나 맞아떨어지기에 여기에 10곡 병풍을 제작하여 동서화합의 선구자이자 합리적이면서도 엄숙한 정치가이신 4선의원 정의화 국회의원님께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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圃隱 鄭夢周의 對策文

 

포은 정몽주(1337-92)는 고려말 三隱의 한 사람으로 왕조에 절의를 다한 인물이고, 왕조교체기에 뚜렷한 정치적 행적을 남긴 정치가이다. 그의 정치적 사상적 위상만큼 남아있는 자료는 많지 않다. 《포은집》은 소략하여 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대에 이르는 시기에 보여준 정몽주의 사상과 행동을 파악하는데 미흡하다. 정몽주 연구를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새로운 연구방법론과 함께 연구 자료의 발굴이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최근, 日本 名古屋 蓬左文庫에 있는《策文》이라는 책 속에 정몽주의 對策文이 확인되었다. 《策文》은 임진왜란 이전에 만들어진 것으로 임진왜란 중에 일본으로 유출된 것으로 보인다. 《策文》은 조선중기 무렵 과거시험 준비생이 고려말부터 조선중기까지 출제되었던 질문인 策問과 답안지인 對策을 행초서체로 정리한 글이다.

對策은 과거시험의 마지막 관문인 終場의 시험 방식으로, 당면한 현실 문제를 질문하는 策問의 답안지인데, 정몽주의 대책문에는 정몽주가 과거에 수석 합격한 해인 공민왕9년(1360)의 현안문제와 대응방법을 말해준다.

새로 발견된 《策文》은 고려말부터 조선중기까지의 策問과 對策 29종이 수록되어 있고, 고려의 것으로는 이색, 안축, 정몽주의 글이 있다. 현재 고려인의 策問은 16개, 對策은 4개가 남아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고려 과거 시험 답안지는 남아 있지 않다. 이색의 과거 시험 답안지는 《목은집》에 보이지 않는다. 안축의 글은 원나라 과거 시험의 답안지로 그의 문집인 《근재집》에 수록되어 있다. 정몽주 대책문을 통해서 고려시대 과거의 終場 對策 답안지가 처음으로 소개되는 셈이다. 이색(공민왕 2년 수석합격), 정몽주(공민왕 9년 수석합격)의 대책 답안지가 남아 있게 된 것은 조선중기 성리학자의 관심 예컨대, 조선 성리학의 연원인 節義를 실천한 두 사람에 대한 관심과 실질적으로 과거시험에 참고가 되는 수석합격자의 글이라는 점이 참작되었을 것이다.

공민왕 8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큰 위기를 겪은 고려는 홍건적이 다시 침입할 가능성을 우려하였다. 고려가 당면한 가장 큰 현안 문제는 홍건적 방비일 수밖에 없었다. 그리하여 시험관인 김득배와 한방신은 공민왕 9년 과거 시험 문제인 策問으로 홍건적 퇴치법을 제시했다. “근래 홍건적이 강을 건너 침략해 왔지만, 격퇴시킨 것은 우리 임금의 덕의 소치이지만, 피할 수 없어 武威를 본받고자 한다면, 太公望·司馬穰祀·孫賓·吳起·孔明·李靖 등의 兵書가 있는데 어떤 책이 그것을 위한 핵심 兵書이고, 어떤 술수가 義에 합치되는가”를 과거 시험 문제로 제시하였다.

이에 대하여 정몽주의 대답인 對策의 핵심 내용은 문무를 겸용한 인물을 등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무를 함께 쓰는 것은 왕이 따라야할 대법이고, 만세의 불변하는 원칙이다. 요순삼대 이래 문무를 함께 천하가 다스려졌는데, 진한수당을 거치면서 그렇게 되지 못하였고 원의 세조가 문무를 써 태평을 이루었지만 근년에 이것이 무너졌다. 태조 왕건이 문과 무를 함께 사용하여 500년간에 성대한 치세를 이루었고 공민왕도 이를 본받아 문과 무를 함께 일으켜 침입해온 홍건적을 막을 수 있었다고 하였다. 또 太公望, 司馬穰祀, 諸葛孔明, 孫賓 등은 인의로서 武를 행한 인물로 지금의 장수된 자들이 이들을 몰라서는 안된다. 兵書에 담긴 이치를 통달하는 것은 오직 사람에 달려 있으니, 오늘날의 계책은 문무를 겸비한 사람을 얻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홍건적을 방어하는 대책의 핵심에는 文武를 겸비한 사람을 등용하는데 있고, 이를 통하여 孝悌忠信의 덕과 戰術을 가르쳐 이민족을 막을 수 있다”고 하였다.

이때 문무를 겸비한 인물을 등용하라는 과거 시험 답안은 당시 약화된 국방력을 강화하기 위하여 새로운 인재선발 방법을 제시하고, 이를 통해 실력있는 무장의 선발과 이에 바탕을 둔 양반 관료제를 재정비할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정몽주의 문무 겸용에 의한 인재등용론은 유학의 인의론, 교화론이 전제된 무학 진흥을 제시하여 홍건적과 같은 이민족을 대처하는 방안을 제시한 것이었는데, 뒤에 여말의 군제개혁론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정몽주가 제출한 이 답안지는 공민왕 9년 10월 최우수 글로 뽑혀지게 되었다. 정몽주의 대책문은 공민왕 9년 무렵의 정국 상황과 공민왕대 정몽주의 현실인식과 대응론을 살펴볼 수 있고, 과거시험 대책문의 형식과 내용을 파악하여 과거제 연구를 활성화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또한 봉좌문고의《策文》처럼 일본에 있는 한국학 관련 자료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포은종보, 2009년 봄호 게재기사)

 

圃隱 鄭夢周의 對策文

問,

天下之生久矣, 一治一亂者, 無常. 自唐虞三代以降, 迄于宋遼, 歷代之迹, 布在方策, 班班可見. 夫治之所以治者, 何道? 亂之所以生者, 何事? 將時數之使然歟? 刑政之致然歟? 抑一代一世之所以爲統體者, 孰善而孰不善乎? 皇元有興, 混一區宇, 曾未百年, 一旦賊起, 至今爲梗, 其故何哉? 我國家自聖祖耕業以來, 人老止戈者, 垂五百年矣. 比及賊之渡江, 人人懷敵愾之心, 擊破達妬之降, 使西北之民, 復帖席而眠, 玆非吾君德之所致乎? 豈以是雄示天下乎? 惟小心翼翼, 誕敷文德, 必思乎至治耳. 其軼古之世, 何代歟? 且安不忘危, 治不忘亂, 爲國者, 所當審也. 爲不得而用武, 則太公望·司馬穰苴·孫賓·吳起·孔明·李靖之輩, 各有兵書焉. 何書爲之要書? 言其術, 何術合於義? 知書之要, 擇術之義, 攻守不足算矣. 諸生博問, 其於天下國家治亂統體․尙文用武之道, 究之熟而講之明矣. 若言苟而泛, 義淺而迂. 豈拘於文? 不取, 必矣.”

對,

三代以上, 文與武爲一. 三代而下, 文與武爲二. 文與武爲一, 則可以致天下之治. 文與武爲二, 則不可以致天下之治. 執事先生發策秋圍, 策之以古今治亂之迹, 繼之以太公諸子之書, 乃曰, ‘知書之要, 擇術之義, 攻守不足算矣.’ 大哉問也! 其憂國愛民之心乎! 其出將入相之機乎! 愚雖不敏, 敢不悉心以對乎?

夫文武並用者, 百王之大法, 萬世之常經. 文者, 可以持盈守成, 武者, 可以撥亂反正. 仁義禮智, 文之具也. 刑政攻守, 武之術也. 方其治也, 以文之德, 施之於陽, 以武之術, 藏之於陰. 及其亂也, 以武之術, 施之於陽, 以文之德, 行之於陰. 文而不武, 則不虞之變不可救. 武而不文, 則人心之逆不可槪. 是以文武並用而爲一, 然後可以致天下之治也. 愚請卽執事之問而明之.

夫唐虞三代之治, 仁以爲源, 禮以爲体, 遂使天下之人, 淪於肌膚, 浹於骨髓,……農桑之隙, 無不以修文講武,……文武並用, 而圖治之統體者, 可知矣. 其治之興, 不在於玆乎? 秦漢而降, 三國鼎峙, 五朝有擾, 曰隋曰唐, 以及於宋, 文武之道, 互有得失. 統體之觀, 固可監也. 漢高之寬仁, 可爲百世之統體. 然於文治, 則固未純也. 太宗之仁義, 亦可以爲百世之統體, 然顧其德, 則實有慚矣. 不能以文武爲治之統體者, 亦可知矣. 其亂之所由生者, 亦不在於玆乎? 然則統體之善者, 其惟三代文武之道乎? 或者全以治亂之由, 歸之氣數, 蓋亦不知之甚也. 洪惟皇元, 積仁積義, 崇文崇武, 混一之盛, 曠古所無, 將謂太平之治, 蓋萬世而無憂, 奈何曾未百年, 河南之賊, 起自孽芽, 一旦之禍, 幾至十年? 蓋自世祖皇帝, 武定禍亂, 列聖相承, 文致太平, 而比年以來, 上下晏然. 文治缺而不知其缺, 武備疏而不覺其疏. 一有卒然之患, 不知可救也. 悲夫!"

惟我太祖統三之初, 立法制事, 並用文武, 五百年間, 爲治之盛, 可謂軼唐虞而追三代矣. 惟我主上殿下, 因已成之業, 守禮義之法, 不謂大器之已成而思其所以危, 不謂吾民之已治而思其所以亂. 崇學識以興文敎, 設府兵以講武事, 警戒之志, 惟日不足. 比歲之賊, 以烏合之衆, 乘勝遠鬪, 所至之域, 望風奔潰. 而遂渡於鴨祿之江. 於是命將出師, 以堂堂之鎭, 磊磊之兵, 一出而一勝, 再出而再勝. 雷厲風飛, 掃蕩西北, 會朝有淸明之慶矣. 然猶不敢好大喜功、雄視天下, 使其將帥, 謹守封疆, 與一二大臣, 圖議政事, 擧賢求彦, 設科取士, 文武之效, 見於今日. 執事猶以兵術爲問, 其赤心報國之心, 隱然自見於言外矣.

夫太公望始遇於熊羆之獵, 卒爲帝王之師. 鷹揚牧野之戰, 歸馬華山之陽, 文武之德, 可謂備矣. 司馬穰苴擢自微賤, 遂爲大將, 所令之人無不從, 所遇之賊無不服, 文武之德, 亦不可謂之不備矣. 諸葛孔明, 則南陽之間, 三聘而起, 蜀漢之際, 八陣爲圖. 生生之志, 慨然有臣佐之風, 非謂文武……乎? 孫賓吳起李靖之徒, 其才智則可謂名將矣, 其文德則固有嫌矣. 夫觀其行之義, 則可知其術之善, 知其術之善, 則可以見其書之要矣. 太公之相武王、穰苴之誅莊賈、孔明之興漢室, 眞得天下之大義. 至於孫賓之應變、吳起之善戰、李靖之智謀, 爲今之將, 亦不可不知也. 然讀其書而通其變, 通其變而任其事, 只在得人而已. 爲今之計者, 誠得文武兼備之人, 廓揚文武兼用之道, 敎民以孝悌忠信之德, 習民以坐作進退之法, 而使將知其道, 兵知其律, 則可以無敵於天下矣. 愚何幸執筆草檄, 以補國家之萬一. 執事轉而上聞, 幸甚.

 

포은 정몽주의 대책문

問,

天下가 생긴 지가 오래되었다만 한번 다스려지고 한번 혼란해지는 것이 일정하지 않다. 唐虞와 三代이래 宋遼에 이르기까지 歷代의 자취가 書冊에 기록되어 있으니 분명하게 볼 수 있다. 대저 잘 다스려지는 시대에 있어 다스려지게 되는 이유는 무슨 도 때문이겠는가? 혼란한 시대에 있어 혼란이 생기게 되는 이유는 무슨 일 때문이겠는가? 時代의 運數가 그렇게 만드는 것이겠는가? 刑政이 그렇게 만드는 것이겠는가? 또한 一代一世가 統體를 갖추는 것에 있어 어느 것이 선하고 어느 것이 선하지 않겠는가? 위대한 元이 흥기하여 천하를 통일한지 백년이 채 안되었는데, 하루아침에 홍건적이 일어나 지금까지 장애가 되고 있으니 그 이유가 무엇이겠는가?

우리나라는 聖祖가 나라를 창업한 이래 전쟁이 그친지 500년이 되었다. 근래 賊(홍건적)이 강을 건너오자 모든 사람들이 적개심을 품고 達妬을 격퇴시켜 西北民들로 하여금 다시 자리를 깔고 잠들도록 하였으니 이는 우리 임금의 덕의 소치가 아니겠는가? 어찌 이것으로써 천하에 위용을 보이려는 것이겠는가? 오직 조심하고 삼가며 文德을 펼치고 반드시 至治를 이룰 것을 생각할 따름이다. 따르고자 한 시대는 어느 시대인가? 또 편안할 때는 위급할 때를 잊지 않고 다스려질 때는 혼란할 때를 잊지 않는 것은 무엇인가를 도모하려는 사람이라면 깊이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다. 피할 수 없어 武威를 본받고자 하면, 太公望·司馬穰苴·孫賓·吳起·孔明·李靖 등에게 각각 兵書가 있으니 어떤 책이 그것을 위한 핵심적인 병서인가? 술수를 말하자면 어떤 술수가 義에 합치되는가? 병서의 요체를 알고 술수의 義를 선택할 수 있다면 공격하고 방어하는 전쟁은 고민할 필요도 없다. 제생들은 널리 공부하였으니 천하 국가의 治亂과 統體, 文을 숭상하고 武를 쓰는 것 등의 도리에 관해 익히 탐구하고 밝게 강구하였을 것이다. 말이 구차하고 범연하면, 의리가 천박하고 우활하다. 어찌 문장에 구애될 것인가? 뽑히지 못할 것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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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代이전에는 文과 武가 하나였으나 三代 이후에는 文과 武가 둘로 나뉘었다. 文과 武가 하나가 되면 天下를 다스릴 수 있고, 文과 武가 둘로 나뉘면 천하를 다스릴 수 없다. 執事 先生이 과장에서 책문을 발표하면서 古今 治亂의 자취를 묻고, 이어 太公 등 諸子의 책을 거론하면서 ‘병서의 요체를 알고 술수의 義를 선택할 수 있다면 공격하고 방어하는 전쟁은 고민할 필요도 없다.’고 하셨다. 크도다 질문이여! 憂國愛民의 마음에서 나온 것이요, 나가서는 장수의 일을 행하고 들어와서는 재상의 일을 행하는 근본이로다. 내가 비록 불민하지만 감히 마음을 다하여 대답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文武를 함께 쓰는 것은 모든 왕이 따라야 할 大法이고 萬世의 불변하는 원칙이다. 文은 융성한 것을 유지하고 완성된 것을 지킬 수 있게 해주는 것이고, 武는 어지러움을 바로 잡아 바름으로 되돌아갈 수 있게 해주는 것이다. 仁義禮智는 文의 도구이고, 刑政攻守는 武의 術이다. 잘 다스려질 때에는 文의 德으로 陽에 베풀고 武의 術은 陰에 감추어 둔다. 어지러워지는 때에 이르러서는 武의 術을 陽에 베풀고 文의 德은 陰에 시행한다. 文만을 사용하고 武를 쓰지 않으면 예기치 않은 사태 당하였을 때 구해낼 수 없고, 武만을 사용하고 文을 쓰지 않으면 人心이 어긋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러므로 文과 武를 함께 써 하나로 한 연후에 천하의 다스림을 이룰 수 있다. 내가 執事의 물음을 받고 그 점을 분명히 밝히자 한다.

唐虞 三代의 정치는 仁으로서 근본을 삼고 禮로서 중심을 삼아 드디어 천하의 사람들로 하여금 몸에 젖어들고 뼈 속 스며들게 했고, …… 농사짓는 틈틈이 문무를 익히지 않음이 없었으니 …… 文武를 병용하면서 統體를 도모한 것을 알 수 있다. 다스림이 흥기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겠는가? 秦漢이래 삼국이 鼎立하여 대치하고 五朝에 소요가 있었으며, 隋와 唐을 거쳐 宋에 이르기까지 文武의 道는 서로 得失이 있었으니, 統體를 파악하는 데 있어서 정말로 거울로 삼을 만하다. 漢 高祖의 관대하고 어짐은 百世의 統體로 삼을 만하지만, 文治의 측면에서는 진실로 아직 순수하지 못했다. 太宗의 仁義 역시 百世의 統體로 삼을 만하였지만 그 덕을 돌아보면 실로 부끄러운 점이 있었다. 문과 무로 다스림의 統體로 삼지 못하였음을 알 수 있다. 혼란함이 발생한 이유가 또한 여기에 있지 않았겠는가? 그러므로 統體가 훌륭하였던 것은 오직 三代와 文武의 道일 것이다! 혹자는 치란의 이유를 온전히 氣數로 돌리는데 이 또한 정말 모르고 하는 말이다. 위대한 원나라가 인과 의를 쌓고 文과 武를 숭상하여 통일을 이룬 盛業은 옛날에도 없던 일이라 장차 太平의 至治가 만세토록 이어져 근심이 없으리라고 할 만하였다. 그런데 어찌하여 백년도 채 안되어, 河南의 홍건적이 소소한 것으로부터 일어나 잠시의 화난이 십년가까이 계속되었던가? 대개 世祖皇帝가 武를 통해 禍亂을 진정시키고 그 이후의 황제들이 서로 이어 文으로 太平을 이루었다. 근년 이래로 상하가 안일해져 文治가 무너졌어도 무너진 줄을 모르고 武備가 소홀했어도 소홀한 줄을 깨닫지 못하니 갑작스런 우환이 생기면 구원할 방도가 있을지 모르겠다. 슬프도다!

우리 太祖가 후삼국을 통일한 초기에 법제를 수립하고 정사를 정비함에 文과 武를 함께 사용하여 이후 오백년간 성대한 치세를 이루었으니 唐虞를 지나 삼대를 뒤따랐다고 할 만하다. 오직 우리 主上殿下께서는 이미 이루어놓은 업적을 기반으로 禮義之法을 지킴에, 大器가 이미 이루어졌다고 하지 않고 위태로워지는 이유를 생각하며, 우리 백성들이 이미 다스려졌다고 하지 않고 혼란이 야기되는 이유를 생각하셨다. 그러므로 學校를 숭상하여 文敎를 진흥시키고 府兵을 설치하여 武事를 강마시키면서, 경계하는 뜻이 아직 충분하지 않다고 여기셨다. 최근 도적들이 오합지졸로 승기 타고 멀리 공격해오니 이르는 곳마다 그 기세를 보고 무너져 마침내 압록강을 건너오기에 이르렀다. 이에 장수들에게 군사를 출동하도록 명하니 당당한 진영과 굳센 병사들로 한 번 나가면 한 번 승리하고 두 번 나가면 두 번 승리하였고, 우레처럼 날쌔게 몰아쳐 서북지역을 소탕하자, 조정에 청명한 경사가 있게 되었다. 그런데도 오히려 큰 것을 좋아하고 공을 기뻐하며 천하에 위용을 과시하는 따위를 하지 않고 장수들로 하여금 국경을 삼가 지키게 하였고, 대신들과 정사를 의논하는 한편, 현자를 천거시키고 선비를 구하여 과거를 통해 인재를 등용하니 문무를 병용한 효과가 오늘날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도 執事는 오히려 병술을 가지고 질문을 하시니 나라에 보답하고자 하는 순수한 마음이 은연중에 저절로 나타나는 바이다.

저 太公望은 곰을 사냥하는 사냥터에서 처음 무왕을 만나 帝王의 君師가 되었고, 牧野의 전쟁에서 용맹을 떨쳐 말들을 華山 남쪽으로 돌려보냈으니 文과 武의 德이 갖추어졌다고 할 만하다. 司馬穰苴는 미천한 출신에서 발탁되어 마침내 대장이 되어 명령을 하면 따르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만나는 적마다 복종하지 않으니 문과 무의 덕이 갖추어지지 않았다고 할 수 없다. 제갈공명은 南陽에서 세 번 부름을 받고 일어나, 蜀漢이 분립하는 때에 八陣으로 진영을 이루어 만물을 살리려는 뜻에서 신하로서 보좌하고자 하는 풍도를 분연히 가졌으니 문무의……을 이름이 아니겠는가? 孫臏, 吳起, 李靖 등의 무리는 그 재주와 지혜로 보면 名將이라고 일컬을 만하지만, 그 文德으로 보면 그렇지 못하다는 혐의가 본래부터 있었다. 그 행동이 의리에 부합함을 보면 그로써 술수가 선함을 아니, 그 술수의 선함을 안다면 그 책의 요체를 알 수 있다. 태공이 무왕을 돕고 穰苴가 莊賈를 주살하며 공명이 한의 왕실을 흥기시킨 것은 참으로 천하의 大義를 얻은 것이다. 孫臏이 변화에 대응한 것과 吳起가 전투를 잘 한 것 그리고 李靖이 지혜로운 계책을 낸 것 등은 지금의 장수된 자들이 역시 몰라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책을 읽어 변화에 통달하며, 그 변화에 통달하여 그 일을 맡기게 되는 것은 오직 사람을 얻는데 달려 있으니 오늘날의 계책으로는 진실로 문무를 겸비한 사람을 얻어 문무를 겸용하는 도리를 널리 드날리며, 효제충신의 도로 백성들을 가르치고, 앉고 일어나며 나가고 물러나는 방법으로 백성들에게 익히게 하는 한편 장수가 그 도를 알고 병사들이 군율을 알게 하면 천하에 대적할 자가 없게 될 것이다. 붓을 잡고 글을 써 만에 하나 국가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나 같은 어리석은 사람으로서 얼마나 다행이겠는가? 집사께서 임금께 전하여 말씀드려주시면 정말 다행이겠다.

(도현철교수의 <對策文을 통해본 鄭夢周의 國防 對策과 文武兼用論>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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