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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 아로새긴 한민족의 꿈
- 반구대 암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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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정 권상호
누군가 나에게 “한국의 역사가 반만년이라며? 뭘 보고 그래? 증거를 대 봐.”라고 한다면 나는 거침없이 빙긋이 웃으며 “반구대암각화(盤龜臺巖刻畵)”라고 대답할 것이다.
태초에 하늘이 열리고, 이어서 땅이 지어졌다. 계절의 순환이 이어지고, 마침내 한반도가 유라시아대륙의 동쪽 끄트머리에 자리매김하였다. 동해를 앞마당으로 하고, 일본열도를 담장으로 둘렀다. 그러고 보니 대륙을 드나드는 현관문이 바로 한반도이다. 한반도의 등줄기 태백산맥이 등지느러미를 세우면 동해에서는 아침 해가 태평양을 건너 찬란하게 떠오른다.
원래 사람이 살지 않던 이 땅에 북방에서는 먼저 깨인 자들이 매서운 칼바람을 피해 이주해 오고, 남방에서는 모험심이 강한 자들이 쿠로시오 해류를 따라 이주해 왔다. 지혜로운 자와 의지 강한 자가 서로 만나 아이 낳고 더불어 살면서 한민족이란 특별한 종족을 만들었다. 어쩌면 그 터전이 반구대 주변이었는지도 모른다. 더러는 산악 호랑이의 무서움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더러는 바다 고래 떼의 장관에 대하여 얘기한다. 반구대 암각화에는 그런 얘기들이 그려져 있다.
오래 전, 글자를 만들어 사용하기 전을 선사시대(先史時代)라 한다. 한민족에게도 물론 선사시대가 있었다. 여름이 오면 더위와 다투고 겨울이 오면 추위와 싸우며, 가족과 더불어 살 집을 짓고, 배고프면 먹을거리를 찾았다. 공동생활을 하던 그들에게도 자연히 소망이 생기고, 그 소망을 바위에 새겨놓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울산(蔚山) 대곡리(大谷里)의 태화강(太和江) 지류 천변에 새겨져 있는 반구대암각화(盤龜臺巖刻畵)이다. 반구대(盤龜臺)는 지명이요, 암각화(巖刻畵)란 바위그림을 일컫는다.
반구대암각화는 고 최경환 등의 마을사람들이 이미 물속에 그래 그림이 새겨져 있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 말을 듣고 본격적인 탐사는 1971년 12월 25일부터 1977년까지 동국대학교 문명대 교수를 중심으로 한 불교사적 조사팀에 의해 이루어졌다. 이에 대한 최초의 보도는 1972년 1월 27일자 중앙일보(中央日報)에 실렸다. 반구대암각화는 우리나라 선사시대 바위그림 연구에 획기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 귀중한 유적으로 국보 제285호로 지정되었고, 현재 울산광역시 울주군 언양읍 대곡리 산234-1에 소재해 있다.
반구대(盤龜臺)는 울산 12경의 하나로 반구산(盤龜山, 265m)의 끝자락에 기암절벽이 솟아 있는 곳을 말하는 데, 마치 호수 위에 떠있는 산의 모습이 거북이가 넙죽 엎드린 모습을 닮았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반구대는 고려 말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가 언양에 유배되었을 때 자주 찾아와 경관을 즐기며 귀양살이의 괴로움을 달랬던 곳이기도 하다. 또한, 이곳은 조선시대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 1491~1533)과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와 같은 학자들도 주변 경관을 즐기며 시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러니 반구대와 그 주변을 아끼고 사랑하는 일은 신석기 시대부터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현재 반구대암각화는 소중한 인류문화유산의 하나로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등록되어 있는 실정이다. 울산시민의 식수원인 사연댐이 지난 1965년에 축조된 이래, 반구대암각화는 46년째 댐에 물이 차면 침수되고 댐에 물이 빠지면 드러나는 등 반복된 침수 현상으로 마모와 균열 등의 훼손이 심각해지고 있다. 따라서 바위그림이 옛날엔 선명했는데 점차 흐릿해지고 있는 형편이다. 그렇다. 반구대암각화가 물에 빠진 사람처럼 무자맥질을 하고 있다. 혹여 숨이 차올라 암각화의 목숨이 다할지도 모를 일이다. 사연 많은 사연댐으로 인하여 우리만의 것이 아닌 귀중한 인류문화유산 하나가 사라질지도 모를 일이다.
반구대암각화는 강바닥보다 높은 암반 위에 새겨져 있어 원래는 물에 잠기지 않았으나 댐 건설 이후에는 물속에 잠기기 일쑤여서 가뭄 때가 아니면 볼 수 없게 되었다. 그러니 강 건너편 언덕에 설치된 망원경으로 멀리서 인상 쓰며 뜯어 볼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비록 가까이서 육안으로 제대로 살펴볼 수는 없지만, 바위 면에는 육지와 바다 동물, 사람 및 배 등의 형상이 새겨져 있고, 이해를 돕기 위해 망원경 옆에 커다란 해설 그림판이 세워져 있다.
하지만 희망은 있다. 사연댐이 식수원이라 어쩔 수 없다고 하던 울산시가 간헐적인 침수로 훼손이 빨라지고 있는 국보 제285호를 보존하기 위해 입장을 바꾼 것이다. 지난 6월 19일, 사연댐 수위를 낮추어 반구대암각화가 드러나도록 조치하겠다고 밝혔다. 사연댐 수위를 52미터로 낮추면 반구대암각화가 물속에 잠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당초 암각화 주변에다 인공 장벽을 쳐서 보존하는 방법 등이 검토됐으나 물리적으로 쉽지 않아 결국 댐의 물을 빼는 방식을 택한 것이다. 식수원 확보와 문화유산 보호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결국 식수원 일부 손실을 감수한 문화유산 보호 쪽에 손을 든 것이다. 하지만 울산은 반구대암각화 보존으로 지금까지도 고래로 유명하지만 인류 최초의 고래도시로, 인류 최초의 대륙문화와 해양문화가 만난 곳으로 그 명망을 더할 것이다.
세계문화유산 등재조건이 점점 까다로워지고 있다. 과거에는 문화유산 자체 만 보존하면 되었는데 현재는 유산을 있게 한 문화 환경까지 보존해야 한다. 더구나 지자체장의 보존 의지가 평가목록에서 가장 중요하단다. 늦었지만 울산시의 반구대암각화 보호 의지에 갈채를 보낸다. 한국인의 자긍심인 반구대 암각화가 지구인의 소중한 문화재로 거듭 나서 제 위치를 회복하는 계기가 되길 바랄 뿐이다.
반구대 암각화는 선사시대의 고래와 고래사냥 모습 등 300여점이 새겨진 바위그림이다. 이것은 한민족 반만년 역사의 증거물이다. 한국역사의 첫 장면의 그림으로, 우리 조상이 이렇게 살아 왔다는 삶의 현장을 보여 주는 한국미술의 원형이다. 여기에 나타나는 대부분의 그림들은 반만 년 전 선사유적으로서 중국, 유럽의 암각화와 조형원리가 서로 통한다. 그러기에 이는 세계문화유산의 하나임에 틀림없다.
사실 암각화의 제작 시기에 대한 설은 매우 다양했는데, 황상일, 윤순옥 부부 교수의 논문 ‘반구대암각화와 후빙기 후기 울산만의 환경변화(1995)’에 의해 6,000~5,000년 전으로 확실시되고 있다. 후빙기 바닷물이 밀려왔을 때 현재의 울산 시가지는 바다였고, 그 바닷물의 가장자리가 지금의 반구대 아랫부분이라는 것이다.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은 금년 초 부산 영도구 동삼동 패총에서 발굴한 유물을 정리하는 과정에서 두 마리의 사슴이 그려진 빗살무늬 토기 조각을 발견한 것이다. 이는 반구대암각화의 사슴 그림과 일치한다. 시대마다 유행하는 대표적 문양이 있는데, 이 토기 제작자와 반구대암각화를 새긴 사람은 동시대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토기가 묻혀있는 토층의 탄화물을 소재로 반감기를 따져 연대를 정밀 측정한 결과 기원전 3,000년 전, 곧 지금으로부터 5,000년 전이라는 사실이 나왔다. 그렇다. 반구대암각화는 반만년 역사를 안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그렇다면 반구대 암각화는 어쩌면 국내 문화재 중에서 가장 높은 가치로 평가 받아야 한다. 그리고 당시의 반구대 주변, 울산 지역은 부족의 중심임은 물론 국제적인 해양 도시였으리라.
그림과 글씨는 인간의 영혼을 담는 그릇이다. 다양한 그림과 글씨는 그릇의 모양이요, 작가의 영혼은 내용물이다. 무뚝뚝한 바위 위에 불꽃 튀는 칼질이나 평온한 화선지 위에 용트림하는 붓질, 그것은 인간들이 누릴 수 있는 가장 심원한 놀이요, 예술 활동이다.
반구대암각화에는 선사시대 우리 선조들의 영혼이 그대로 담겨져 있다. 종이가 아직 발명되기 전, 암벽이 종이를 대신하였고, 따라서 붓 대신 칼과 정으로 아로새긴 현존 최고의 그림이다.
말은 가장 기본적인 의사 전달 수단이다. 그 다음이 글과 그림이라 할 수 있다. 소리를 기록하는 녹음기와 움직임을 기록하는 동영상 녹화기의 발명은 근래의 일이다. 글과 그림은 쓰고 그리기가 말보다 어렵지만 오래 보존되는 장점이 있다. 종이 위에 쓰는 일보다 돌에의 새김질은 생명력이 강하여 더 오래 간다. 반구대암각화는 단단한 돌에 새겨져 있고, 또 사람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강 건너편의 석벽에 새겨져 있어서 다행히 지금까지 거의 오롯한 모습으로 전해지고 있다.
흔히 금석문(金石文)이라고 하면 금문(金文)과 석문(石文)을 아울러 일컫는다. 금석문의 가치는 무엇보다 당시 사람들이 직접 기록한 생생한 삶의 현장이란 것이다. 상대적으로 문헌기록은 후대에 다시 정리되기도 하여, 내용에 첨삭이 있을 수도 있다. 따라서 문헌기록은 당시 사람들의 감정이 더러는 여과되어 표현되어 있다.
반구대암각화의 캔버스는 자그마치 너비 10m, 높이 3m나 되는 ‘ㄱ’자 모양으로 꺾인 거대한 절벽암반이다. 이 넓은 바위의 표면에 대개 230여 점의 물상들이 새겨져 있고 겹쳐진 그림까지 합하면 300여 점이나 된다.
암각화는 여러 가지 내용으로 분류할 수 있지만 인물상, 동물상, 기타 배 같은 물상들로 크게 나눌 수 있다. 인물상은 탈을 쓴 가면, 물짐승을 잡는 사냥꾼, 배를 타고 고기잡이 하는 어부 등이며, 동물상은 다시 바다동물과 육지동물로 구분된다. 바다동물 그림으로는 고래, 거북, 물개, 어류 등이 있고, 육지 동물 그림으로는 사슴, 호랑이, 멧돼지, 소, 족제비, 개, 토끼, 새 등이 있다. 그리고 그물, 울타리, 탈, 사람의 모습 등으로 통하여 당시 사람들의 생활 모습을 짐작할 수 있다.
바다동물은 암벽의 왼쪽 곧, 바다를 향하여 90여 점이 그려져 있고, 육지 동물은 암벽 오른쪽 곧, 내륙을 향하여 120여
이 암각화는 바위 면을 쪼아가는 기법으로 새긴 것인데 선과 점으로 단순 소박하게 새겼지만, 생생하게 살아 움직이는 듯한 생동감과 역동감을 느낄 수 있다. 회화사적으로 보면 사실적인 자연주의 양식에서 추상주의 양식으로 옮겨가는 과도기적인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암질(岩質)은 쉐일(shale)이며 색깔은 붉은 흙 빛깔의 자색(赭色)이다.
시기적으로는 신석기 후기 내지 청동기시대의 사냥미술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이 그림은 울산지역에서 고기잡이와 사냥에 종사하던 수렵 어로인들이 풍성한 사냥과 다산을 기원해서 만든 일종의 종교적인 선사미술의 대표 작품으로 세계적인 걸작품이라 할 수 있다. 나아가 우리나라 선사문화 연구의 근간이 되는 작품이기도 하다.
반구대암각화는 선사시대 역사자료로 보존가치도 중요하지만,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다양한 방면으로 활용하는 방안도 검토해야 한다. 가까이에 있는 천전리 서석, 울산의 젖줄 태화강, 가지산, 간절곶 등과 연계하여 인문과 자연을 아우르는 관광 상품을 개발하면 프랑스의 라스코 동굴 벽화, 스페인의 알타미라 동굴 벽화처럼 세계적 명소로 거듭날 것이다. 어떤 이는 반구대암각화에 나오는 그림들을 한글 자모에 대치시켜 선사 그림으로 우리말을 표현하기도 한다. 여기의 그림들을 바탕으로 한국형 디자인의 새로운 활로를 개척할 수도 있다. 암각화는 거대한 미술 작품으로서도 훌륭하지만 무엇보다 반만 년 전의 선조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자못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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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사시대 사람들의 바람을 기원하는 마음으로 커다란 바위 등 성스러운 장소에 새긴 그림을 말한다. 전세계적으로 암각화는 북방문화권과 관련된 유적으로 우리민족의 기원과 이동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바위에는 육지동물과 바다고기, 사냥하는 장면 등 총 75종 200여 점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육지동물은 호랑이, 멧돼지, 사슴 45점 등이 묘사되어 있는데, 호랑이는 함정에 빠진 모습과 새끼를 밴 호랑이의 모습 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멧돼지는 교미하는 모습을 묘사하였고, 사슴은 새끼를 거느리거나 밴 모습 등으로 표현하였다. 바다고기는 작살 맞은 고래, 새끼를 배거나 데리고 다니는 고래의 모습 등으로 표현하였다. 사냥하는 장면은 탈을 쓴 무당, 짐승을 사냥하는 사냥꾼, 배를 타고 고래를 잡는 어부 등의 모습을 묘사하였으며, 그물이나 배의 모습도 표현하였다. 이러한 모습은 선사인들의 사냥활동이 원활하게 이루어지길 기원하며, 사냥감이 풍성해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바위에 새긴 것이다.
조각기로 쪼아 윤곽선을 만들거나 전체를 떼어낸 기법, 쪼아낸 윤곽선을 갈아내는 기법의 사용으로 보아 신석기말에서 청동기시대에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시베리아 암각화의 전통을 보여주고 있다. 선과 점을 이용하여 동물과 사냥장면을 생명력있게 표현하고 사물의 특징을 실감나게 묘사한 미술작품으로 사냥미술인 동시에 종교미술로서 선사시대 사람의 생활과 풍습을 알 수 있는 최고 걸작품으로 평가된다.
울산의 경부고속도로 근처에 자리잡고 있는 신석기 유물입니다. 울산을 관통하여 동해안으로 흘러들어가는 큰 강인 태화강 상류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 곳 반구대의 계곡은 암각화가 있는 바위절벽이 여러 곳에 있어 예로부터 경치가 좋은 곳으로 알려져 있었습니다. 경부고속도로 언양IC에서 나와 경주방향으로 20분쯤 달려가다 고속도로 방향으로 좁은길로 들어서서 10분쯤 자동차로 달려가면 반구대가 있는 계곡을 만날 수 있습니다. 한 겨울을 빼고는 암각화가 물에 잠겨 있어 별로 기대를 하지 않고 갔지만, 반구대 주변의 경치가 너무 좋고 암각화가 물에 잠긴 모습도 멋집니다.
높이 4m, 폭 8m의 암벽에 고래·사슴·호랑이·멧돼지 등 동물 모습과 활을 쏘는 사람 등 인간 모습이 무려 231점이나 새겨져 있다. 이는 어로(漁撈)와 수렵(狩獵)으로 삶을 꾸려갔던 선사시대인들이 풍요(豊饒)를 기원하며 새긴 것으로 특히 46점에 달하는 고래 그림은 많은 신비감을 자아낸다.
발견 당시 미술사가와 고고학자들은 반구대 암각화의 제작시기를 기원전 4세기 청동기시대로 추정하였다. 그러나 최근 지리학·지질학·식품영양학 등 자연과학자들은 훨씬 시대를 올려보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그 논거는 고래 그림이 단지 풍부한 식량감의 상징적 도상이 아니라 이곳이 실제로 고래잡이에 적합했던 시기가 있었다는 것이다.
선사시대 울산만의 자연환경은 바닷물이 태화강 중류까지 들어와 300m에 달하는 내만(內灣)이 형성되어 있어 지리학에서는 고울산만(古蔚山灣)으로 불린다. 울산은 예나 지금이나 고래가 자주 나타나는 곳으로 먹이를 따라, 또는 얕은 바다를 찾아 고울산만으로 들어온 고래를 수심이 더 얕은 곳으로 몰아 '좌초'시킴으로써 선사인들은 효과적으로 잡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암각화에 그려진 망보는 사람, 여러 명이 탄 배, 그물, 어책(漁柵), 작살에 찍힌 고래 등은 실제 사냥 모습을 그린 것이라는 주장이다.
그리고 부산 동삼동 패총에서는 먹고 버린 고래뼈가 상당수 발견되었음을 상기시키고 있다. 그렇게 고래잡이가 가능했던 지질학적 시기는 6000년 전부터 3000년 전 사이라고 하니 신석기시대에 해당한다. 한편 반구대 암각화는 세계 동물학회에서 고래 연구의 출발점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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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08월 08일 (일) 21:55:34 울산신문 webmaster@ulsanpress.net
울산은 천혜의 땅이다. 염천 더위를 피해 전국의 산하로 떠나고 그도 모자라 바다 건너 먼 곳으로 여행을 가는 이도 많지만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다. 주말 아침, 정자 바다로 나갔다. 동해다. 푸른 해원의 냄새가 후각을 유린한다. 옛 사람들은 바로 이 동해를 고래의 바다 즉 경해(鯨海)라고 부르기도 했다.
특히 울산은 고래바다였다. 반구대암각화가 그 증거다. 너무나 뚜렷한 증좌가 있기에 울산은 고래와 함께 시작된 인류 최초의 고래마을이라 단언해도 좋다. 바로 그 뿌리에서 울산의 정체성을 찾아야 한다.
정자 바닷가에서 해안을 타고 아래로 내려가면 만나는 바다가 주전 앞바다다. 바로 이곳에는 전국, 아니 세계 어느 곳에도 없는 고래전설이 남아 있다. 피노키오 같은 상상력의 산물이 아니다. 지금의 울산시 북구 어물동이 바로 그곳이다. 이 곳 황토전 부락에는 고래논이야기가 전해진다. 주전동 해안의 한 어부가 고기잡이 하러 나갔다가 거대한 몸집의 고래를 만나 도망치다가 뱃속으로 삼켜졌다. 어부는 죽을힘을 다해 칼로 배를 그어 뱃장을 찢어 탈출했다. 그 후 그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죽은 고래를 육지로 끌고 나오니 고래의 크기가 초가삼간 다섯 채 크기였다고 한다. 어부는 이 고래를 팔아서 논을 샀는데 이 논이 고래논이라고 한다.
초가삼간 다섯 채 크기의 고래가 넘실대던 바다. 그 바다와 반구대암각화를 연결하는 다큐멘터리가 지난 2004년 영국 BBC에 의해 소개됐다. BBC는 반구대암각화에 그려진 향유고래, 참고래, 혹등고래 등 큰 고래 46마리를 근거로 선사 인류가 고래를 잡기 위해 작살과 부구, 낚싯줄을 사용한 증거를 제시하고 있다고 소개했다. 이를 보다 심층적으로 파고 든 논문이 다니엘 로비노 박사에 의해 세계적인 인류학 잡지인 랑트로폴로지(L'Anthropologie)에 실려 있다.
반구대암각화의 문화인류사적 가치는 놀랄만하다. 규모와 위치가 그렇지만 그보다 암면에 새긴 야생동물의 개체수와 다양성이 놀랍다. 어디 그 뿐인가. 단순한 야생의 재현이 아니라 야생에 대한 인간의 도전과 효율적 이용을 유추할 수 있는 그림이 빽빽하다. 하지만 우리는 그동안 그 가치보다 수몰과 훼손의 책임에 몰두했다. 수출입국, 조국의 근대화라는 슬로건 아래 하나일 때 울산의 산하는 수몰과 훼손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몰랐으니 그 책임의 주체도 모호하다. 하지만 알고 난 뒤가 문제다. 알면서 그대로 두는 것은 고문이다. 살아 있는 생물체라면 가당치도 않은 일이지만 말없는 돌덩이라고 함부로 했다.
울산시가 고백 성사하듯 댐에 문을 달겠다고 약속했다.
세계문화유산 잠정목록에도 올랐다. 하지만 여전히 인위적 훼손이니 자맥질이니 식수확보니 하는 따위가 메아리처럼 울린다. 울림은 소신의 표현이니 그럴 수 있다. 하지만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 모든 이야기를 쟁점화하면 그야말로 중구난방이 되기 마련이다. 반구대암각화의 오늘을 이야기 할 때다. 지나간 것에 집착하거나 책임공방으로 허송할 시간이 없다. 오늘의 현장에서 내일을 이야기할 때 대안이 나온다. 바로 가치다. 그리고 지속가능한 만큼의 보존이다. 이는 반구대암각화를 살아 있는 생명체로 바라볼 때 건강한 해답이 나온다.
오래 전 반구대암각화를 연구한 연구자들은 반구대암각화가 기원전 6,00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했다. 연구자들은 이와 함께 인근 지역에서 다량의 고래 뼈를 발굴, 고래가 이 지역 주민들의 중요한 식량원이었음을 뒷받침한 바 있다. 연구자들은 또 북극의 이누이트족과 함께 반구대암각화를 그린 사람들도 그들의 삶에 있어 고래잡이는 사회 통합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그 통합의 수단이 식량이다. 선사인에게 있어 식량과 다산은 그 사회를 유지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다. 그 삶의 기록이 반구대 바위에 새겨져 있는 셈이다.
연구자들도 이와 관련한 연구 작업을 진행하고 있다. 그 결과 반구대암각화를 두고 여러 학설을 제시한다. 선사인들에게 책의 일종으로서, 짐승들에 관한 지식과 사냥방법, 분배법칙을 가르치기 위한 것(정동찬)이라는 설과, 단순하게 사냥미술의 일종으로 수렵하는 모습을 그렸다는 사람도 있다. 제의적인 종교 입문식이라는 의미(황용훈)로 생각하는 이도 있고, 번식을 기리는 마음에서 수렵 대상과 사냥 노획물을 표현했다고도 한다. 이들 가운데 가장 보편적인 학설은 반구대암각화를 재생과 풍요를 위한 종교적 제의 장소와 결과물(임장혁, 임세권)이라는 설이다.
반구대암각화 인근의 대곡천 일대는 한국 선사문화답사의 일번지다. 어쩌면 한반도에 인류가 정착해 살아갔던 첫 터전일지도 모른다. 그 무리가 바다 건너 왔다는 설과 북방에서 흘러왔다는 설이 나뉘어 있지만 그 해답도 암각화의 그림들을 풀어 가면 마술처럼 과거의 연결고리가 발견될 수 있다. 바로 그 작업이 필요하다. 물 밖으로 건져내는 문제나 암면의 훼손이 중요하지 않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물 밖으로 건지는 문제는 이미 로드맵이 나와 있다. 그대로 해나가면 된다. 훼손은 원인을 차단하고, 진행 중인 자연풍화는 인간의 영역이 아니다. 문제는 가치에 집중하고 이를 보편타당하게 전달하는 데 있다. 지구상에 하나 뿐인 우리의 보물이 얼마나 가치 있는지를 모른다면 자맥질을 방치하는 것보다 더 부끄러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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