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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종이 위의 오케스트라 - 환빛 이병도

종이 위의 오케스트라 

- 붓 지휘자 환빛 이병도(李炳道) - 

 

 권상호(문학박사, 문예평론가)

1. 서예는 시대의 초상(肖像)이다.

오늘은 미래의 과거이다. 오늘의 일들은 미래의 역사가 된다. 오늘 마무리한 글씨는 미래에는 역사 속의 서예사, 문학사가 된다. 

“오늘의 내 글씨를 두고 백 년 뒤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까? 혹여 그때까지 내 작품이 남아 있기라도 할까?”

붓을 잡고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작업을 마친 뒤에 늘 마음속으로 떠올려보는 질문이다. 먹의 가장 큰 가치는 영원성에 있다. 그래서 먹 자국을 남긴다는 것은 그만큼 조심스럽고 두려운 일이기도 하다.

 

“이 사람, 죽도록 임서(臨書)만 하다가 갔구먼.”

“뭐야, 자기 생각을 쓴 글은 하나도 없네? 협서(夾書) 머리의 ‘錄(녹)’자만 봐도 남의 글뿐이야.”

“도대체 10세기 사람이야, 20세기 사람이야? 그 붓에, 그 먹에, 그 서체라니. 다양한 폰트(font)를 살피지도 않았나?”

“알고 보니 21세기를 살다간 사람인데, 당시의 시대상이 보이지 않네.”

“그 시대에는 펜도 물감도 다양했다는데, 왜 그런 필적은 없을까?”

 

서예는 시대의 반영이자 초상이다. 

전통적으로 서예가는 시대상의 대변인으로서 당시의 문화를 붓끝으로 잘 담아내 왔다. 갑골(甲骨文)이나 석고문(石鼓文)에는 선진(先秦) 시대의 삶의 모습이 오롯이 새겨져 있고, 王羲之(왕희지)의 난정서(蘭亭序)에는 353년 저장(浙江)성 샤오싱(紹興) 난정(蘭亭)에서의 곡수유상(曲水流觴) 문화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다. 顏眞卿(안진경)이 ​758년에 쓴 제질문고(祭姪文稿)에는 안록산의 난으로 피살된 조카 안계명(顔季明)에 대한 슬픔이 묻어나고, 김정희(金正喜)가 제자처럼 아끼던 역관(譯官) 이상적(李尙迪)에게 그려준 세한도(歲寒圖)에는 1844년 유배지 제주도에서의 김정희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있다. 그렇다면, 백년 뒤의 후손들이 나의 작품을 보고 어떠한 느낌을 받을까 하고 추측해보면 정신이 번쩍 든다. 

세상은 오프라인 접촉시대(接觸時代)에서 온라인 접속시대(接續時代)로 바뀌었다. 손에 필기구를 들고 쓰는 시대에서 키보드나 키패드를 손가락으로 터치하는 시대로 바뀌었다. 그 결과 서예 가치의 두 축 중에서 실용성(實用性)은 사라지고 예술성(藝術性)만 남아있는 셈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중요한 것은 서예라는 장르의 특성상 글의 회화적 형식만큼이나 글의 내용, 곧 콘텐츠도 중요하다. 아무리 전통서예(傳統書藝)의 종말을 얘기하고, 신서예(新書藝)가 태동했다 하더라도 서예를 서예이게 하는 기저에는, 글의 내용이 서체만큼이나 중요하다는 의미가 포함된다. 물론 그 내용에는 위에 든 예에서처럼 시대정신이나 시대담론이 반영되어 있어야 함은 당연하다. 

그런데 당대 상당수의 서예가는 아직도 전통을 지켜야 글씨랍시고 글의 내용보다 고전 서체만 따라 쓰기에 급급한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따라서 가장 잘 따라 쓴 글씨가 큰 상을 받곤 하는 놀라운 일들이 벌어지곤 한다. 실력 있는 서예가란 고전이나 스승의 문자 형식의 틀에 갇힌 글 감옥의 수감자가 되어 버린 꼴이 된다. 그 결과 아쉽게도 오늘날의 서예인은 지금까지 지켜왔던 문화의 첨병(尖兵)이라는 자리를 고스란히 남에게 빼앗기고, 인습(因襲)에 묶여있는 처지가 되었다. 

이런 현실에서 서예에 대한 일반인의 관심은 당연히 멀어지고, 마침내 글씨로 먹고살기 어려운 세상이 되어버렸다. 문제는 난관에 처해 있으면서도 그 난관의 원인을 잘 파악하고 있지 못하고 있다는 데에 더 큰 문제가 있다.

이런 때에 다행스럽게도 서예의 현실적 문제점을 짚어보고, 시대정신을 잘 읽어나가는 작가를 만났으니, 바로 환빛 도반(道伴)이다. 환빛은 일찍이 트레이닝 과정인 임서(臨書) 선수 생활을,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 3도를 오가며 여조삭비(如鳥數飛)하듯 마치고, 이제 창원의 창공을 비상하기 위해 ‘변화(變化)’와 ‘창조(創造)’라는 두 날개를 펼쳤다.

그는 지금까지 여섯 번의 전시를 통하여 이미 붓길의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었다. 탄탄한 한글서예 위에 한자서예 능력까지 체득하여, 한글작품을 중심으로 한문작품을 곁들이기도 한다. 특별히 국한문(國漢文) 혼용의 가능성을 점치며 어느 정도 성공하고 있다. 그리고 도자기에 글씨를 입혀 생활서예에 접근하기도 하고, 아예 서화동원(書畫同源)이란 기치를 걸고 그림으로서의 서예라 할 수 있는 회화서예(繪畫書藝)를 펼치기도 했다. 

이번 일곱 번째의 전시는 지나온 여섯 번의 변화에 이어 또 다른 변화의 세계를 드론처럼 비상하며 새로운 탐색에 나서고 있다. 이번 전시의 가장 큰 변화라면 자신만의 새로운 조형어법을 통하여, 조심스럽지만 환빛체를 보여주기 위해 진중한 모색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사람의 육체만큼 정신도 중요하다. 이는 필체만큼 내용도 중요하다는 얘기가 된다. 따라서 환빛의 서예가 역사에 남으려면 앞으로는 글감을 정할 때, ‘나의 이야기’ ‘오늘날의 이야기’를 쓰기 위해 좀 더 고심해야 한다고 본다. 서예는 시대의 초상이므로, 21세기를 살아가는 서예가는 21세기의 시대상을 보여주는 내용을 쓸 때 역사성을 지닐 수 있다.   

 

2. 국한문 혼서를 통한 조화미

한글 창제 이후 언문일치(言文一致) 이전의 많은 언해류 기록에서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한 문체를 국어학에서 국한문혼용체(國漢文混用體)라 한다. 서예학에서는 용어의 혼선을 피하기 위해 한글과 한자를 섞어서 쓴 서체를 국한문혼서체(國漢文混書體)라 한다. 여기서는 줄여서 혼서(混書)라 부르기로 한다.

그의 전시 작품을 크게 세 부류로 나누어 보면, 한글, 한문, 혼서 등이다. 환빛은 한글에 대한 초심과 애정을 잃지 않는 작가이지만 한문 서예의 놀라운 조형어법의 매력에 푹 빠져있다. 하지만 그가 절대 놓치고 싶지 않은 분야가 혼서(混書)이고, 또 이번 전시에서도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한국 서예계는 크게 보면 한글 작가와 한문 작가로 나뉘어져 있고, 혼서 작가는 없는 셈이다. 선조들이 남겨놓은 언해류와 시조, 가사 등은 대부분 혼서로 전해지고 있다. 그런데 혼서로 쓰인 고전문학 원본을 서예작품화 하는 과정에서 한자 발음만 현대발음으로 고쳐 써서 실수하는 경우를 많이 본다. 만약 고전 문장에서 당시의 한자의 표기법을 모른다면 당연히 국한문 혼서로 써야 의미전달의 수월성은 물론 잘못을 피할 수 있다.

전시 작품 중 ‘초심(初心)’ ‘님의 침묵(沈默)’ ‘월영대(月影臺)’ ‘서보(書譜) 구’ 등이 대표적인 혼서 작품이다. 더러는 ‘정중동(靜中動)’처럼 협서(夾書)를 혼서로 쓴 경우도 있고, 한글 전문 속에 ‘덕(德)’ 자 한 자만 한자로 끼워 넣은 경우도 보인다.  

이번 전시 작품 중에서 특히 돋보이는 작품은 ‘초심(初心)’이다. 이 작품에 방점을 찍는 까닭은 남의 글이 아니라 바로 ‘자신의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는 토민 선생 개인전에 다천 선생과 함께 구경하고 돌아온 스토리텔링이 들어있다. 그리고 세상이 다 아는 작가에 대한 조심스런 비평과 함께, 자신의 롤 모델이 평보(平步) 선생임을 밝히고 있다. 후대에 이 작품을 보더라도, 여기에는 작가의 창작 의지와 창작 방향에 대한 진솔한 생각이 담겨있고, 또 학서(學書)의 방향을 밝히는 등, 그 역사성이 다분히 배어 있다고 볼 수 있는 훌륭한 작품이다.

‘좋은 생각은 가슴에 넉넉한 밭을 가는 길이요, 좋은 행동은 세상에 아름다운 씨를 뿌리는 일이다.’ 이 경구는 아마 작가가 지은 글로 보이는데, 역시 바람직한 경향이다.

많은 서예가에게 회자되는 ‘님의 침묵(沈默)’은 혼서의 가능성 및 여러 서체의 조화를 통하여 새로운 조형어법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그리고 ‘서보 구’는 서보처럼 화려한 초서풍의 혼서로 딱딱한 서론임에도 불구하고 음악처럼 들려온다.

순 한글 작품 ‘ᄠᅳ디 이루어시ᄂᆞᆯ’은 파필이 주는 기백과 질긴 획 맛, 장법에 있어 변화 속에 통일을 추구한 점이 돋보인다. 

그리고 ‘즐기는 사람’의 경우, 분위기로 봐서는 자유분방한 가운데 질서가 있는 자연미가 주는 노장풍(老莊風)의 글씨인데, 주제어와 본문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쓴다면 더욱 가독성을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또 잘 아는 내용이지만 출전이 <논어>임을 밝혀 주는 게 좋다고 본다. 유지나의 노랫말로 보이는 ‘가다보면’의 경우도, 병풍 이미지의 장법 변화가 살갑게 다가오지만 비교적 알려진 내용이라도 본인이 지은 내용이 아니면 작사자를 밝히는 것이 예의라고 생각한다. ‘기쁨’은 주제어의 지나친 부각으로 좋은 내용의 본문이 주제어에 눌리는 감이 있다. 

 

3. 필체는 서예학습의 이력서

시대마다의 서체(書體)에는 시대상이 나타나고, 개인의 생체 리듬이 들어있는 필체(筆體)에는 서예 학습의 이력이 나타난다. 그리고 서사 내용을 통해서는 작가의 사고와 철학을 엿볼 수 있다. 

환빛의 작품 전반에 어리는 서예학습 이력을 보면 그는 아무래도 한글 편에 선다. 그는 한글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깊이 깨닫고 한글 고유의 예술성을 찾아 꾸준히 연구해 온 작가임에 틀림없다. 한글에 나타난 그의 근육을 더듬어 보면 그의 심미적 촉수는 일탈(逸脫)의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있다. 사실, 한글 획처럼 양보하고 배려하는 질서는 아름답다. 그리고 그 질서를 위해서는 일정한 규제가 있는데, 서예에서는 이 아름다운 구속을 서법(書法)이라 한다. 서법은 규제가 아니라 붓길의 새로운 질서를 위한 교통신호등이라 할 수 있다.

기실 환빛이 지금까지 발표해 온 작품을 살펴보면 서예사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서체를 익힌 것으로 보인다. 그럼에도 전반적으로 무거우면서도 밝게 다가오는 그만의 필체 비밀은 아마 광개토대왕비(廣開土大王碑) 서체에서 온 듯하다. 그가 쓴 한글 진흘림과 한문 초서까지도 광비(廣碑)가 주는 획맛이 배어 있다. 광비는 투박한 듯 순수하고, 무거운 듯 어둡지 않으며, 반듯한 듯 비정형의 고예(古隷) 풍의 미감이 스며있다. 

환빛 서예의 획질(劃質)은 곡획과 직획의 조화, 전(轉)과 절(折)의 조화를 이루어 황홀한 울림으로 다가온다. 곡(曲)만 있으면 직(直)이 직답지 못하고, 직만 있으면 곡이 곡답지 못하다. 

달리 말하자면 환빛은 클래식으로서의 규범 서법을 해체하고, 상황 속의 즉흥적(卽興的) 붓 연주를 통한 재즈서예를 선보이고 있다. 여기에서 필연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오랜 붓 연주를 통한 붓과의 친숙성이다. 그리고 이것은 오랜 학서(學書)와 수련(修鍊)의 결과이겠지만 타고난 감각과 재능이 요구된다. 이 모든 것이 갖추어질 때, 비로소 다양한 붓 연주는 물론 그때그때 다가오는 화선지와의 갈등을 붓질 애드리브(ad lib)로 해소할 수 있다.

 

4. 역설의 미학과 해학적 조형어법

 만해 시 ‘님의 침묵(沈默)’이란 작품에서 보면, ‘침묵’이라는 주제와는 정반대로 필획(筆劃)에서는 고함치는 소리가 들린다. 이것은 침묵이 가장 큰 소리라는 역설적 표현이다. 국한문 혼서에다 훈민정음 언해본체와 해례본체는 물론 궁체 흘림까지 섞어 씀으로써 오케스트라 연주를 듣는 듯한 살가운 작품이다.

작품 ‘정중동(靜中動)’에도 역설적 표현이 내재하고 있다. 내용의 기조는 ‘정(靜)’이지만 작가는 역동적인 전절(轉折) 필법을 통하여 ‘동(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또 단순한 먹빛을 지양하고 오색(五色)을 가미함으로써 일반적인 서예 작품에 반기를 들고 있다. 

환빛의 조형어법은 해학적(諧謔的)이고도 발칙하기 그지없다. ‘花(화)’ ‘通(통)’ 등의 일자서(一字書)와 ‘革新(혁신)’ ‘變化(변화)’ 등의 이자서(二字書)가 특히 그렇다. 여기에서는 글자마다 의(義)에 따라 형(形)을 추구한 점이 보이고, 특히 한 글자 안에서도 서로 다른 서체의 변주(變奏)가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그리고 여기에서는 회화로 치면 크로키에 가깝고 여흥으로 치면 마술(魔術)을 부르는 듯하다. 筆力(필력)이 자법(字法)을 덮고 있음도 재미있게 다가온다.

 

5. 문화 트렌드를 잘 읽어내는 작가

현실 인식이 없는 작가의 작품은 아무리 낙서(樂書)하더라고 낙서(落書)에 지나지 않는다. 작가는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문화 트렌드를 잘 읽으며 창작할 때, 존재 이유가 있다. 

환빛의 작가 이력을 살펴보면, 열정은 강도가 아니라 초심의 지속성(持續性)이라 생각된다. 이제는 삶의 행복을 위해서라도 소소한 일상에서 공감(共感)과 감동(感動)을 주는 ‘나의 글감’을 찾기 바란다. 환빛의 붓질을 통한 여운이 지구촌의 많은 사람들의 가슴에 전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는 산업화, 민주화를 거쳐 소위 밀레니얼 세대로 살고 있다. 단군 이래 가장 스펙 쌓기에 골똘하면서도 자기 정체성을 찾지 못한 불안한 세대로 살고 있다. 서예를 공부하는 사람들도 그 많은 공모전을 통하여 엄청난 스펙을 쌓아왔지만 사회로부터 반듯한 대접을 받지 못하고, 금전상의 궁핍을 자락(自樂)이라는 반어(反語)로 포장하며 살아왔다. 

이런 상황에서 전통 서예 장르를 거부하고 새로 나타난 장르가 ‘캘리그라피(calligraphy)’이다. 캘리그라피는 전통서예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디자인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전통 서예의 불통(不通)에서 오는 고통(苦痛)은 사라졌지만, 서예 형식의 커다란 요소라 할 수 있는 붓맛과는 거리가 멀다. 다행히 환빛은 전통서예의 바탕 위에 붓맛이 살아있는 캘리의 옷도 잘 입고 나타난 작가이다. 한국 캘리그라피 창작협회라는 새로운 무대에서 그를 만난 것이 필자와의 인연이 되었다.

적어도 환빛은 전통서법의 무대 위에서 참신한 캘리 패션의 옷을 걸치고 붓 연주를 하는 사람이다. 수많은 글자들이 그의 붓끝에서 소리를 낸다. 그는 종이 위의 오케스트라 연주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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