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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서예의 멋 - 노원문화(2호)

서예의 멋

도정 권상호

그대, 칠흑같이 캄캄한 시골 방에서 봉창 틈을 비집고 내리꽂히는 달빛의 산뜻함을 기억하는가? 그리고 어느 늦가을 아침, 잠에서 어렴풋이 깨어나는 순간 문틈으로 새어드는 햇살이 방안의 뽀얀 먼지를 흔들며 머리맡에 쏟아지던 그 상큼한 순간을 기억하는가?

은빛의 부드러운 화선지 위에 까맣게 윤기 넘치는 먹물이 흐드러지게 퍼져나가는 그 맛 역시 영원히 놓칠 수 없는 오싹한 전율이다. 격조 높은 흑백의 앙상블! 낭창낭창하고 원만하게 생긴 붓털이 빚어내는 강하고 질긴 획질(劃質)! 심간을 깎는 아픔의 붓질을 통한 먹울림! 이러한 잔잔한 감동들 때문에 서예는 인류 역사와 궤를 같이 하였고 오늘날도 많은 사람들이 혹독할 정도로 애호하고 있다. 그 누가 서예를 고리타분하고 낡은 취미 정도로만 치부한단 말인가?

서예는 문자를 매체로 하여 표현하는 조형 예술이다. 다시 말하면, 서예는 필묵으로 종이 위에 점과 획을 결합함으로써 문자의 미적 질서를 나타내는 인류 역사만큼이나 오랜 예술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표현의 본능을 가지고 있다. 문자를 모르는 어린아이조차 색연필을 손에 잡으면 아무 데에나 마구 그어 버리고 짓이기는 낭패를 보았을 것이다. 도심에서 새로 길을 닦고, 시멘트를 발라 놓으면 마르기도 전에 꼬챙이를 들고 대책 없이 낙서한 경험이 있을 것이다. 어린아이가 있는 집의 벽지가 온전하게 남아 있는 경우를 보았는가? 긋지 않고는 못 배기는 인간 본능의 자취이다. 그러나 인간은 차차 성장하면서 이성의 갑옷을 입고 다른 사람과 비교하게 되고, 점수로 자기를 판단하며, 자기의 글재주 없음을 선천적이라고 속단하고 본래 가지고 있던 표현 본능의 씨앗마저 하나하나 짓밟아 버리기가 일쑤다.

운동장에서는 잘잘못을 떠나 누구든 공을 찰 수 있고, 노래방에서는 점수에 상관없이 누구나 노래를 부를 수 있듯이, 아무나 붓을 잡으면 붓글씨를 쓸 수 있다. 그대 또한 서재에 혼자 앉아 또 다른 내면의 자아와 대화를 나누면서 붓질을 즐길 수 있다. 번잡한 세상일수록 지고한 붓과 지순한 종이와 더불어 지내다 보면 생각은 어느새 가을 물처럼 맑아진다.

붓끝에서 쏟아질 듯 질펀한 먹물을 후려치거나 마침내 남은 마지막 한 방울까지 짜내고 우려내어 화선지에 불이 붙을 정도로 붓털을 짓이기다 보면 어느새 가슴은 미묘한 감흥과 뿌듯함으로 흥건히 젖는다. 붓질, 이 작업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생활의 리듬이요 사고의 향기이다. 붓다, 맛보면 맛볼수록 입안에 침이 돌고 코끝에는 신비한 묵향이 감돈다. 손끝을 통하여 전신에 번지는 짜릿한 흥분, 흑백과 농담, 강약과 완급이 빚어내는 점과 획의 하모니, 이런 서예야말로 문인묵객은 물론 교양 있는 현대인이 평생 누릴 수 있는 으뜸 취미(趣味)요 품위(品位)고 할 수 있다. 아니 현대 메커니즘 시대에 아련한 선비 추억을 눈앞의 현실로 일깨워 주는 최고의 여가 선용이다.

서예를 즐기기에 이상적인 상태로 구생법(九生法)이라는 것이 있다. 생지(生紙), 생필(生筆), 생연(生硯), 생묵(生墨), 생수(生水), 생수(生手), 생목(生目), 생신(生神) 생경(生景)의 아홉 가지를 가리킨다. 차분하고 부드러운 종이, 끝이 부드러우면서도 허리의 탄력을 잃지 않는 붓, 푸근하면서도 깐깐함을 잃지 않는 벼루, 빛깔이 맑으면서도 윤기가 흐르는 먹, 새벽에 새로 기른 맑고 깨끗한 생수, 최상의 컨디션을 유지한 손, 붓털의 섬세한 움직임도 놓치지 않는 눈, 고요하면서도 여유 있는 정신, 기상이 넘치는 화창한 날씨 등 최적의 서사(書寫) 조건을 가리키는데 이 여건이 구비되었을 때, 득의작(得意作)을 얻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하지만 조자룡이 무딘 칼을 탓하던가? 이순신이 군장비를 탓하던가? 연장타령, 기분타령, 날씨타령……. 반주 없어 노래 못할까? 바가지 없어 물 못 마실까? 꿩 잡는 것이 매이다.

촉촉한 가을날 차 한 잔의 여유를 갖고 누군가와 따스한 대화를 나누고 싶을 때가 있다. 현실 속에서 존경하는 그 누구와 상면하여 정담을 나누거나 덕담을 얻는 일도 좋겠으나, 독서를 통한 고인과의 대화 또한 시공적(時空的), 물질적 제약 없이 즐길 수 있는 보람이다. 서예를 배로 즐기는 선행 조건이 바로 독서이다. 문자를 매개로 하여 뿜어내는 명사들의 메시지를 접하다가 보면 더러는 밑줄을 그어 오랫동안 가슴깊이 새겨 두고 싶을 때도 있다. 이럴 때 붓을 붙(붓)잡고 글씨를 써 보자. 먹빛은 천년 간다고 하였것다! 당장 지필묵(紙筆墨)을 잡아보면 어느덧 공해 속의 자신은 잊어버리고 신선이 된 기분을 만끽할 것이다. 혼자서도 흠뻑 빠질 수 있는 취미활동 중에 이보다 멋스러운 것이 어디 있을까?

'글씨'란 '그'으면서 '씨'를 뿌리는 일이기에 붙여진 명칭이다. 환언하면 글씨는 마음속에 일어나는 가치 있는 정서를, 붓이란 파종 도구를 이용하여, 화선지라는 마음의 밭에 먹물이라는 씨앗을 뿌리는 일이다. 그 씨앗이 영글어 작품이 된다. 그 씨앗이 모두 향기를 지닌 먹꽃으로 피어나는 것까지는 좋으나, 어느 순간 대부분의 먹꽃은 떨어져 버리고, 표구라는 포장을 해서 남에게 선보일 만한 열매를 찾기란 쉽지 않다.

김이란 성을 가진 사람의 아들딸은 김이란 분의 씨앗을 받아 이 세상에 태어났기 때문에 반드시 김 씨만이 될 수 있다. 이 씨나 박 씨 등 모든 성이 마찬가지이다. 근년에 법적으로 어머니의 성을 따르거나, 부모님의 두 성을 함께 쓰는 것을 허락했지만, 엄밀히 말하자면 그것은 잘못이다. 이는 살구 씨를 심었는데 대추씨가 나오겠는가? 천만에.

글씨도 씨의 일종이다. 말씨, 솜씨, 마음씨, 맵씨등이 모두 씨의 일종이다. 국어사전에는 '맵시'를 표준어로 잡고 있으나 필자의 생각에는 맵씨가 옳다고 생각한다. 씨는 죽어서 새 생명을 잉태하고 또 많은 열매를 맺는다. 그 열매 속의 씨는 또 다시 하나의 씨가 되어 뿌려지고 거두어지기를 반복한다. 글씨란 씨도 종이에 떨어져 썩어야만 한다. 썩어야 열매 맺고 그 열매는 다른 감상자의 입맛을 돋울 수 있다. 그 글씨 열매에서 배어 나오는 묵향은 내용과 어울려 시공을 초월하여 메아리쳐서 대를 잇게 된다. 신라의 김생도 고려의 이암도 다 시간 속으로 사라져 갔지만, 그들이 붓으로 요리한 손맛은 아직도 입맛을 돋우고 삶의 생기를 불어넣어 준다.

21세기, 정보와 문화의 세기, 이제 세상은 아날로그 시대에서 디지털 시대로 변하고 있다. 컴퓨터 혁명으로 말미암아 물질적 소유의 시대에서 정신적 접속의 시대로 급변하고 있다. 누구든 접속을 통하여 정보의 바다 속에서 끊임없이 헤엄칠 수 있다. 문화의 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들, 접속을 통하여 지구 저편의 예술 작품도 안방에서 쉬이 접하고 감상할 수 있게 되었다. 참 좋은 세상이다. 인터넷을 통하여 쉽게 남의 작품을 감상하는 것만도 일락(一樂)이라 하겠으나, 스스로 먹 갈고 붓 잡아서 자기의 생각을 종이 위에 우려내 보자. 못난 글씨면 어떠랴. 진실하고 착한 마음만 묻어 있다면 그만인 것을.

기계의 편리함으로 인하여 사라져가는 손의 감각을 되찾자. 각박한 세상일수록 한묵유희(翰墨遊戱)를 통하여 심성을 기르고 멋진 취미의 소유자가 되어 보자. 서예를 통한 아름다운 영혼의 소유자가 되어 마음껏 폼을 잡아보자꾸나.

화선지는 대지요, 먹물은 빗줄기이다. 화선지는 늘 건조한 상태에서 빗줄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다. 갈증에 허덕이는 화선지의 절규가 들린다. 비 내려야지, 비 내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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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권상호
수정에 의하여 끝부분이 조금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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