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돌에 아로새긴 산빛과 사람의 숨결

돌에 아로새긴 산빛과 사람의 숨결

- 윤혜숙 새김전에 붙여 -



                                                               塗丁 權相浩(서예, 전각가) 

  새김질, 이는 인간의 본능에 해당된다. 인간은 이 세상에 태어났다는 징표로 뭔가 흔적을 남기고 싶어 하는 습성이 있다. 종족 보존의 욕구와 인류 문명 유산들을 살펴보면 이러한 사실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 흔적 남기기의 한 형태가 새김질이다. 그것도 나무보다 단단한 돌 위에 새기는 일은 힘들지만 반영구적이고 수정이 불가능한 분명한 표현 행위이기 때문에 더욱 엄숙하고 신성한 본능이라 할 수 있다.

  돌의 결에 따라 숨겨져 있는 원시 숨결을 찾아내고 21세기 전자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호흡을 칼끝을 통하여 불어넣다가 보면 어느덧 새기는 사람은 時空을 초월하여 無我之境에 빠져들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나름의 정서와 생각을 가지고 있으며, 이를 노래나 춤 등으로 표현하기도 하고, 더러는 그림이나 새김질로 나타내기도 한다.

  인류 문화의 전이 양상을 보면 새기는 문화에서 쓰는 문화로, 쓰는 문화에서 다시 인쇄 문화, 전자 문화로 발전해 왔다. 전자 문화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의 급속한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곧 새기는 문화는 인류 역사의 시작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

  일찍이 고유섭 선생은 돌의 문화는 '쌓는 문명'에서 '새기는 문화'로의 전개되었다고 전제하고, '쌓는 문명'에서 '새기는 문화'로의 전개, 이것은 석기 문명 진전의 필연상이라 했다. 사실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돌을 ‘쌓는 문화’든 돌에 ‘새기는 문화’든 따로 존재하지 않고 공존하며 이어져 왔다. 지금도 ‘쌓는 문명’과 ‘새기는 문화’는 계속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인류가 존속하는 한 면면히 이어지리라 믿는다.

  여기, 삶의 유혹에서 벗어나 새김질에 열중하는 한 여성이 있다. 십대의 순수와 이십대의 열정, 삼십대의 개성이 살아 있는 사십대의 여류동양화가이다. 그는 홍익대학교 대학원에서 동양화를 전공하고 있는 학생이기도 하다. 제도적 그림 공부는 만학이지만 창조에 대한 열정만큼은 늘 初心을 잃지 않는다. 이번의 새김전도 그의 새로운 세계에 대한 순수한 모험과 겁 없는 도전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적어도 윤혜숙의 경우, 새김질은 붓질의 또 다른 모습이다. 다시 말하면 화선지 위에 붓으로 그릴 산수화와 인물화를, 화선지 대신에 돌을 받치고, 붓 대신에 칼을 이용했을 뿐이다. 篆刻 예술이 갖고 있는 기본적인 두 가지 속성, 곧 方寸의 예술이라는 점과, 문자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고정 관념을 뛰어넘고 있다. 方寸을 훨씬 넘는 제법 큰 돌에다가 전통적인 중봉만을 고집하지 않고 다양한 刀法을 사용하여 흐드러지게 파내고, 긁어내고 하는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사물의 형상을 본떠 새긴 肖形印에 가깝고, 서양미술의 관점으로 얘기한다면 인주로 찍어내는 一度版畵와 다를 게 없다. 형상을 새긴 인장을 초형인이라 하는데, 순수하게 대상의 형상만을 새기거나 문자를 곁들여 새기기도 한다. 그는 초형인의 이 두 가지 방식 중 전자를 택하고 있다.

  초형인은 문자를 새기는 것 보다 더 많은 구성상의 변화와 도법을 사용할 수 있는 장점이 있지만 새기는 이가 얼마나 그 변화와 도법을 수용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에 봉착하면 접근하기가 그리 수월치 않다. 이러한 난제를 그는 거침없는 실험 정신과 강열한 창작의욕으로 잠식시키고 있다. 때로는 돋을새김으로 때로는 오목새김으로, 아니면 음양각을 섞어서 절묘하게 단색의 단조로움을 피하고 있다.

  굳이 이러한 새김질에 이름을 붙인다면 진한대의 중후한 刀風과 청대의 다양한 칼맛을 함께 살린 山水人物印을 만들어 낸 것이다. 획의 厚薄과 深淺 및 遲速, 動靜을 임의대로 섞어가며 산의 능선이나 계곡 또는 숲을 누비고, 삶의 애환이 담긴 얼굴의 주름살을 그어 낸다. 모두 작가의 마음이 나아가는 바를 법으로 삼고 있다 하겠다. 곧, 작품의 대하면 윤혜숙의 삶의 체험과 정신적 뿌리를 깨달을 수 있다.

  윤혜숙은 특히 산을 좋아한다. 그래서 산을 오른다는 점에서는 남과 같지만, 산과 대화하고 산의 내밀한 면을 찾아내어 붓으로 그리고 칼로 새긴다는 점에서는 남과 다르다.

  산의 순 우리말은 '뫼'이다. 조선 중기만 하더라도 '뫼'는 /모이/로 발음하여 이중모음으로 인식하였다. 그것이 단모음화하여 오늘날은 /뫼/로 발음하고 있는 것이다. 국어학의 문제이지만 '애', '에'도 마찬가지로 각각 /아이/, /어이/로 발음하던 것이 지금은 단모음화되어 /애/, /에/로 발음하고 있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구태여 발음 문제를 들먹이는 이유는 산의 의미가 '모이다'는 뜻에서 온 것임을 밝히고 싶어서이다. 산에는 온갖 풀과 나무, 꽃과 새 등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생물들이 '모여' 살고 있다. 그렇게 많이 '모인' 것 중에서 윤혜숙의 관심은 특별히 '나무'와 '사람'에게 있다. 그리하여 그의 새김질에 있어서 주된 테마는 산에서는 나무이고, 사람에게서는 얼굴이다.

  나무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나무(남의)' 좋은 일만 한다. 鳥蟲과 人間에게 먹을거리와 쉼터와 잠자리를 제공하며 자신을 소진한다. 영원 불변의 숯이나 그을음으로 화신하여 세상을 여과하고 붓글씨 쓸 먹을 제공한다. 산이 높아가는 것은 산 자체가 높아가는 것이 아니라 산에 자라는 나무가 자라는 것이다. 나무 역시 앞으로도 피할 수 없는 윤혜숙의 화두이다. 윤혜숙 그도 '사람'이기에 '살며', '사랑하며', '삶'을 영위해 가고 있는 것이다. 사람 신체 중에서도 얼굴에 특별한 관심을 갖는 이유는, 얼굴이란 '얼(魂)'이 담긴 '굴(窟)'이란 인식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새김질은 외모보다 '얼'을 새기는 작업이기에 그만큼 소중하다고 본다.

  하지만 예술의 바다는 넓고 깊기만 하다. 그의 작업은 아직 바닷가에서 조약돌을 줍거나 배들 만들고 있는 중일 수도 있다. 예술의 넓은 바다, 藝海를 건너고자 할진데 큰 배를 만드는 일이 힘들다 하여 어찌 중도에서 그만둘 수 있겠는가. 현란함보다는 소박함을, 세련됨보다는 다소 어리숙함을, 즉흥적이기보다는 은근함을 주는 쪽으로 더 많은 수련이 필요하다고 본다. 그리고 진정한 새김의 예술가가 되기 위해서는 주변 학문에 대한 천착도 게을리 해서는 안된다고 본다. 

  여성으로서 쉽지 않은, 돌과 칼의 치열한 싸움을 통하여 나타난 새로운 조형 세계는 전각의 영역을 넓혀 줌은 물론 크로스 장르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모든 작업의 밑바탕에는 남편의 외조와 자식의 신망 위에 타고난 건강과 부지런함, 갈등과 고민 뒤에 깨닫는 예술 실천의 정신이 오늘의 그를 지탱하고 있고, 앞으로도 무한한 가능성을 엿보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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