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라이브 서예의 가치관

<노원문화> 제7호 기고(2006. 12. 27)

라이브 서예의 가치관


                                                          권상호(수원대학교 미술대학원 서예 교수)

  어제는 예술의전당 오페라극장에 다녀왔다. 1947년 파리오페라의 발레마스터로 재직했던 조지 발란신이 조르주 비제의 ‘교향곡 제1번 C장조’에 맞추어 안무한 작품 <Symphony in C>의 초연을 보기 위해서였다. 서예가인 나에게는 무대와 의상이 ‘블랙 앤 화이트’로 단순화되어 있다는 데에 관심이 고조되었다. 서예도 끝없는 블랙과 화이트의 격조 높은 앙상블이기 때문이다. PR 내용과 같이 과연 색이 없는 무색의 찬란함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던 밤이었다. 프리마 발레리나를 비롯한 모든 여성 무용수는 흰 옷을 입고 있어 화선지를 연상케 하고, 프리모 발레리노를 비롯한 모든 남성 무용수는 검은 옷을 입고 있어 먹을 머금은 붓을 떠올리게 했다. 평소에 발레 동작을 보면서 어쩌면 저렇게 서예의 필법과 같을까 하고 생각했는데, 무대와 의상까지 흑백으로 처리한 공연을 보니 과연 절조 넘치는 라이브 서예를 보고 온 느낌이다.


  학문과 예술의 가치는 실천과 공유에 있다고 본다. 조형 예술의 한 영역인 서예도 이 범주에서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라이브 서예’란 필자가 새로 만든 용어로, 라이브 콘서트 또는 라이브 쇼라는 말에서 보듯이 공공장소에서 실제 붓글씨를 써 보임으로써 서예가와 관중이 함께 즐기는 서예의 한 영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곧, 서예의 실천과 공유적인 면에서 붙인 말이다.

  굳이 한자어로 이름 붙인다면 휘호(揮毫), 낙서(樂書) 또는 생서(生書)라고 할 수 있다. 붓을 마음먹은 대로 휘두르며 글씨를 쓴다는 의미에서는 휘호(揮毫)이고, 글씨를 즐긴다는 점에서는 낙서(樂書)이고, 글씨를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본다면 생서(生書)라 할 수 있다. 사실 표구를 잘 하여 벽에 걸어 둔 멋진 글씨를 보는 것도 감흥을 주지만 점획을 긋는 매순간 손끝에 와 닿는 변화무쌍한 느낌과는 비할 바가 못 된다. 발레를 하는 사람들의 발 감각도 아마 서예가들의 손 감각과 상통하리가 생각한다.

  아는 만큼 볼 수 있고, 아는 만큼 들을 수 있다는 말과 같이 서예 또한 이에 대한 선행 학습이 있어야 더 큰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서예도 음악과 같은 순간적이고 즉흥적인 전율을 주기도 하는 걸 보면, 서예는 분명 가장 음악적인 요소가 강한 조형예술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서예라 하면 조용히 방안에 홀로 앉아 날씨에 구애됨이 없이 즐기는 차분하고 내밀한 예술로 생각하겠지만, 라이브 서예를 접해 보면 그 역동적이고도 강한 메시지에 서예의 또 다른 예술적 측면을 발견하게 된다. 서재에 홀로 앉아 쓰는 글씨를 조용한 실내악이라고 한다면 라이브 서예는 많은 관중 속에 연주되는 대형 오케스트라라고 할 수 있다.

  서예의 출발은 아무래도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으로서 문자언어로서 출발한 실용적 목적에 있었다. 그러나 인쇄술과 워드프로세서의 발달로 말미암아 서예의 실용적인 가치는 점차 줄어들고, 시각의 대상으로서 먹물이란 재료를 써서 화선지라는 공간에 이루어지는 예술적 가치가 부각되고 있다. 예컨대 건축이나 의류 등도 처음에는 실용적 목적에서 출발하였지만 오늘날은 이들도 예술의 한 영역으로 뚜렷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더구나 모든 생활 용품이 기능도 중요하지만 디자인 개념 없이는 존립할 수 없는 현실을 보면 실용과 예술의 경계가 없어진 느낌도 든다. 실용과 예술은 둘이 아니므로 실예불이(實藝不二)라 할 수 있다. 인간적인 면에서 풀이하자면 생활과 예술도 둘이 아니다. 삶의 예술화라는 말보다 삶 자체가 예술이어야 한다. 생예불이(生藝不二)라고나 할까.

  라이브 서예도 따지고 보면 일찍이 존재했었다. 천하제일의 행서로 꼽히는 서성 황희지의 '난정서'가 그 좋은 예이다. 난정서는 왕희지가 영화 9년(353년) 음력 3월 초에 많은 선비 및 청장년과 더불어 난정에서 모임을 갖고, 굽이굽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면서 잠견지(蠶繭紙) 위에다 서수필(鼠鬚筆)로 단숨에 써내려간 324자의 라이브 서예의 명작이다. 당나라 서예가 장욱(張旭)은 술을 좋아해 취하면 미친 듯이 붓을 잡았으며, 머리카락에 먹물을 묻혀 글씨를 쓰기도 했으니 실로 라이브 서예의 대가라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의 김정희나 대원군 이하응 등도 라이브 서예의 대가들이다. 선비들이 모여 여흥을 즐기던 장소인 정자나 사랑방의 서예 행위가 모두 라이브 서예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우리의 정자와 사랑방 문화는 점차 사라지고 따라서 라이브 서예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애석하게도 감수성이 예민한 우리 청소년들이 성장과정에서 붓글씨 쓰는 장면을 접할 기회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단지 박물관이나 거실에 걸린 박재된 서예만 무심히 접할 따름이다. 까만 먹물을 듬뿍 찍은 붓으로 하얀 화선지 위에 점과 선을 교차시켜 가면서 즉흥적으로 창출해 내는 새로운 질서와 아름다움을 접해 보거나 체험할 기회가 없는 것이다.

  필자의 경우 어린 시절, 제삿날 밤이면 아버님께서 손을 깨끗이 씻고 황모필(黃毛筆)로 지방을 정성스럽게 쓰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요즈음은 제사 때 쓰던 지방 글씨조차도 영정으로 대신하는 편이고 보니 가정에서 붓글씨 쓰는 장면을 접할 기회는 거의 사라졌다고나 할까. 미술 시간에 어쩌다가 접해 본 들 선생님으로부터 주의 사항 듣다가 기분을 망치고 만다. 

  그렇다. 아름답고 품위 있는 정상의 서예문화, 사라져가는 선비문화를 되살리는 길은 라이브 서예에 있다. 실제로 필자는 라이브 서예 활동을 통하여 주위로부터 많은 호응 얻고 있다. 서예에 나타나는 예술적 매력을 관중이 보고 느끼고 공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점과 선의 끝없는 변화가 주는 멜로디감, 필압(筆壓)의 강약(强弱)이 주는 리듬감, 운필(運筆)의 속도 변화에서 오는 율동감, 먹의 농담에서 오는 신비감, 문자 상호간의 비례와 균형에서 오는 긴장감 등, 서예는 진정 인간의 영혼과 신체가 혼연일체가 되어 절묘한 조형미를 자아낼 때 그 절정에 이른다.

  일을 할 때는 일을 붙잡고, 여가를 만들어서는 붓을 붙잡자. 붓 잡고 붓 운전을 해 보자. 운필(運筆)의 핵심은 기운생동(氣韻生動)이다. 기운이 살아 움직이는 심획(心劃)을 긋기 위해서 골방을 박차고 대중 앞에 나아가 라이브 서예를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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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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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박수....
어디서나 선생님 하신 말씀은 백프로 옳으신 말씀이십니다.
선생님 항상 건강하세요.
주인
감사합니다.
귀하의 말씀에 용기를 얻어 다시 붓을 잡습니다.
권상호
라이브 서예 원고 준비

서예의 미래는 밝은가? 컴퓨터가 글쓰기를 대신하는 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결론적으로 말하면 매우 밝다고 할 수 있다. 조건은 수동적인 자세에서 능동적 자세로 '다가가는 서예'이어야 한다는 데 있다.
그런데, 현실은 서예의 미래에 대하여 걱정하고 우려하는 목소리들이 무성하다. 세미나 테마로도 자주 등장하고 있다.
사실 지난 오천년 동안 서예인들은 최고의 명예와 지위를 누려왔다. 잠시 아픔이 있다고 아쉬워한다면 화려한 사치일까?
서예로 먹고 살기가 힘들다. 초대작가가 되면 모든 팔자가 펴지는 줄 알았는데, 전이나 후나 차이가 없다. 학원 운영도 갈수록 어렵다고들 한다. 맞는 말이다. 초중고 교과에서 서예 교육이 외면 또는 소외당하고 있다. 학교에서 푸대접받는 교과일수록 사회에서 홀대받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교육 정책에 의한 학교 교육 안에서 서예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또 실행 되어야 한다.
요즈음 청소년 생활문제가 여러 가지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데, 이는 윤리 교육으로 치료할 수 있다. 서예는 쓰는 내용이 교훈적인데다가 예술을 통한 미적 체험을 할 수 있게 하는 최고의 인간치료제 겸 정신성장호르몬이다.
그리고 많은 서예인들이 여러 사회 단체에 가입하고 또 활동하고 있다. 참여 단체로부터 회비를 내라는 성화는 많은데, 수익을 배당받는 단체는 하나도 없다. 그렇다면 재테크 서예이어야 한다. 사실 지금까지 음악이나 회화 등의 예술 장르에 비하여 서예를 재화화하는 일은 품위에 손상이 되는 것처럼 인식되어 왔다.

"붓 잡는 사람이 돈을 입에 담아서야 어디......"

이런 말이 나올 때는 사실, 붓만 잡으면 모든 게 다 나왔다. 붓만 잡으로 과거에 급제할 수 있고, 양반 대열에서 놀고 먹을 수 있으며, 이웃집 소나 말을 빌리는 일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장가도 잘 들 수 있고, 오나가나 대접 받는 사회 최고 신분층이었다.
서예의 미래는 밝은가? 우리보다 앞선 세대는 그래도 사회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충분한 대우와 명예를 누렸다. 그러나 지금은 그렇지 못하다. 고도의 분업사회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하여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그 댓가는 너무나 열악하다.

재태크 서예......
능동적인 서예......
다가가는 서예......
서예의 디지털화......
서예의 퍼포먼스화......
서예의 실용적 역할 회복......
모두 서예 전도사가 되자......
사랑방 서예에서 광장으로 끌어내자......
더 이상 박제 서예[剝製, stuffed specimen calligraphy]는 안 된다......

여기 그 타개책으로 몇몇 뜻있는 사람들끼리 모임을 가졌다.
대안은 라이브 서예(LC: LIVE CALLIGRAPHY)이다.
이제는 라이브 서예만이 대안이다.

우선 프로의식을 가질 수 있다.
서예 전도에도 많은 도움이 된다.
소통 문제에 있어서도 직접적이다.

 라이브 서예 넋두리

서예인들은 근본적으로 학구적이면서도 명랑, 쾌활하지만
가끔 시대에 뒤떨어진 농담으로
주변인을 경악케 하지요.

서예인들은 주로
현실 안주보다는 미래 도전을,
소극성보다는 적극성을,
불의보다는 정의를 추구하며 살려고 애쓴다.

그런데 그들은 현실적 어려움 때문에
긍정보다는 부정이 많기 일쑤다.

그것이 만일 당신이라면?
원대한 포부보다는
생활을 이야기하는 다소곳한 미학을 지닌 서예인,
때로는 철학하는 차가운 머리와 열정을 못이기는
뜨거운 가슴을 지닌 아름다운 서예인이여!

길거리에서 가감 없이 나를 드러낸다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잘 알지만
이 땅에 태어나고 세계를 지향하는 서예인으로서,
특히 서예술 전도 및 공유를 목적으로 하는
라이브 서예의 투명성을 확보하기 위해서
우선 이 글을 올려 봅니다.

라이브 서예

세상의 빛과 소리에 주목한다.

라이브 서예가 꿈꾸는 세상은
붓질과 관객이 하나가 되는
열광의 마당이다.
라이브 서예는 프로이다.
◈ 학문과 예술의 가치는 실천과 공유에 있다. 이것이 라이브서예의 가치관입니다.
  박물관이나 갤러리, 도서관 및 인터넷상의 방대한 자료들이 정작 그것을 이용하고자 하는 이들에게 여러모로 근접하기가 어려운 까닭에 예술적 향유와 배경지식의 습득에 많은 애로가 있는 게 사실입니다. 특히 서예인의 경우, 폰메일은 물론 이메일 사용에서부터 인터넷 항해에 대한 문외한이 많아 정보공유 면에서 타 예술 장르에 비해 뒤처지는 현실이 더욱 안타깝습니다.
  이에 우리 라이브서예는 예술작품 감상 및 예술정보의 공유와 특히 예술의 실천적 가치를 21세기 예술의 척도로 내세우고 이를 직접 실천코자 청계천 아티스트 활동 및 홈페이지를 운영 중입니다. 이에 우리는 이미 지난 2005년 9월 25일에 서울시로부터 제1기 청계천 아티스트로 인정을 받고 2005. 10. 1~3일까지 3일간에 걸친 야외 라이브서예 공연을 가졌습니다. 그리고 2006년 4월 말까지 일기가 허락하는 한 매주 토요일 오후 1시부터 5시 30분까지 열린청계 장통교에서 붓쇼를 펼칠 예정입니다. 여기에는 저명한 크로키스트와 뮤직션의 협연으로 지금까지의 골방의 폐쇄적인 서예 마인드를 뿌리부터 확 바꿀 예정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학문과 지식의 잣대를 어느 대학 졸업장이라는 간판으로만 결론지으려는 현 사회와 교육계의 슬픈 현실에 비통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현재의 학교 예술교육 여건으로는 특정인의 특별한 사람들만을 위한 예술의 굴레에서 벗어날 수 없음도 통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풍토 속에서는 학문과 예술의 진정한 탐구와 저변확대는 물론 이의 세계화에서도 뒤떨어지고 말 것임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일입니다.
  서예 동호인, 그리고 인간 여러분!
  지금 지식사회는 정보의 홍수, 정보의 바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내실 있는 자료의 공유체계는 따지고 보면 그렇지 않습니다. 인터넷을 통한 많은 지식자료와 예술작품의 공유를 통하여 삶의 질을 고양합시다. 그 실천 방안으로 현 사이버정보세계를 최대한 내 것으로 만들고, 나의 지식으로 만들며, 학문과 예술의 실천을 통한 행복하고 의미 있는 삶을 꾸려나가도록 합시다.
  서예닷컴은 한국사회의 저작권시비에도 불구하고 인터넷 정보공유에 그 몫을 다하려 합니다. 그리하여 참된 서예술의 실천과 향유로 이웃과 국가 및 인류에 공헌하고, 특히 자기자신의 가치관과 세계관을 업그레이드해 나 갈 수 있다면 더없는 기쁨이겠습니다.
  예술을 체득하고 실천하며, 그 소양을 넓히려는 이들에게 다가가는 것이 저희들의 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서예 네티즌 여러분!
  라이브 서예는 서예술을 실천하고 또한 서예술 정보공유와 나아가 지식기반사회의 참된 멋을 지닌 정중동(靜中動)의 서예술 미학의 창달을 위하여 여러분의 적극적인 동참을 통절히 호소합니다.
 라이브 서예 작가 몇몇의 힘으로 이 많은 것을 이루어 내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관심 있는 서예 동호인 여러분들께서는 온라인 또는 오프라인 모임에 적극 함께하시어 예술적 인생을 맛보시고 라이브 서예의 공익적 재탄생에 동참하시길 기원합니다.

  우리 것에 대한 애정을 가지고 있고, 좋은 것 나누기를 좋아하는 세상 여러분들의 많은 참여를 바랍니다.

◈ 라이브 서예의  취지와 그 목적 ◈
1. 목적
▶ 서예에 관한 유익한 정보와 특히 서예의 세계화에 관한 각종의 자료와 정보를 상호 교환함으로써 서예의 일반화 및 서예의 세계화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것을 그 목적으로 한다.
▶ 서예에 관한 유익한 정보와 세계화를 위한 합리적 방안을 생각하고 이에 따른 개인의 실천 영역을 확대한다.
▶ 서예닷컴의 유익한 모든 자료는 상호 공유함을 당면과제로 생각하며 주변의 자료 요구를 원하는 모든 이들과 공유한다.

2. 구성
▶ 인터넷의 네티즌이라면 누구나 참여하고 자료를 공유할 수 있다. 단 공유할 때에는 공유 사실을 밝힘을 원칙으로 한다.
▶ 라이브 서예에 대한 관심과 애착을 가지며 서예 연구 및 관련 정보를 공유하고자 하는 네티즌을 환영한다.

3. 공유 내용
▶  박물관 및 갤러리의 서예 소장 작품 조사
▶  각국의 서예 활동 조사
▶  서예이론에 관한 기본 자료 수집
▶  서예정보 공유의 실제적 조사와 연구를 위한 오프라인 모임
▶  미래지향적인 서예활동에 관한 연구 및 실천 방안
▶  서예의 남북 교류를 위한 실질적 방안 탐색
▶  서예 연구 논문 및 도서 자료 수집
▶  서예네티즌을 위한 예술기반 교육과 정보자료의 보급
문화기획/인물탐방 서예가 - 코리아 라이프


먹울림을 통하여 세상의 중심에서 서예를 알린다
라이브 서예가 도정 권상호 선생과의 만남.
‘붓꼴림’이라고 하면 어떤 느낌이 드는가. 생경한 말에다 어쩌면 속어로 들릴지도 모르지만 도정 선생은 이를 두고 ‘붓을 잡고 글씨를 쓰고 싶은 충동’을 가리키는 말이라며 모든 일에 있어서 뭔가 하고 싶어 못 견디는 동기유발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그는 디지털 혁명의 시대에도 아날로그 마니아들이 존재하는 것처럼 컴퓨터 안에 온갖 폰트들이 난무하지만 5천년 동안 맥맥히 이어져 내려온 서예 작업을 하루라도 거를 수 없단다.
지난 10월 1일 청계천이 새로 열리고 제1호 청계천 아티스트가 된 라이브 서예가 도정 권상호 선생이 펼친 서예 퍼포먼스 현장과 그의 연구실인 부휴실(浮休室)을 찾아가 아날로그적 만남을 가져본다.

붓글씨를 늘 쓰시는데 특별히 좋아하는 글귀가 있으신가요.
‘Beautiful space & Delightful time’, 곧 ‘공간은 아름답고, 시간은 즐겁게’라는 말이지요. 실은 제 좌우명인데, 인간이 살아 있는 동안 절대 피하거나 극복할 수 없는 것이 공간과 시간이라면 그 공간 아름답고, 그 시간 즐겁게 만들어 나가야 하지 않을까요? 저의 경우 붓글씨 쓰는 일이야말로 그 실천의 최고 수단 중의 하나라고 생각해요.

청계천 새물맞이 행사에서 ‘라이브 서예’라는 주제로 퍼포먼스를 펼치신 이유는 무엇인가요.
흔히 서예라 하면 표구를 통한 완성된 작품만 생각하는데, 제가 퍼포먼스를 즐기는 이유는 서 있는 서예가 아닌 움직이는 서예, 박제된 서예가 라이브 서예를 보여주자는 것입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 왕희지의 난정서와 같이 퍼포먼스 작품이 현장성과 생동감이 있어서 명필로 남아있듯이, 쓰는 과정을 직접 보여줌으로써 쓰는 사람은 더 큰 집중과 신명을 얻고, 관중은 붓놀림에 대한 감흥과 먹울림에서 오는 감동을 맛보게 되는 것이죠. 모 케이블 방송사의 TV광고 출연도 그런 이유에서였죠. 다양한 붓놀림에 의해 순백의 화선지가 윤택한 먹물에 속절없이 잦아드는 재미를 보여주고 싶었어요.

‘High Seoul 페스티벌’등의 문화행사장에서도 봉고, 대금, 기타 연주에 맞춰 붓쇼를 보인 적이 있는데, 아가씨와 어린이들은 물론 외국인들도 필흥(筆興)을 견디다 못해 등이나 가슴을 들이대고 티셔츠에다 글씨를 써 달라고 부탁하거나 체험을 하고 싶어 할 때면 신명이 뻗힙니다. 그로 인해 서예에 대한 관심을 갖는 사람이 한명이라도 늘어난다면 더 없는 보람이죠. 서예가 고리타분한 예술이라든가 특별한 사람들만이 즐길 수 있는 어려운 취미라는 편견은 이제 버리세요.

강의도 많이 하시는데 학생들에게 무엇을 중심으로 가르치시는지.
쓰는 즐거움과 배움의 가치에 중점을 두죠. 글씨를 멋지게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서예를 하는 더 큰 보람은 늘 책을 가까이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데에 있어요. 더러는 시문을 짓거나, 그림을 그리기도 하지요. 그 뿐인가요. 자연 친화적인 사람인 된다는 사실입니다. 초기에는 인간의 손으로 빚어낸 인위적인 글씨를 쓰지만 점차 서력(書歷)이 쌓이면 자연스런 작품을 추구하게 되지요. 또 있습니다. 화선지는 식물성이고 붓털은 동물성이라 붓이 화선지 위를 달려갈 때면, ‘쥬라기 공원’ 영화 속에 뛰어든 것과 같은 느낌이 들어요. 붓글씨란 화선지라는 넓은 초원 위에 먹알갱이라는 씨앗을 붓이라는 파종기로 뿌리는 정직한 농사에 비유할 수 있습죠. 먹을 갈아 먹물을 만드는 것은 물이 없이는 씨가 발아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기 때문이죠. 붓이 금방 지나간 자리에는 먹이 번지면서 붓꽃이 피고, 마르면 열매로 맺어, 그 생명 영원하니, 대단하죠. 물론 더러는 갈필에 의한 척박한 사막으로 남기도 하지만 말이에요. 우리의 아름다운 영혼의 씨앗이 천년 가도 빛을 발하며 종이 위에 남아있다는 사실이 신비하죠. 우리가 죽는 순간 사유재산은 명의변경이 되지만 글씨는 비록 좀 못 썼을지라도 영원히 명의변경이 되지 않는 정신적 가보랍니다. 이런 등등의 서예의 덕성을 강의하다가 보면 사제간에도 먹과 종이처럼 하나가 됩니다.

서예를 지루하게 느끼는 사람들이 있는데 거기에 대한 한 말씀.
단순히 글씨만을 쓴다고 볼 때, 키보드 치는 것보다 훨씬 느리고, 용구 준비에도 시간이 걸리며, 먹물이 나오기는 하지만 먹을 갈아야 한다는 시간적 조급증이 있는 사람에게는 지루하게 느끼는 것이 당연하죠. 게다가 어디 실력이라도 눈에 뜨이게 늡니까. 기다림에 진절머리가 난 사람을 위해 패스트푸드를 즐기고 즉석복권을 선호하는 판에. 빨리빨리 문화가 자극적 미덕라면 서예는 분명 느림의 여유 미학입니다. 거기에 묘미가 있는 것입니다.
요즘은 디지털 시대이지요. 디지털 기술로 가상공간(cyberspace)이 출현하고, 나아가 다중매체 곧 멀티미디어 세상이 되었습니다. 사실 가상공간이 많아질수록 인간은 고독에 빠지게 됩니다. 인구가 많은 도시 사람들이 농촌 사람들보다 더 고독을 느끼듯이 말이에요. 인터넷을 통한 가상공간에 빠져 자신과의 대화가 절대 부족한 현대인에게 서예는 더 없는 좋은 반려자입니다. 자신과의 대화시간을 만들어주기 때문이지요. 디지털은 아날로그를 위한 수단일 뿐이라고 생각합니다. 컴퓨터가 웰빙의 노예이어야지, 웰빙이 컴퓨터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마찬가지로 인터넷은 서예 발전을 위해 활용되어야지, 인터넷을 위해 서예가 존재되어서는 안 된다고 봐요. 건강에 나쁘다고 기계문명을 버릴 수는 없잖아요. 오히려 기계문명을 통하여 세이브한 시간을 내어서 운동을 하죠. 컴퓨터를 통하여 세이브한 많은 시간에 붓을 잡아 보세요. 정신과 육체의 조화로운 운동이 됩니다.

서예에서는 음양(陰陽), 흑백(黑白), 강유(剛柔), 경중(輕重), 농담(濃淡), 장단(長短), 대소(大小), 소밀(疏密) 등의 환상적인 하모니가 있습니다. 노래방에서 누구나 노래를 부를 수 있듯이, 운동장에서 누구나 축구를 할 수 있듯이, 언제 어디서나 혼자서도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예술이 서예입니다. 일단 즐겨 보세요. 법에 너무 구속되지 말고, 붓꼴림대로 써 보세요. 절대로 지루할 틈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형태만 따라하지 말고 내용에 우선 빠져 보세요. 좋은 시문과 격언들을 접하고, 이를 일상에 접목시켜 보면 선비가 되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니까요.

서예를 함으로 얻어지는 이익으로 정서 순화는 기본이고, 교양을 쌓음은 과정이며, 짧은 인생과 좁은 육신을 벗어나 영원과 무한에 연결됨은 결과입니다. 그래서 저는 영원한 먹에 대한 신뢰의 개념으로 먹을 믿고 따르자는 ‘신묵(信墨)’이라는 모임을 만들고 5차례의 전시회를 가진 바 있습니다.

미래 서예가를 꿈꾸는 사람들에게 한 말씀.
솔직히 말하면 옛날에는 서예만 잘 하면 지위와 명예, 부귀와 영화가 따르기 때문에 종이, 붓, 먹, 벼루를 문방사보(文房四寶)라 했어요. 우리 선조의 경우 고독한 공부 시간의 벗이 되어 준다 하여 문방사우(文房四友)라고 하지만요. 그러나 오늘날은 서예에도 빈익빈, 부익부가 적용되어 붓 잡고 먹고 살기가 쉽지 않은 게 사실입니다. 그래서 서예를 부업 또는 취미로 권장하는 데에는 전혀 주저 없지만 직업으로 권하기에는 어려움이 따릅니다. 초중등학교의 서예 교과목 개설, 사회교육원을 비롯한 문화센터의 서예 전공자 임용, 대학 서예전공자에게 2급 정교사 자격증 수여 및 서예교사 임용 등등 여러 제도적인 뒷받침이 우선되어야 하지만 현실은 전혀 그렇지 못합니다. 순수 서예 작품 판매를 통한 돈벌이는 국민 관습상 그저 써 주는 것으로 인식되어 회화보다 어렵고, 학원 개설 또는 출강을 몇 곳에 뛰어 보았자 거마비 벌이밖에 되지 못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예를 전공하거나 서예로서 인생을 걸어보려는 젊은이를 만나면 애써 비전적으로 말해 주고, 제 딸의 서예 전공도 긍정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황우석 교수는 젓가락문화론을 얘기하지만 저는 붓문화론을 주창합니다. 붓 다루는 기술이 젓가락 다루는 솜씨보다는 엄청나게 차원이 높으니까요. 많은 학생들이 어릴 때부터 붓을 통하여 손 기능을 기른다면 IT강국 건설은 문제없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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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서 죽을 때까지 똑같은 점 하나 찍지 못하고 죽는단다. 역사 이래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한 일(一)자’를 써 왔지만 똑같은 일(一)자는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영원히 있을 수 없단다. 이처럼 엄숙하면서도 신선한 즐거움에 빠져 사는 아날로그를 표방하는 라이브 서예가 도정 권상호 선생. 매일 연애하는 기분으로 글씨를 쓴다는 그는 글씨를 쓰기 전의 그 설렘, 쓸 때의 그 흥분, 완성된 후의 그 벅차오르는 감동을 아느냐며, 30년이 넘는 붓질작업의 고충을 뒤로 한 채 이내 표정이 환해진다. 잘하고 못하고를 떠나 모든 사람들이 매일 밥을 먹으며 몸에 자양분을 공급하듯이 붓질을 통한 정신적 성장을 맛보게 하고 싶다는 라이브 서예가 도정 권상호 선생. 그의 서예 전도사로서의 역할을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