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단

2007 라이브 서예의 가치관 - 수원대학교 미술대학 특강 자료

 

라이브 서예의 가치관

(수원대학교 미술대학 특강 자료 - 2007. 5. 23/ 수원대학교 종합강의동 209호)
미술대학원 조형예술학과 서예 겸임교수 권상호


1. 서예(書藝)란 어떠한 예술이며 그 영역은 어디까지인가?


  시각의 대상으로서 물질적인 재료를 써서 공간에 이루어지는 예술, 이른바 회화․서예․조각․건축 따위를 조형 예술(造形藝術)이라 한다. 서예(書藝)는 특히 문자를 매체(媒體)로 표현하는 조형 예술이다. 다시말하면 먹물을 찍은 붓으로 종이 위에 점과 선을 교차시켜서 질서와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의 영역이다.

  글씨를 쓰는 데에는 실용과 예술의 두 측면이 있는데 서예는 예술적인 면이 강조된다. 서예에 나타나는 예술적 효과는 다음과 같은 요소 등이 혼연일체가 되어 절묘한 조형미를 자아낸다.

  첫째, 점과 선의 변화

  둘째, 필압(筆壓)의 강약(强弱)

  셋째, 운필(運筆)의 속도

  넷째, 먹의 농담

  다섯째, 문자 상호간의 비례와 균형

 

  일반적으로 서예라고 하면 실생활에 사용되고 있는 글자인 한글이나 한문을 모필로 써서 표현하는 예술 행위를 일컫지만, 넓은 의미의 서예에는 전각(篆刻)은 물론 사군자(四君子) 등의 먹그림[묵화(墨畵)]도 포함된다.



2. 서예의 특성은 무엇인가?


  서예가 일반 다른 예술과의 인간은 인류 역사와 함께 해온 글자를 보다 아름답게 나타내고자 노력해 왔다. 이에 따라 여러 가지 서체가 만들어지고 우리들의 생활과 깊은 관련을 가지면서 조형성, 예술성이 이루어져 왔다. 글씨를 아름답게 쓰고 싶어하는 마음은 사람의 정서를 순화하여 정신의 풍요를 가져오게 되므로 서예를 ‘심성을 표현하는 예술’이라고 일컬어 왔다. 간단한 점과 획 하나하나는 극히 단순하지만 이것이 결합되면서 무한한 조형의 아름다움이 창조되고 이의 연마를 통하여 심미적이고 창조적인 인간상 정립과 정서를 향유할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서예는 다른 예술과 비교해 볼 때 비로소 그 특성이 뚜렷이 나타난다.

  첫째, 문자를 대상으로 하기 때문에 표현의 일정한 질서 곧 서법이 있다는 점

  둘째, 종이 위에 먹의 흔적이 이루어 내는 공간 예술이라는 점

  셋째, 운필의 빠르고 느림에 따라 표현 효과를 달리하는 시간 예술이라는 점

  넷째, 운필의 일회성과 율동성으로 인한 기운생동의 예술이라는 점

  다섯째, 문자가 지닌 형태를 형상화하기 때문에 추상 예술이라는 점

  여섯째, 작가의 마음 상태, 필압의 강약, 먹의 윤갈, 운필의 속도 등에 따라 달리 나타나는 고도의 정신 예술이라는 점



3. 서예학습의 의의는 어디에 있는가?


  예로부터 선비들의 여섯 가지 교육 과목으로 육예(六藝)가 있는데, 곧 예(禮), 악(樂), 사(射), 어(御), 서(書), 수(數)가 그것이다. 그 중에 서예를  독립된 한 교과로 여길 만큼 서예는 조상들의 정신 수양에 있어서 필수적인 교양이자 학문이었다. 도(道)와 예(藝), 그리고 기(技)가 통합된 동양 예술의 극치로 보았다. 문자의 단순한 기록으로 볼 때는 기호에 불과하지만 그 문자를 통하여 조형성을 추구하고 조화와 율동을 찾으면서 정서를 순화하고 창조의 기쁨을 경험할 수 있다.

  우리의 선인들이 남긴 문화유산 중에서 가장 고귀한 정신이 담긴 전통 문화 예술의 하나가 서예이다. 이러한 서예의 우수성을 알고 익힘으로써 민족의 우월성과 자긍심을 깨닫고, 서예의 표현을 통하여 인격의 완성은 물론 실용성도 추구하여야 겠다. 국제화 시대에 우리들은 자칫 잊혀지기 쉬운 전통 문화로서 서예를 자율적으로 표현, 감상하고 나아가 창작함으로써, 주체적 자아의식을 지닌 창의력 있는 인간이 될 수 있다. 흰 종이를 보고 마음을 정화하고, 먹을 갊으로써 마음밭을 갈며, 붓을 움직임으로 중심을 잃지 않고, 글씨를 한자한자 정성스럽게 써 나감으로써 인생을 성실하게 영위해 나가며, 다 쓴 붓을 맑은 물에 깨끗이 씻음으로써 마음의 때를 씻는 데에 그 정신적 의의를 찾을 수 있다.



4. 라이브 서예의 가치관


  학문과 예술의 가치는 실천과 공유에 있다고 본다. 조형 예술의 한 영역인 서예도 이 범주에서 예외가 아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말하고자 하는 ‘라이브 서예’란 필자가 새로 만든 용어로, 라이브 콘서트 또는 라이브 쇼라는 말에서 보듯이 공공장소에서 실제 붓글씨를 써 보임으로써 서예가와 관중이 함께 즐기는 서예의 한 영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곧, 서예의 실천과 공유적인 면에서 붙인 말이다.

  굳이 한자어로 이름 붙인다면 휘호(揮毫), 낙서(樂書) 또는 생서(生書)라고 할 수 있다. 붓을 마음먹은 대로 휘두르며 글씨를 쓴다는 의미에서는 휘호(揮毫)이고, 글씨를 즐긴다는 점에서는 낙서(樂書)이고, 글씨를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본다면 생서(生書)라 할 수 있다. 사실 표구를 잘 하여 벽에 걸어 둔 멋진 글씨를 보는 것도 감흥을 주지만 점획을 긋는 매순간 손끝에 와 닿는 변화무쌍한 느낌과는 비할 바가 못 된다. 발레를 하는 사람들의 발 감각도 아마 서예가들의 손 감각과 상통하리가 생각한다.

  아는 만큼 볼 수 있고, 아는 만큼 들을 수 있다는 말과 같이 서예 또한 이에 대한 선행 학습이 있어야 더 큰 즐거움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서예도 음악과 같은 순간적이고 즉흥적인 전율을 주기도 하는 걸 보면, 서예는 분명 가장 음악적인 요소가 강한 조형예술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서예라 하면 조용히 방안에 홀로 앉아 날씨에 구애됨이 없이 즐기는 차분하고 내밀한 예술로 생각하겠지만, 라이브 서예를 접해 보면 그 역동적이고도 강한 메시지에 서예의 또 다른 예술적 측면을 발견하게 된다. 서재에 홀로 앉아 쓰는 글씨를 조용한 실내악이라고 한다면 라이브 서예는 많은 관중 속에 연주되는 대형 오케스트라라고 할 수 있다.

  서예의 출발은 아무래도 의사소통을 위한 수단으로서 문자언어로서 출발한 실용적 목적에 있었다. 그러나 인쇄술과 워드프로세서의 발달로 말미암아 서예의 실용적인 가치는 점차 줄어들고, 시각의 대상으로서 먹물이란 재료를 써서 화선지라는 공간에 이루어지는 예술적 가치가 부각되고 있다. 예컨대 건축이나 의류 등도 처음에는 실용적 목적에서 출발하였지만 오늘날은 이들도 예술의 한 영역으로 뚜렷이 자리매김하고 있다. 더구나 모든 생활 용품이 기능도 중요하지만 디자인 개념 없이는 존립할 수 없는 현실을 보면 실용과 예술의 경계가 없어진 느낌도 든다. 실용과 예술은 둘이 아니므로 실예불이(實藝不二)라 할 수 있다. 인간적인 면에서 풀이하자면 생활과 예술도 둘이 아니다. 삶의 예술화라는 말보다 삶 자체가 예술이어야 한다. 생예불이(生藝不二)라고나 할까.

  라이브 서예도 따지고 보면 일찍이 존재했었다. 천하제일의 행서로 꼽히는 서성 황희지의 '난정서'가 그 좋은 예이다. 난정서는 왕희지가 영화 9년(353년) 음력 3월 초에 많은 선비 및 청장년과 더불어 난정에서 모임을 갖고, 굽이굽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우면서 잠견지(蠶繭紙) 위에다 서수필(鼠鬚筆)로 단숨에 써내려간 324자의 라이브 서예의 명작이다. 당나라 서예가 장욱(張旭)은 술을 좋아해 취하면 미친 듯이 붓을 잡았으며, 머리카락에 먹물을 묻혀 글씨를 쓰기도 했으니 실로 라이브 서예의 대가라 할 수 있겠다. 우리나라의 김정희나 대원군 이하응 등도 라이브 서예의 대가들이다. 선비들이 모여 여흥을 즐기던 장소인 정자나 사랑방의 서예 행위가 모두 라이브 서예였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를 겪으면서 우리의 정자와 사랑방 문화는 점차 사라지고 따라서 라이브 서예도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애석하게도 감수성이 예민한 우리 청소년들이 성장과정에서 붓글씨 쓰는 장면을 접할 기회가 사라져버린 것이다. 단지 박물관이나 거실에 걸린 박재된 서예만 무심히 접할 따름이다. 까만 먹물을 듬뿍 찍은 붓으로 하얀 화선지 위에 점과 선을 교차시켜 가면서 즉흥적으로 창출해 내는 새로운 질서와 아름다움을 접해 보거나 체험할 기회가 없는 것이다.

  필자의 경우 어린 시절, 제삿날 밤이면 아버님께서 손을 깨끗이 씻고 황모필(黃毛筆)로 지방을 정성스럽게 쓰는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요즈음은 제사 때 쓰던 지방 글씨조차도 영정으로 대신하는 편이고 보니 가정에서 붓글씨 쓰는 장면을 접할 기회는 거의 사라졌다고나 할까. 미술 시간에 어쩌다가 접해 본 들 선생님으로부터 주의 사항 듣다가 기분을 망치고 만다. 

  그렇다. 아름답고 품위 있는 정상의 서예문화, 사라져가는 선비문화를 되살리는 길은 라이브 서예에 있다. 실제로 필자는 라이브 서예 활동을 통하여 주위로부터 많은 호응 얻고 있다. 서예에 나타나는 예술적 매력을 관중이 보고 느끼고 공감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점과 선의 끝없는 변화가 주는 멜로디감, 필압(筆壓)의 강약(强弱)이 주는 리듬감, 운필(運筆)의 속도 변화에서 오는 율동감, 먹의 농담에서 오는 신비감, 문자 상호간의 비례와 균형에서 오는 긴장감 등, 서예는 진정 인간의 영혼과 신체가 혼연일체가 되어 절묘한 조형미를 자아낼 때 그 절정에 이른다.

  일을 할 때는 일을 붙잡고, 여가를 만들어서는 붓을 붙잡자. 붓 잡고 붓 운전을 해 보자. 운필(運筆)의 핵심은 기운생동(氣韻生動)이다. 기운이 살아 움직이는 심획(心劃)을 긋기 위해서 골방을 박차고 대중 앞에 나아가 라이브 서예를 즐기자.<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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