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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단

<여행시집> 권두언

원심유장(源深流長)

 

도정 권상호

우연한 인연이 필연으로 이어져 늘 존경해 오던 정의화(鄭義和)의 전 국회의장님으로부터 연초에 전화가 왔다. 선친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초산(樵山) 정순용(鄭純鎔) 조부님께서 남긴 필사본 <여행시집(旅行詩集)>이 나왔는데, 번역을 부탁한다는 내용이었다. 나의 재능과 경험의 부족을 들며 극구 사양했으나 그동안의 의리와 인정을 앞세우며 하명(下命)하시기에 피할 도리가 없었다. 그리하여 가당치 않은 번역이 초산 선생의 주옥같은 한시(漢詩)에 누(累)가 되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구안자(具眼者)의 질타는 평생 지고 가야 할 짐으로 남았다.

초산 선생은 본관이 영일(迎日)로, 고려 사신으로 일본을 3차례나 다녀온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을 중시조로 모시고 있었다. 선생도 늘 흠앙(欽仰)해 오던 포은 선조처럼 일본으로 건너가 1930년 초부터 해방 후 1946년 2월까지 16년간 나라를 잃은 나그네의 설움과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피난 생활고까지 겪으면서도 학문 연구와 한시 작업만은 게을리하지 않으셨다. 그 결과 귀한 육필 원고를 세상에 남기게 되었고 마침내 대한민국의 국회의장까지 지낸 자랑스러운 손자에 의해 세상의 빛을 보게 되었다. 이 대목에서 ‘근원이 깊으면 흐름도 길다’라는 말을 한역하여 ‘원심유장(源深流長)’이라 제목을 붙여 본다.

도일할 때가 선생의 춘추 53세였으니 이미 지천명(知天命)이 넘은 때였다. 일제 강점기라는 시대적 아픔도 컸지만, 무엇보다 그 나이에 하나뿐인 형과 두 누이를 모두 저세상으로 먼저 보낸 아픔이 더했을 것이다. 시 내용으로 볼 때, 선생은 30여 년간 사서삼경을 바탕으로 서예, 농사, 의학, 한약, 음양에 이르기까지 참으로 많은 공부를 한 박람강기(博覽强記)의 천재였다. 특히 문학적 재능이 뛰어나 시경은 물론 한중(韓中) 역대 시인들의 시를 많이 읽으면서도, 특히 여러 시우(詩友)와 시를 주고받으며 시정(詩情)을 길러왔다. 더구나 선생은 일본의 심장부인 도쿄에서 매년 춘추로 두 차례 열리는 에도음사(江戶吟社)에 빠짐없이 참여하여 신문에 소개될 정도로 문명(文名)을 떨쳤다. 시에 더하여 실기(實記), 제문(祭文), 독후감(讀後感) 등의 산문도 끼어있어 읽는 재미를 더하고 있다. 

시의 내용을 살펴보면 오가는 여정에서 느끼는 감회, 신문물에 대한 경이로움, 고국에 대한 그리움, 제사를 통한 숭조(崇祖)의 마음, 가족과 친족에 대한 사랑, 돈독한 우정, 일본 풍광에 대한 느낌, 계절과 명절에 따른 감회, 늙음을 관조하는 애상(哀傷), 생일이나 회갑 등의 축하, 장기와 바둑 놀이와 같은 유희, 그림을 보고 쓴 제화(題畫), 꿈 이야기, 아호 이야기 등 일상에서 보고, 듣고, 느낄 수 있는 모든 것을 시재(詩材)로 활용할 수 있는 시적 변용 능력에 감복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초산 선생이 일찍이 시집으로 상재(上梓)하여 출판했거나, 아니면 한자 대신 한글로 시를 써서 수시로 발표했더라면 일제 강점기를 대표하는 시인의 한 사람으로 분명히 교과서에 등재되었거나 문단의 큰 관심을 끌었으리라 믿는다.

서예가로서 한시 번역은 글감을 캐내는 일과 같아서 매우 흥미로운 일이었지만, 다만 번역하면서 일본의 지명이나 인명 및 고전 속에서 출전을 확인하는 일은 어려웠음을 고백한다. 그리고 처음 번역은 직역에 의존했다가 다시 의역으로 바꿈으로써 젊은이들의 이해를 돕고자 했으나, 더러는 본뜻에서 멀어질까 염려되는 부분도 많았다.

번역에서 오는 많은 처음과 그에 따른 낯섦을 겪으며, 삼가 더 큰 지도와 격려를 기다립니다.

 

2022. 12. 붓마루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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