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자연, 인간 그리고 서예 - 제주서학회

   

자연, 인간 그리고 서예



                                     塗丁 權相浩(수원대학교 미술대학원 서예 겸임교수)


Ⅰ 들어가며


  태초에 自然(자연)이 생기고, 人間(인간)이 탄생하고 그리고 藝術(예술)이 태어났다. 이를 상생적 측면에서 보면 ‘자연은 인간을 낳고, 인간은 예술을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자연은 자신의 큰 태반 안에 삼라만상을 안고 있었지만 그 중에 가장 귀한 것으로 늦게나마 인간을 배태하고 출생시켰다. 다시 인간은 많은 도구를 만들고 제도와 윤리, 학문 등을 창출하고 있지만, 특히 예술 활동을 통하여 이 세상을 아름답게 가꾸고자 노력해 오고 있다.


  自然이란 사람의 손에 의하지 않고서 존재하는 것이거나 일어나는 일체의 현상을 일컫는다. 이를테면 하늘, 땅, 산, 강, 바다, 동물, 식물, 비, 바람, 구름 따위가 그것이다. 自然의 반대 개념으로 人爲(인위)가 있다. 자연은 인간의 손이 미칠 수 없는 그야말로 자연 그대로 자연이고, 예술은 인간이 만든 것이니까 인위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본디의 성질, 곧 本性(본성)을 일컬어서도 자연이라고도 하는데, 이는 자연이 인간에 선행하기 때문이다. 저절로 그렇게 되어 꾸밈이나 거짓이 없는 상태를 ‘자연스럽다’라고 한다. 예술이 인위적인 행위의 결과물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러운 것을 추구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이는 결국 인간의 예술 활동도 인간의 모태인 자연으로의 歸巢本能(귀소본능)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다.


十年(십년)을 經營(경영)여 草廬三間(초려삼간) 지여 내니,

나  간,   간에 淸風(청풍)  간 맛져 두고,

江山(강산)은 들일 듸 업스니 둘러 두고 보리라.


俛有地(면유지) 굽어보면 땅이요

仰有天(앙유천) 우러러 하늘이라.

亭其中(정기중) 이 중에 정자 서니,

興浩然(흥호연) 호연한 흥취가 이네.

招風月(초풍월) 풍월을 불러들이고,

揖山川(읍산천) 산천을 끌어들여,

扶藜杖(부여장) 명아주지팡이 짚고,

送百年(송백년) 한평생을 누리리라.


  면앙정 宋純(송순:1493∼1582)의 시조와, 그의 한시 俛仰亭三言歌(면앙정삼언가)이다. 두 편 모두 安貧樂道(안빈낙도)하면서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작가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상호 대립적이거나 정복 대상으로서 자연이 아니라 순응의 대상이자 기껏해야 공존 개념으로서의 자연이다. 인간은 자연을 모태로 태어나 자연 속에 살아가다가 죽으면 자연의 품속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래서 죽는다는 개념으로 ‘돌아가다’는 완곡한 표현을 쓰기도 하는 것이다.

  서예는 동방 예술의 하나로 태어나 이제 세계 예술 속에 생명력이 강한 꽃으로 피어나고 있다. 여기에서는 서예에 내재한 자연성과 인간성을 검토하여 이를 바탕으로 서예가 갖는 독자적인 예술성을 파악해 보고자 한다.



Ⅱ 서예의 자연성과 인간성


⑴ 서예 용구의 자연성

  우선 서예 용구의 자연성에 대하여 검토해 보자. 서예라는 예술 행위는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서예는 붓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먹을 매개로 하여 화선지 위에 조형화함으로써 이루어지는 예술이다. 여기에서 붓은 동물성이요, 종이는 식물성이며 먹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 탄소 알갱이, 곧 광물성이다. 글씨를 쓰는 서사 행위를 보면 모필 동물들이 화선지 초원 위를 달리면서 먹 알갱이 씨앗을 뿌리는 것과 같다. 먹 알갱이 씨앗이 골고루 잘 퍼지도록 물과 함께 뿌리는데 이것이 곧 水墨(수묵)이다. 화선지 위에 모필이 움직이는 것을 보면 영화 쥬라기 공원(Jurassic Park, 1993)이 연상된다. 화선지라는 초원 위에는 닥나무가 주종을 이루고 있고, 달리는 동물들 중엔 양떼들이 가장 많은 편이다. 때로는 족제비, 야생말, 청설모, 살쾡이, 이리, 닭, 인간까지 매우 다양한 동물들이 떼 지어 한가로이 풀을 뜯기도 하고, 바람을 일으키며 달리기도 한다. 羊毫(양호)는 다른 털에 비하여 길이가 다양하고 굴신이 원활하며, 무엇보다도 수묵을 많이 머금을 수 있기 때문에 인기가 있다. 이처럼 붓의 성질을 동물성이라고 한 것은 붓의 핵심인 毫가 동물의 털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붓에 있어서 필관은 주로 식물인 대나무로 만들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호의 작용을 돕기 위한 보조물이다. 벼루 또한 먹의 작용을 극대화하기 위한 보조도구인 광물일 따름이다.


⑵ 서예 용구의 인간성

  다음으로 서예 용구의 인간성에 대하여 살펴보자. 중국에서는 文房四寶(문방사보)라고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文房四友(문방사우)라고 한다. 중국처럼 문방사보라고 하면 유물적인 입장에서 붙인 명칭으로 다분히 실용 지향적이고 출세 지향적이지만, 우리처럼 문방사우라고 하면 유심적 입장에서 붙인 명칭으로 인간적인 냄새가 난다. 글쓰기란 고독한 작업이다. 그러니 붓, 먹, 벼루, 종이 따위를 의인화하여 벗으로 인식한 것이다. 얼마나 정겨운 표현인가? 남자 친구로서는 붓과 먹이 있고, 여자 친구로는 종이와 벼루가 있다. 부드러운 친구로는 붓과 종이가 있고, 딱딱하지만 분명한 친구로는 먹과 벼루가 있다. 비교적 밝은 색깔의 옷을 입은 친구로는 종이가 있고, 콤비를 즐겨 입는 친구는 붓이라 하겠으며, 어두운 색깔의 옷을 입고 명찰을 잘 달고 다니는 친구로는 먹이 있고, 검은 편이지만 호수 같은 너그러운 마음과 넓은 들을 가진 친구로는 벼루가 있다.


⑶ 毫(호) 속의 자연 현상

  글씨를 쓰는 순간 毫 속에는 엄청난 자연현상이 일어난다. 대기권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유사하다. 이를테면 수묵이 항상 흘러내린다고만 생각하면 오산이다. 逆入(역입)이나 回鋒(회봉), 過折(과절)이나 筆壓(필압)에 의해 먹이 필두로 올라가기도 하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호 속에서 수묵은 하강 작용은 물론 상승 작용을 하기도 한다. 먹물이 때로는 보슬비로, 때로는 소나기 또는 우박으로 내리기도 한다. 그리하여 호 속에 먹물을 오랫동안 유지하면서 글씨를 쓸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다양한 자연현상을 만들 수 있는 것은 서예 경력이나 작가의 기예에 따라 차이가 난다.


⑷ 運筆(운필)과 運身(운신)

  毛筆(모필)의 움직임은 아무래도 인간의 동작과 너무나 흡사하다. 붓머리는 흔히 筆頭(필두)라고 한다. 붓머리는 副毫(부호) 부분에 해당하는데 먹 저장 창고 역할을 하며, 사람으로 치면 머리에 해당한다. 사람 머리에는 뇌세포가 가득 차 있듯이 붓머리에는 먹물이 꽉 차 있는 것이다. 머리가 좋아야 두뇌 회전이 빠르듯이 붓머리에는 먹물이 충분해야 운필이 원활하다. 붓의 허리는 흔히 筆腰(필요)라 한다. 사람도 허리의 움직임이 좋아야 運身이 용이하듯이 붓도 붓허리 곧, 필요의 움직임에 따라서 다양한 운필이 가능하며 표현의 극대화를 가져올 수 있다. 우리가 어떤 일을 하거나 목적지에 가기 위해서는 꾸준한 허리 운동이 필요하듯이 글씨를 쓸 적에도 붓허리의 움직임은 절대적이다. 붓끝을 흔히 筆鋒(필봉)이라 한다. 사람으로 치면 발에 해당한다. 하나하나의 뾰족한 털끝[毛鋒(모봉)]이 모여 붓끝[筆鋒(필봉)]을 이룬다. 발바닥에 지문이 있어서 미끄러지지 않듯이 붓에는 만호의 붓끝이 뾰족하게 돋아 있어서 붓을 쓰러지지 않게 부축해 주는 것이다. 萬毫齊力(만호제력)이라 함은 사람으로 치면 氣(기)의 작용으로 서 있거나 걸어갈 때 몸의 균형을 잘 잡아서 넘어지지 않도록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손가락 끝에 나무막대기를 세워놓고 쓰러지지 않도록 균형을 잡아 보면 손을 끊임없이 움직여야 함을 알 수 있다. 그때 우리는 전신으로 지구 중력과 씨름하는 균형감각을 느낄 수 있는데, 그것이 곧 氣이다. 인간은 태어나서 똑바로 서기까지 1년 정도 걸린다. 하지만 서서 걷기까지 어느 정도 숙달되면 지형 변화에도 불구하고 무의식적으로 잘 적응하며 걸을 수 있다. 붓도 매 한가지로 무의식중에도 지면 위에서 만호제력을 이룰 수 있을 때 운필을 잘 할 수 있는 것이다.


⑸ 서체, 나무 그리고 인간

  이상에서 보듯이 서예에는 자연, 인간과 더불어 불가분의 역학관계에 있다. 각 서체에 따라 서로 다른 느낌을 자연의 하나인 나무의 다양한 형태와 비교해 보고, 또 인간의 여러 모습과도 견주어 보면 다음 도표와 같이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서체

나무

인간

篆書(전서)

뿌리와 줄기[根幹]

부동의 정면 자세

隸書(예서)

분화된 가지[分枝]

두 팔을 펼친 자세

楷書(해서)

맑은 날의 나뭇잎

표정이 있는 측면 자세

行書(행서)

바람 부는 날의 나뭇잎

다양한 표정으로 걸어가는 모습

草書(초서)

폭풍우 속의 나뭇잎

뛰면서 온갖 재주를 부리는 모습


⑹ 서예와 知情意(지정의)

  서예를 잘 하기 위해서는 인간의 세 가지 정신적 요소인 知情意 - 知性(지성) ․ 感情(감정) ․ 意志(의지) - 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예술 활동은 감정의 주된 작용으로 이해되지만 서예는 지성의 바탕과 의지의 버팀이 없이는 성공할 수 없다. 글씨를 쓰면서 늘 잊지 말아야 할 것은 문학, 역사 및 철학에 대한 소양을 기르는 일이다. 곧 지성을 길러야 한다는 것이다. 근년에 와서 형식만 있고, 내용이 없는 서예 때문에 많은 언론 및 일반인들로부터 서예가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전통적으로는 서예인은 그 시대를 대표할 수 있는 최고 지성인 그룹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떠한가. 지성인들 중에는 필수 교양이었던 서예를 피하고 오히려 악필을 선전하는 사람이 많고, 서예인들 중에는 학문은 하지 않고 글자 모양에만 매달리고 있는 사람이 많은 실정이다.

  지성은 머리에서 총기를 낳고, 감정은 가슴에서 심기를 낳는다. 예술 활동을 잘 하기 위해서는 차가운 머리와 뜨거운 가슴이 요구된다. 차가운 머리가 강하면 너무 계산적인 작품이 나와서 못쓰고, 뜨거운 가슴에서 나오면 의욕만 넘치는 격식 없는 작품이 되고 만다. 상황에 따라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일반적으로 지성과 감정의 적절한 조화가 훌륭한 작품을 창출할 수 있다고 본다. 그리고 서예란 예술은 특히 잘 써 보겠다는 의지 또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다. 결과적으로 知와 情의 만남으로 서예의 꽃을 피울 수 있고 意의 거름으로 그 열매를 맺을 수 있다고 하겠다.


⑺ 서예와 신체 단련

  그리고 서예활동의 현실적인 문제에 있어서, 흔히 서예를 통하여 인간의 心身(심신)을 수련한다고 한다. 이는 쓰는 내용을 통하여 심성을 닦고, 쓰는 동작을 통하여 신체를 단련하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전자에 대하여서는 쉬이 수긍하지만, 후자에 대하여서는 흔히 의문을 단다. 작은 글자를 쓰면서 신체 단련까지는 기대할 수 없지만, 큰 글자를 쓸 때에는 여간 힘든 게 아니어서 신체 단련에 도움이 된다. 역으로 체력을 길러야 글씨를 잘 쓸 수 있다고도 볼 수 있다. 이는 씀으로써 신체를 단련하고, 신체를 단련함으로써 잘 쓸 수 있다는 상호보완적 관계로 설명할 수 있다. 腕平(완평)을 위해서는 팔에 새 근육이 붙어야 하고, 좌우 균형을 잡기 위해서는 왼팔도 상당한 힘을 길러야 하며, 서서 쓸 때에는 몸으로 써야 한다는 점을 고려할 때, 서예는 전신 수련에 큰 도움이 된다고 본다. 왕희지가 무관이었음에도 글씨를 잘 썼다는 것은 신체 단련과 서예는 떼놓을 수 없는 상관관계가 있다는 증거가 된다. 아니면 그가 무관이었기에 더욱 잘 써서 書聖(서성)의 위치에 오를 수 있었다고 본다. 따라서 서예와 무용, 서예와 체조, 서예와 달리기, 서예와 탁구, 서예와 골프, 서예와 멀리뛰기, 서예와 등산, 서예와 야구, 서예와 축구 등 모든 운동이 서예와 상호 보완관계에 있다. 발재간의 정수가 축구라면 손재간의 정수는 서예라고 해도 손색이 없다.



Ⅲ 성숙과 서예 학습


⑴ 서서 걷기와 轉折(전절)

  인간은 태어나 일어서기와 홀로 걷기를 배우는데 상당한 기간이 걸린다. 일어서는 목적은 걷기 위해서다. 홀로 서서 마음대로 걸을 수 있을 때, 비로소 가고자 하는 목적지까지 어디든 갈 수 있다. 자동차운전면허증을 따기만 하면 길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이치와 같다. 운전면허증를 딸 때까지 배운 것이라곤 고작 직선 이동인 L, T자 코스와, 곡선 이동인 S자 코스 밖에 없다. 서예에서는 직선 이동을 꺾기[折]이라 하고, 곡선 이동을 굴리기[轉]이라 할 따름이다. 일어서야 길을 걸어갈 수 있듯이, 호를 세울 수 있어야 점을 찍을 수 있고, 어떤 획이든 마음대로 구사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밥을 먹어야 힘을 얻고, 자동차는 기름을 먹어야 에너지를 얻듯이, 붓은 먹물을 먹어야 제 구실을 할 수 있다. 인간이 하루 종일 곤하게 일하고 나서는 샤워하고 두 다리를 뻗고 자듯이, 붓도 내처 서서 일하다가 잠을 잘 때에는 깨끗이 샤워하고 난 뒤에 필봉을 가지런히 뻗고 자야 한다. 그냥 硯池(연지)라는 벼루 호수의 유혹에 끌려 씻지도 않고 벌렁 자빠져 자다가는, 꿈속에 어김없이 가위에 눌려 쉬이 일어날 수 없게 된다.


⑵ 생활과 書寫(서사)

  인간이 성장하여 사회생활을 할 수 있는 최소한의 학습 활동을 生活可能級(생활가능급)이라고 하자. 이는 일반 동물들과 같이 본능적으로 단순 감각 논리에 따라 살아가는 것이나 다름없는 정도이다. 일어나 움직이다가 배고프면 밥 먹고, 졸리면 잠자는 수준이다. 어쩌면 이 정도라도 최소한의 오줌똥 가릴 정도의 인간구실을 한다고도 할 수 있겠다. 서예 학습에 있어서는 이러한 첫 단계를 書寫의 단계라고 한다. 서사란 의미 전달만을 위하여 단순히 약속된 기호를 쓰는 행위라고 정의할 수 있다. 뜻 그대로 단지 쓴다는 목적 외에 다른 것은 없다.


⑶ 적응과 書法(서법)

  하지만 인간으로서 단지 먹고 자고만 해서는 사회 공동생활을 영위할 수 없다. 가정생활에서는 가정생활의 법도가 있고, 직장생활에서는 직장생활의 법도가 있으며, 사회생활에서는 사회생활의 법도가 있는 것이다. 각자의 몸이 위치하고 있는 장소에서 최소한의 법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인간의 성숙 단계를 適應可能級(적응가능급)이라고 하자. 이런 사람은 기본적인 법을 잘 지키고 공동체 구성원의 일원으로서 자기의 소임을 잘 해 나갈 수 있는 사람이다. 서예학습 단계에 비유한다면, 법을 지켜가면서 쓸 줄 안다고 하여 書法 단계라고 일컫는다. 서법이란 서예3법인 劃法(획법) ․ 字法(자법) ․ 章法(장법)에 맞게 쓸 수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명칭으로 이 정도까지 이르기도 쉽지 않다.


⑷ 개성과 書藝(서예)

  그런데 인간은 眞善美(진선미)를 꿈꾸며 이왕이면 예술적인 삶을 추구한다. 그저 이 세상에 태어나 쇠고랑 차지 않을 정도로 법을 지키고, 주어진 세금 꼬박꼬박 내면서 한 평생 평범하게 살아갈 수도 있다. 하지만 인식 있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무개성적인 삶보다, 그래도 나만의 빛깔과 향기를 지닌 개성적인 삶을 추구하고 또 누리는데, 이를 진선미를 바탕으로 한 個性自樂級(개성자락급)이라고나 할까. 서예학습 단계에 비유하면 書藝 단계로 볼 수 있다. 이 정도의 삶이라면 주위 사람들의 찬사를 받으며 남의 부러움도 살 수 있다. 서예의 단계는 작가 나름의 남다른 개성적 빛깔과 향기가 우러나는 예술적 경지이며, 이 단계의 작품은 시간적으로 오래도록 공간적으로 멀리까지 그 생명력을 지니고 있다.


⑸ 성인과 書道(서도)

  요컨대 역사에 진정한 이름을 남긴 훌륭한 분은 누구인가. 우리는 그들을 성인이라고 부른다. 그들은 남다른 지혜와 덕망으로 자신의 인생을 아름답게 영위했음은 물론, 시공을 초월하여 세상 사람들에게 꿈을 심어주고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주는 그런 사람들이다. 그들은 무엇보다도 리더로서 희생과 봉사를 아는 분들이었다. 이 단계는 범인으로서는 도저히 넘볼 수 없는 至高至純級(지고지순급)의 단계이다. 서예가 보여줄 수 있는 이 마지막 단계를 書道(서도) 단계라고 한다. 기실 서도라는 말 자체로 충분하며, 단계라는 말을 붙이는 것은 어울리지 않는다. 文(문) ․ 史(사) ․ 哲(철)을 바탕으로 뼈를 깎는 아픔으로 정진한다고 해도 반드시 다다를 수 있는 경지가 아니다. 하늘이 내는 경지라고나 할까. 인간의 손을 거쳐 나온 예술이지만 너무나 자연스러운 경지 - 자연과 인간과 예술이 합일된 그런 경지 - 그것이 바로 書道의 경지인 것이다.


⑹ 최고 지성인으로서 서예가

  글씨 쓰는 일을 한국에서는 書藝라 하고, 일본에서는 書道라 하며, 중국에서는 書法이라고 하는데, 이것은 서예학습의 성숙 단계를 나타내는 용어가 아니라, 書에 관한 자국어의 범칭이다. 여기서 말하는 書寫(기호로 쓰기) -> 書法(법대로 쓰기) -> 書藝(아름답게 쓰기) -> 書道(도 통한 글씨)의 단계는 서학 단계이다. 서예는 이러한 어려운 과정을 겪으면서 사람과 함께 성숙해지기 때문에 지난 오천년 동안, 서예인은 그 사회의 하이클래스의 일원이자 최고 지성인으로서 정점에 서 있을 수 있었다.


⑺ 合自然(합자연)에 이르는 길

  자연, 그것은 저절로 그렇게 되는 모양이다. 사람의 힘을 더하지 않는 天然(천연) 그대로의 상태이다. 인생도 천진무구한 천연 그대로의 상태가 좋다. 본성 그대로 순수한 모습으로 이웃과 서로 조화를 이룰 때, 그곳은 낙원이다. 예술도 너무나 인간적이면서도 위선이나 수식이 없이 자연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이른바 合自然에 대한 강렬한 희구와 실천만이 도의 경지에 이를 수 있는 길이라고 믿는다. 그런데, 形(형)을 잡으려 하면 魂(혼)이 날아가고, 魂을 잡으려 하면 形이 날아가 버리고 만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잡을 수 있을 때, 비로소 書道의 경지에 한 발자국 내딛을 수 있을 것이다. 요는 도에 드는 순간, 작가 자신은 자기가 도에 든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이상에서 언급한 인간 성숙 단계와 서예 학습를 비교하여 다음과 같은 도표를 만들 수 있다.


인간의 성숙 단계

서예의 학습 단계

直立步行(직립보행)- 직립인

轉折(전절)- 기본적 운필

生活可能(생활가능)- 생활인

書寫(서사)- 기호적 글씨

適應可能(적응가능)- 적응인

書法(서법)- 준법적 글씨

個性自樂(개성자락)- 개성인

書藝(서예)- 미적인 글씨

至高至純(지고지순)- 성현인

書道(서도)- 합자연 글씨



Ⅳ 서예의 영원성


⑴ 시간, 공간 그리고 인간

  人間(인간)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해 時間(시간)과 空間(공간)의 개념과 관련하여 인간이란 명칭을 분석해 보고자 한다. 시간, 공간과 마찬가지로 인간에게도 ‘間’자를 쓰고 있는 사실에 주목해 보자.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로서 인간관계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間자를 붙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으나, 그보다는 시간과 공간 앞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한 사람도 없고, 또 시간과 공간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삶이 인간의 삶이기 때문에 시간, 공간이라고 할 때의 間자를 붙여 ‘人間’이라고 하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 곧 시공을 극복하기 위한 인간의 노력이 인류문화의 발달을 낳았다. 라디오, 텔레비전, 전화, 인터넷 등이 모두 시간과 공간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에서 발명한 것이다. 인간은 또한 사라질지도 모를 소중한 사상이나 이론을 먼 곳까지, 후세에까지 전하기 위하여 문자를 만들어 사용하고 있다. 우리는 문자를 통하여, 유럽 사람과 생각을 나누고, 추사 선생도 만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문자는 시간과 공간을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래서 시간, 공간에다 인간을 합쳐 三間(삼간)이라는 새로운 명칭을 붙여 본다.


⑵ 은근하고 지속적인 예술로서 서예

  컴퓨터피아 시대에 키보드만 누르면 여러 가지 글씨체가 실현되는 편리한 시대가 되었다. 컴퓨터가 음성까지 인식하여 문자화하는 시대가 되었다. 이에 비하여 서예는 준비 과정에서부터 표구하여 작품으로 완성하기까지는 상당한 인내와 시간이 요구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서예를 알고자 하고, 좋아하고, 즐기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서예에 뭔가 깊은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생각건대 서예의 매력은 파면 팔수록 무겁되 어둡지 않은 빛깔로 다가오며, 은근하고 지속적인 쾌락이 가슴깊이 젖어드는 데 있다. 음악이나 무용 같이 즉흥적이고 쾌락적인 예술도 있다. 그러나 서예나 문학과 같은 예술은 상대적으로 은근하고 지속적인 예술이라 할 수 있다. 서예는 참맛을 우려내기까지 기술적인 면에서도 오랜 세월이 요구된다. 게다가 서예란 우선 인간됨됨이를 바탕으로 학문의 자양분을 줄곧 공급받아야만 평생 접할 수 있는 예술이기 때문에 더더욱 어렵다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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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장성유
도정 선생님, 잘 읽고 갑니다.
세번 죽는 나무와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 먹의 예술을 그려봅니다.
장문구
한 말씀 한 말씀이... 가슴에 스며듭니다.
오늘도 그 스며드는 느낌이 그리워서 찾았습니다.
권상호
다시 추가 보충하여
<월간 서예> 12월호에 소개됩니다.
장문구
<월간 서예> 12월호 보았습니다
호평(好評)이 수이 예상됩니다...따로 오려서 보관해야겠어요~* ^^
권상호
쑥스럽구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