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백운 이규보론

교과목명 : 古典文學思想史 硏究

지도교수 : 金鎭英 敎授님

제 출 자 : 박사4기 權相浩

제 출 일 : 2002. 12. 20.


白 雲  李 奎 報 論


  1. 人間 李奎報

  2. 李奎報의 文學思想

  3. 李奎報와 文學作品

  4. 李奎報의 漢詩

  5. 李奎報의 詠物詩

     (1) 竹

     (2) 菊

  6. 李奎報와 詩魔

  7. 李奎報 文學의 特性


  1. 人間 李奎報

  白雲居士 李奎報(1168~1241)은 고려전․후기의 분수령이었던 무신집정기를 가장 적극적으로 살아 간 新興士大夫의 대표적인 文人1)이었다. 그는 우리 나라 漢文學史上 신라의 崔致遠, 고려의 李齊賢, 조선의 申緯와 함께 四大詩人2) 중의 한 사람이었고 風流氣槪가 있는 사람으로 琴․詩․酒 세 가지를 지나치게 좋아하여 三酷好先生3)이라 하였고 城東 奉香里 西村에 초당을 짓고 止止軒이라 堂號하고 貞祐七年에는 自娛堂을 經營하였다. 그후 入朝한 후에 그의 풍류와 기개가 雅直함으로 말미암아 人中龍이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인품이 高邁하였다.

  父代부터 中流에서 上流階層으로 浮上한 新進士類 가문의 진취적인 氣風이 백운의 자아의식 형성에 영행을 주었다. 탄생 3개월 후의 神人의 예언, 청소년기에 詩名을 드날린 일, 22세시 奎星의 異報 로 司馬試에 장원할 것을 예지한 일 등이 自我意識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시문으로 국왕을 도와 국가에 봉사하고 명성을 드날릴 사람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고, 이러한 自己充足的 예언 자체가 예언 실현을 위한 강력한 신념이 되었으며, 自我實現을 위하여 정력적인 노력하는 원동력이 되었다.4)

  시문에서는 자신이 當代의 최고라는 강한 자아의식 때문에 남을 깔보게 되어 放曠하다는 세평을 듣게 되었고, 그 때문에 출세에 제약을 당하기도 하였다. 白雲의 인품이 훌륭한 것과 대조적으로 그의 인격에 대한 부정론도 없지 않다. 그는 관념적, 체험적인 두 경험의 처세이념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난해한 인물로 평가되기도 한다.5)

  換言하면, 李奎報는 武臣政權下에서 무인들에게 阿附함으로써 지위를 구했던 御用學者로 지목되기도 하고, 무신정권에 의해 파괴된 門閥貴族의 保守性과 特權意識을 대체할 새로운 文學의 先驅者요 新興士大夫의 主役으로 인식되기도 한다.

  그의 문학과 삶에 이러한 두 요소 공존함을 부인할 순 없다. 시작에 대한 순수한 열정을 묘사한 시가 있는가 하면 벼슬을 구하기 위해 武人執權者에게 올리는 求官의 시도 보인다. 민중에 대한 애틋한 사랑과 함께 날카로운 現實批判을 담은 작품이 있는가 하면 民亂(慶州 民亂)을 일으키는 農民을 욕하고 최씨정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작품들에 접하기도 한다. 宗敎的 沒入을 동반한 순수한 親自然을 노래하는 듯하나 그 속에서도 宦路에 대한 열망으로 인해 一時的 逃避處로서 자연을 인식하는 듯한 인상을 지울 순 없다.

  그는 대단치 않은 地方官吏의 가문에서 태어났고 武臣亂으로 별 피해를 입지도 않았다. 그래서인지 벼슬을 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고 竹林高會들이 속으로는 벼슬을 貪하면서 겉으로는 超脫한 듯한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그래서 가입 요청을 거절한다. 그는 적극적으로 官界에 진출하여 자신의 재능을 발휘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물질적인 욕망을 추구하는 무리들을 천하게 여겼고 세속에 초연한 隱遁者를 부러워하였다.

  그는 자신이 당대 제일이 문장가라 생각하여 타의 추종을 불허하였고 새로운 類의 시문을 창작하는 자가 있으면 그도 同類의 시문을 지어 기어이 상대를 꺾고야 마는 好勝之癖을 가지게 되었다. 그의 走筆詩, 廻文詩, 假傳, 詞 등의 창작 동기도 여기에 있었다.6) 그의 이러한 자부심과 부단한 노력의 결과 70代에 詞를 배워 고려 최초로 9수의 詞를 짓게 되었다. 또한 문장은 영원히 간직되어야 한다고 생각하여 자기 문집 편찬에도 적극 노력하였다.

  그의 문학관은 新意論으로 요약될 수 있는데, 이인로가 옛 名文을 읽고 문학 수업을 통해 훌륭한 작품이 나올 수 있다는 用事論을 편데 반해 이규보는 形式이 다소 粗惡하더라도 품은 뜻이 깊으면 뛰어난 작품이 될 수 있다고 했다. 물론 新意와 用事가 배타적인 별개의 것은 아니나 신의는 내용을 우선시하는 것으로 규격화된 틀을 넘으려 한다.

  그는 또한 자기 삶의 경험에 입각해서 현실을 인식하고 시대적이거나 민족적인 문제의식과 만나 복잡한 그의 性情을 다양한 형태의 문학으로 표현하였다. 예를 들면 <東國李相國集>, <白雲小說> 그리고 <麴先生傳>, <淸江使者玄夫傳> 등의 假傳體, 農民詩 등이 그것이다.

  그는 농민시에서 농민들의 고통을 절실히 표현하고 苛酷한 收奪에 대해 분노한다. 그의 농민시는 金克己에게서 볼 수 있는 농촌의 다소 閑暇로운 모습은 거의 없고 가혹한 현실과 그에 대한 激烈한 忿怒를 보여준다. 그런데 김극기가 보여주는 농촌에 대한 진정한 사랑에 기초한 현실 비판이 아닌 다소 관념적인 과격성이 엿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한계가 그로 하여금 慶州民亂에 대하여 자신의 벼슬에 대한 미련을 이기지 못하고 민란 가담 농민들에 대한 비난의 시를 쓰게 하고 진압에 나서게 한 원인이 된 것이 아닌가도 생각된다.

  한편 이규보의 자연시는 인위적이지 않은 조화와 질서의 세계를 보여주며 아름다움을 묘사하고 있는데 이규보가 노년에 들수록 자신의 생활에서 느끼는 한가한 여유를 많이 읊었는데 이것은 자신의 사회적 경제적 안정과 함께 찾아오는 것으로 일종의 自然親和感의 표현이다. 젊었을 때의 자연시는 벼슬길이 뜻대로 되지 않은 상태에서 一時的 逃避處로서의 성격이 있었다.

  이상을 통해 볼 때 이규보가 아부적 御用學者라는 비난이 부분적으로 타당할지는 모르지만 그가 많은 훌륭한 문학 작품을 통해 민족의식, 농민에 대한 관심 등을 보이고 시, 비평 등에서 고려 후기 문학을 풍부히 한 면에서 새로운 文學의 先驅者로서의 評價를 받아야 함은 자명하다.

  

  이규보의 대표적 작품으로는 白雲小說, 東國李相國集, 農民詩, 賦(春望賦, 畏賦, 夢悲賦, 放蟬賦, 祖江賦), 假傳體(麴先生傳, 淸江使者玄夫傳) 등이 있다.


  2. 李奎報의 文學思想7)


(1) 緣情而發, 證言으로서의 文學

    ① 그는 글의 연원을 정에 연유한 마음의 격동에 두고, 일단 마음속에 격함이 있으면 자연히 발로될 수밖에 없는 것이라고 하여 ‘緣情而發’로서의 문학관을 말하고 있다.

    ② 그는 ‘詩魔’에 일단 매이면 병중에도 쓰지 않고는 못 배겨내는 것이 시라고 <次韻和白樂天病中十五首幷序>에서 고백하고 <詩癖>에서는 眼高手卑의 고통을 말하고 있다. 그의 시벽은 <三魔詩中>의 <詩魔>에서 마침내 「詩魔」에 대한 관심과 대결로 이어진다. 그는 천성적 시인으로, 작시의 動因으로서의 感興을 살려 그것이 일어날 때마다 시를 지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는 <驅詩魔文效退之送窮文>에서 시마의 죄를 들고 驅逐할 결심을 한다.          ㉠ 시는 사람을 들뜨게 한다.

        ㉡ 造化, 神明의 靈妙함을 누설한다.

        ㉢ 거침없이 취하고 읊어 끝없다.

        ㉣ 賞罰을 멋대로 한다.

        ㉤ 靈肉을 다 야위게 한다.

  결국 그는 시마를 구축하지 못하고 夢中에서 시마의 항변을 듣고 그에 굴복하여 오히려 스승으로 모시기로 한다.

   ③ 한편 이규보는 문학이 證言이기도 해야 한다는 文學思想을 견지하고 있었다. 26세 때에 國家, 民族意識의 바탕에서 지은 英雄敍事詩 <東明王篇>에는 이 작품의 創作動機를 밝히고 있는 의 幷序가 붙어 있다. 거기에서 그는 동명왕 사적이 잊혀져서는 안될 신성한 史實이고 따라서 우리나라는 실로 聖人이 創始한 나라임을 證言하려는 사명감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고 있다.

  「幻이 아니고 聖이며, 鬼가 아니고 神이었다.」

  이 글에서 인용에서 우리가 주목할 것은 그의 증언이 단순한 사실의 기록이라는 차원을 넘어서 있는, 믿음의 해석을 통한 證言이었다는 점이다. 역사가는 현실적인 사실만을 기록하여 증언한다면, 문학인은 현실적이 사실의 기록 이상의 재해석된 기록을 남기는 존재라는 인식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곧 文學的 證言이라 할 수 있다.

  또 그는 27세 때에는 「開元天寶詠史詩」 43수를 썼는데 여기에서도 창작동기를 밝힌 병서가 있는데, 즉 국가의 흥망치란이 군주엑 달려 있음을 역사에 유명한 당명황의 사적을 통하여 재음미하면서 이를 亂局에 처한 고려왕조가 심각하게 받아들여야할 교훈으로 증언의 방법을 채택하여 제시한 것이다.

  또한 이규보는 당대 고려사회의 어지러운 사회상과 기아에 허덕이는 농민, 농촌의 실정을 사실적으로 묘사하여 당대 사회형편의 심각한 파탄상을 냉철하게 주시하고 「路上棄兒」나 「代農夫吟」에서 다분히 비판적 언사의 직설적 표현으로 타락한 모정, 부패한 관원들의 가혹산 침탈을 그리고 있는데 비하여, 「望南家吟」같은 작품에서는 사치를 극한 지배층의 삶과 피폐를 극한 민중의 삶의 양극화 현상을 대조적으로 묘파하고 있다.

  이처럼 이규보는 문학이 사실과 그 이상이 역사상의 교훈, 황폐한 삶의 실상가지 두루 증언하는 기능을 발휘해야 한다는 문학사상을 견지하였던 것이다. 감흥에서 시의 본원과 본질을 추구하였다면 증언을 통해서는 시인의 사명과 역할이 무엇인가를 실증하였다고 하겠다.


(2) 語意 創新論의 主唱 - 新意(주제, 사상). 新語

  이규보의 시문 창작론의 핵심은 <동국이상국집>의 「論詩中微旨略言」과 「答全履之論文書」에 있다.  이 두 글은 洪萬宗의 「詩話叢林」의 첫머리에 실려 있는 <백운소설>에도 시화로 재평성되어 수재되어 있다. 즉 여기에는 「논시중미지약언」을 1)시유구불의체 2)시이의위주 3)시의 여러 體格 4)시의 琢磨 이상 4장으로 구분하여 놓았고, 「답전이지논문서」의 일부를 떼어내서 5)작신어 一章을 삼고 있다. 편의상 백운소설의 분장 형태를 따라서 이들 장별 내용을 검토하여 체계화하였다.


  ① 詩有九不宜體

  여기에서 제시한 「구불의체」는 이규보 자신이 시를 창작해가는 가운데 체험으로 깨닫고 또 깊이 사색하여 체득한 바로서, 시의 여러 가지 병폐를 들어 이를 모두 극복한 뒤라야 더불어 시를 논할 수 있다고 설파한 것이다.

  시에는 아홉 가지 좋지 못한 체가 있다. 이것은 내가 깊이 생각해서 스스로 터득한 것이다.

    ㉠ ‘用事와 독창성’(載鬼盈車體)-한 편 안에 옛 사람의 이름을 많이 쓰는 것.

    ㉡ ‘換骨奪胎’(拙盜易擒)-옛 사람의 意境을 따라 쓰는 것

    ㉢ ‘押韻’(挽弩不勝)-근거없이 强韻을 쓰는 것

    ㉣ ‘押韻’(飮酒過量)-압운이 지나치게 어긋난 것

    ㉤ ‘難解性’(設坑導盲)-險字를 써서 사람을 곧잘 미혹시키기 좋아하는 것

    ㉥ ‘論理性’(强人從己)-말이 순하지 않은데 억지로 인용하는 것

    ㉦ ‘斬新性’(村父會談)-상말을 많이 쓰는 것

    ㉧ ‘倫理性’(凌犯尊貴)-丘軻를 범하기를 좋아하는 것

    ㉨ ‘詩的 形象化’(莨莠滿田)-修辭가 거칠어도 깎아 버리지 않는 것

  등 한 편의 시를 창작함에 있어 실패하기 쉬운 문제점들에 대하여 두루 고심하였고 그것을 비유적 방법을 통하여 명징하게 제시해 놓고 있다. 그가 대시인이 되기까지의 수련 과정과 트인 眼目을 약여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② 詩以意爲主

  이것은 이규보가 시를 논하는 자리에서 가장 앞세우고 있는 문제로서 한편의 시를 창작하는 과정에서 맨 먼저 요구되는 것이 ‘設意’임을 강조한 것이다. 그런데 意란 氣(氣象, 才氣)를 위주로 하는데 그것은 타고난 天分이요 性情, 氣質이기 때문에 결국 天稟에 딸린 것으로 인위로 이룰 수 없는 것이라고 하였다. 즉 그는 시인의 천분적 재질을 중시하였고 그러니 재기를 타고 나야만 위대한 시인이 될 수 있다고 한 것이다. 그리고 綴辭의 문제도 깊이 생각해야 할 바임을 말하고 있다.

  ③ 시의 여러 體格

  이것은 대시인의 경지를 말한 것인데, 淸警, 雄豪, 姸麗, 平淡한 體格이 경우에 따라 두루 적절하게 구사될 수 있어야 함을 지적한 것이다. 天賦의 才質에 바탕한 氣象이 높은 경지와, 後天的 功力에 따른 세련된 격조가 결합되었을 때 비로소 뛰어난 시가 산출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④ 시의 琢磨

  이것은 한 편의 시를 지은 뒤 발펴하기까지에 시인이 취할 자세를 말한 것이다. 우선 主見으 바탕에 서서, 타인의 비평, 질정을 받아 들이며, 또 철저한 推敲를 거쳐서 객관화한 뒤에야 작품을 세상에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⑤ 作新語

  이규보는 「답전이지논문서」에서 고인의 작품은 섭렵하는 학적 수련단계의 필요성을 말하면서 더 나아가 독창적인 자기시의 세계를 수립함이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임을 주장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가 시에 대해 위의 글에서 논한 바를 종합해 본다면 그것은 ‘시창작론’에 귀결되고 있음을 보여 주는데, 한편의 시가 이루어져 발표되기까지를 단계별로 정리하여 보면 대략 다음과 같이 되겠다.

     ㉠ 詩想 단계 ; 意氣를 중시하였고 그것은 천성적 재질에 달렸다고 보았다.(天-氣-意: 詩想)

     ㉡ 構想 단계 ; 집착하지 말고 변화자재한 구상이 요구됨을 지적

     ㉢ 綴辭 단계 ; 의기와 철사의 이상적인 결합에서 또 청경, 웅호, 연려, 평담 등 중체를 구비할 때 우수한 체격을 형성한다고 보았다. 그 자신은 독창적 新語를 지어내는 쪽을 택했다.

     ㉣ 推敲, 發表 단계 ; 주견의 바탕에서 타인의 批評, 叱正을 받아들이고, 철두철미한 추고를 거쳐서 객관적으로 보아 병폐, 하자가 발견되지 않을 때에 비로소 작품을 세상에 내 놓아야 한다고 하였다.

  이규보는 新語를 지어낼지언정 표절은 가장 염기하였다.

  결론적으로 시론을 통해본 이규보의 문학사상은 어느 한쪽에 편벽되지 않고 ‘設意’나 ‘詩語’ 사용에 있어서 모두 個性과 獨創性을 중시하는 創新論을 우선하여 전개해 나갔음을 알 수 있다.


(3) ‘以文華國’으로서의 문학

  이규보가 산 시대는 정권의 주체가 종래의 귀족층으로부터 새로이 대두된 신흥사대부계층으로 옮겨 지는 일대 관료층의 성격이 크게 변화하였는데, 이러한 시대적 국면을 대표하는 인물이 바로 이규보였다.  그런데 이들 신흥사대부들이 특성은 향리출신으로 학문적 교양과 문학적 실력을 바탕으로 과거시험을 거쳐 중앙의 정치 무대로 진출한 학자적 관료층이라는 점이다. 따라서 그들은 가문보다도 기능적 자질(문학적 역량)의 우수성에 의존하여 입신한 사람들이다. 이규보는 그 자신의 이러한 출신성분에 대한 철저한 자각에서 출사하여 상국의 지위에 오른 뒤에도 항상 그의 문장으로 이바지하여 국가를 빛내야 한다는 사명감을 굳게 간직하였고 또 실제로 그역할을 다하였던 것이다.


  이상의 이규보의 文學觀에 대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한국문학사상 최초로 시 창작의 방법론을 전반적, 본격적으로 수립한 그의 ‘作詩論’에서는 新意, 新語 즉 語意 모두의 독창성을 중시한 ‘創新論’의 문학관을 표명하였다. 따라서 이규보를 다만 ‘신의론자’로 파악하는 것은 그가 작시의 전 과정에 대하여 논의, 중시한 입장을 간과한 것인 바, 이는 「백운소설」 중심의 고찰에 의거한 것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굳이 이름붙이자면 ‘創新(獨創)論者’로 봄이 온당하겠다.

  둘째, 이규보는 문인관료의 제일 소임이 문장으로써 국가를 빛낼 수 있어야 한다는 ‘以文華國’의 문학관을 견지하고 실천해 온 ‘能文能吏’의 신흥사대부였다. ‘이문화국’은 특히 대외관계에 있어서의 문장의 공효(기능)의 중요성을 인식한 것으로, 후대의 관각문인의 문학관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셋째, 그는 ‘感興, 窮源, 證言 등 문학의 본질과 기능에 대하여 특히 깊은 인식을 가졌음을, 문학관의 실천(작품)을 통해서도 보여 주고 있다.


  3. 李奎報와 文學作品

  이규보는 고려 일대를 통하여 보아도 결코 문학적으로 제일인자라고 서슴치 않고 말할 수 있다. 그가 세상에 알려져 관직에 종사할 수 있게 된 것도, 崔忠獻이 정자를 짓고 그 이름을 茅亭이라 하고 여러 문인들을 불러 亭記를 짓게 하였던 바 단연 李奎報 작품이 으뜸이어서 懸板으로 새겨지고, 이후 崔忠獻의 신임을 받으면서부터였었다고 한다.8)

  이규보의 문학작품으로는 소설작품에 국선생전과 청강사자현부전이 있고, 시로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漢詩가 있으며, 우리나라 최초의 詩話라 할 수 있는 「白雲小說」이 있어 이 강토에 詩評에 대한 눈을 뜨게 하였던 것이다.

  이규보는 어려서부터 술을 즐기고 호탕한 생활을 하였다고 한다. 그가 11살 되던 1178(명종 8)년에 숙부 李富誇가 直門下省으로 있을 때, 省郞들이 「紙」자를 운으로 주니 말이 떨어지자 말자 「紙路에 毛學士가 길이 통행하고 있구나」9)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이어 對句를 맞추라고 하니까 역시 「술잔의 배속에는 항상 麴先生이 들어 있도다10)」라고 거침없이 응대하여서 모두들 奇童이라 탄복했다고 전해져 있다.

  이 聯句에서 보면 그는 벌써 어려서부터 假傳體에 대한 깊은 관심을 가졌던 것 같다. 종이를 紙路라고 비유하고 있고, 붓을 毛學士, 술잔의 寓意, 술을 麴先生 등으로 의인화 내지는 가탁에 의한 언어의 묘미를 발휘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假傳體의 출발은 더 올라가서, 西河 林椿의 麴醇傳, 孔方傳 등에서 벌써 볼 수가 있는데, 더 나아가 당시의 한 시대적 산물이라 할 수가 있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 時代는 고려의 역사상 가장 혼란기에 속하는 때이고, 정치적 혼란과 武人의 횡포가 잇달아 감수성이 예민한 文士들에게는 桎梏의 도가니 속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란 自己逃避뿐이었으니, 비유와 풍자를 담은 가전체의 출현은 자연적인 현상이라 하겠다. 여기에, 그 발생에 자극제가 된 것이 중국작품의 영향이었다. 중국은 역대로 풍자의 수법으로 가전체 작품을 써 왔으며, 文房四友를 비롯하여 술, 바둑판, 등불, 방아공이 같은 무생물과 나무, 풀, 꽃 등의 식물 및 동물에 모두 精靈이 존재하는 것으로 보아, 이 精들의 인격화를 시도한 작품이 있어 왔는데, 山林으로 파고든 文士들의 소일거리로 관심이 집중되면서 새로운 작품의 창작을 고무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秘史, 小說類로써 가장 크게 작용한 것이 「太平廣記」라 할 수 있다. 「太平廣記」는 宋初 왕명에 의하여 唐 이전의 秘史, 野談, 小說 等類를 總蒐合하여 편찬한 것으로서 가히 국가적인 사업으로 이룩된 총 500권에 이르는 거질이다. 고려의 翰林別曲에서 당시 諸儒들이 가장 가까이 두고 읽었던 儒家書와 老莊書, 史書, 文學書 등을 노래하면서 秘史, 小說書인 本篇을 함께 노래부르고 있다는 사실이 여기에 대한 관심도를 증명해 주고 있다고 하겠다.11)


  4. 李奎報의 漢詩

  李奎報는 가히 한 생을 詩와 더불어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그는 한 곳을 지난다든지 한 지방에 머물 때마다 반드시 시를 남겼다. 그리고 그가 崔忠獻에게 알려져 출세의 첫발을 디딘 것도 시로 인한 것이었다. 그가 시를 얼마나 즐겼나 하는 것은 「驅詩魔文」에 잘 나타나 있다. 唐의 韓退之가 궁함을 쫓아 버리는 글이라는 「送窮文」을 본받아 시의 魔鬼를 쫓아 버린다는 「驅詩魔文」을 지은 것이다. 그 내용을 보면 詩魔가 자기에게 붙어 있어 각종의 해를 끼치고 있다고 하여 그 시마의 죄를 다섯 가지로 열거하고는 빨리 물러가라고 한다. 이에 詩魔는 그렇지 않다고 변명을 하는데, 「나 비록 미천한 詩魔이나 역시 하느님께서 알고 있는 바라, 그대가 처음 태어날 때에 上帝께서 나를 보내어 그대를 따르라고 하였으니, 그대가 아이일 때도 집에 잠입하여 떠나지를 아니했고 그대가 자랄 때도 몰래 따라 다니면서 보살폈고, 장성해서도 그대를 보살펴 그대가 세상에서 크게 이름을 날림도 나의 보필 아닌 것이 없다」12)라고 하여 시와는 일생을 떠날 수 없는 관계임을 강력히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천재시인 李奎報는 우리의 문학사에 빛나는 일대 시작을 남겨 놓았다. 즉, 大英雄敍事詩라 볼 수 있는 「東明王篇」이 그것이다. 고구려의 시조인 東明王의 출생 이전 계보로부터 그가 출생하여 나라를 세우고 그것을 계승한 琉璃王의 즉위까지를 五言의 韻文으로 표현해 놓은 것이다. 이는 文學史上으로도 중요하지만, 민족사적으로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李奎報는 본편을 시도하게 된 동기를 밝히고 있으니, 舊三國史를 보니 東明王의 神異적인 기록이 있었는데, 金富軾의 三國史에는 많이 간략되어 후세에 이 기록이 인멸될 우려 있어, 唐玄宗 本紀에서 뺀 楊貴妃의 故事를 白樂天이 노래로 나타낸 것처럼, 시로써 記錄하여 우리나라가 본래 성인의 터전임을 천하가 모두 알게 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더구나 그가 이 神異한 이야기를 재삼 탐독하니 그 근원이 환상이 아니요 聖이며, 鬼가 아니라 神이라고 한 점은 특히 주목거리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李奎報는 高麗 仁宗때 王命에 의하여 집성된 「古今詳定禮文」의 高宗時 印本에 그 序文을 썼다는 사실도 특기할 만하다. 이 「詳定禮文」은 금속활자로 최초의 책으로 알려져 있어서 우리의 관심을 끌고 있다.


  5. 李奎報의 詠物詩13)

  詠物詩는 山川草木등 자연 事物을 소재로 하여 읊은 詩라고 할 수 있다. 시인이 사물을 소재로 하여 읊는다는 것은 대개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하나는 表現對象인 사물에 감정을 의탁하여 나타내는 것이고, 또 하나는 사물에 접촉함으로써 감정을 일어나게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漢詩에서는 앞엣것을 ‘比’라하고 뒤의 것을 ‘興’이라고 한다. 이것은 모두 시의 六義에 포함되는 것으로 시의 敍述方法에 해당되는 문제라고 할 수 있다.

  이규보의 영물시에서도 개개의 자연물을 읊고 있는 가운데서 위의 두가지 경우를 살필 수 있다. 그의 영물시에서의 이같은 두가지 서술방법을 容認하면서 그의 詠物詩에서 발견되는 自然美의 양상을 논의할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서는 먼저 그의 영물시 가운데서 문제시 되고 있는 植物詩에 대하여 논의함으로써 그의 영물시가 가지는 독특한 일면을 살펴보고자 한다.

  東國李相國集에 나오는 植物詩로는 다음과 같은 것이 나온다.

  詠桐, 梅花, 石竹花, 栢軒, 竹閣, 荷池松徑, 薔薇, 夾竹桃花, 倭松, 朱李, 荔文, 木芍藥, 義竹, 花妖, 醒醉草, 消恨花, 金栗環, 芍藥, 橘, 紅柿, 詠橘, 紅榴, 惠米櫻花, 四委花, 菊花, 瑞祥花, 石榴花, 竹, 石菖蒲, 竹笋, 橘盞, 梨花, 瓜架, 惠米與綿上, 小牧丹, 詠菊, 木筆花, 海棠, 黃蜀葵, 槿花, 食松菌, 饋桃栗詩, 詠笋, 紅芍藥, 紫牧丹 等.(이상 全集)

  芍藥, 松花, 竹笋, 詠菊, 靑橘, 黍飯花, 地棠花, 御留花, 玉梅, 薔薇, 牧丹, 朱李, 林檎, 墨竹, 瓜, 茄, 菁葱葵, 瓠, 饋花, 雞冠花, 天子梨, 梨, 名菊, 柑, 曆柑, 小栗, 十日菊, 酸梨碧桃, 黃菊, 食天子梨, 紅柿, 枳, 乾柿, 曰粲 等.(이상 後集)

  여기에 든 바와 같이 우리의 생활에 가까운 100餘首의 植物 및 花卉詩를 읊어 우리들이 일상에서 잘모르는 화초까지 읊어 그의 식물에 대한 깊은 인식도를 살필 수 있다. 더우기 고금을 통하여 牧丹과 菊花, 芍藥, 橘 等에 대한 시가 많기로는 第一人者가 될 것이다.

  그의 詠物詩 중에서 四君子에 해당되는 竹․菊을 소재로 한 詩 가운데 일부를 살펴봄으로써 그의 영물시의 단면이나마 살펴보고자 한다.


(1) 竹

  竹은 詩나 墨畵의 소재로 많이 쓰이는 자연물 중의 하나로 淸風高節을 상징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같이 淸風高節로 상징되는 대나무에서 節義가 강한 선비나 高尙한 人格을 갖춘 道學者를 聯想할 수 있다. 이렇게 보면 대나무는 시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高尙한 氣稟을 지니고 高節을 숭상하는 인물로 상징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징성은 대나무가 다른 자연물에 비하여 貞勁秀異한 本性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에서 緣由되었으리라고 추측할 수 있을 것이다.

  이규보의 자연시에서도 대나무를 끌어들여 그 상징성을 적절하게 드러내고 있는 시가 많다. 다음에 인용되는 시에서 이러한 사실이 검토될 수 있을 것이다.


  竹本吾所愛  대나무는 본디 내가 사랑하는 것이니

  愛之兄弟亞  좋아하기를 형제같이 하네.

  所以見其眞  그 진실성을 아는 바이니

  翫惜靡暫捨  완상하고 아끼어 잠시라도 버릴 수 없네.

  <求墨竹>14)


  이규보는 특히 대나무를 愛護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제목에 墨竹을 구한다고 한 것을 보면 題畵詩로 보이는데 적어도 그는 대나무의 本性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또한 그는 當代의 詩人 중에서 대나무를 가장 잘 읊었던 것 같다. 그의 <又一絶重乞寫眞>15)에 보면 당시의 유명한 墨竹畵家인 丁而安에게서 묵죽을 받은 사람은 으레 이규보에게 竹詩를 請했다는 사실을 살필 수 있다.


  孤竹飽霜雪  외로운 소나무 풍상을 다 겪었는데

  南人輕剪截  남인들이 경솔하게 잘라버렸구나.

  問爾心所屬  묻노니, 네 소속이 어딘지

  凡百皆不悅  무릇 자잘한 일은 하기 싫은 걸세

  被人作笛吹  악공이 부는 젓대 된다면

  恥趁脣與舌  입술과 혀 닿는 것이 수치스럽고

  被兒作馬騎  아이들의 죽마되어

  出胯無奈劣  사타구니 밑에 들기로 어이하리.

  願來几案間  원하노니 책상 위에 참여하여

  日與詩人媟  날마다 시인과 더불어 무람없이 지내고파라.

  (中略)

  緣汝若得官  만일 너로 인해 벼슬 얻는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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