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나제 서풍 비교 연구(1998. 5)/ 인쇄용

羅濟書風 比較硏究

- 武寧王誌石을 중심으로 -

 

權相浩(大丘書學會 會員)

Ⅰ. 序論

文藝美學에서 風이란 작품 가운데 담긴 작가의 주관 방면의 특징으로 작가의 감정․기질이 작품 가운데 體現되어 나오는 풍모이다. 그림에는 畵風이 있고, 詩에는 詩風이 있듯이 글씨에는 書風이 있다. 그런데 이러한 風은 개인에서뿐만 아니라, 시대적 특수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作家는 나름의 美意識과 表現形式에 따라 자신의 남다른 세계를 작품을 통하여 표출하고, 鑑賞者는 작품 개개의 美的構造를 분석하고 검토하여 同時代 同地域 사람들의 일반적인 美意識을 추출하고자 한다. 書風은 時代精神의 反映이므로, 書風을 객관적으로 정립하기 위해서는 서예 작품 자체에 대한 해석은 물론이고 그 작품을 낳게 한 時代精神에 대한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 時代精神이란 용어 속에는 墨蹟이든 碑碣이든 그 서예 작품이 나타난 시대의 정치적, 사회적, 문화적인 모든 요인을 포함한다.

書藝는 문자를 媒體로 표현하는 造形藝術이다. 표현된 문자 속에는 書體로서의 形式과, 그 속에 담긴 內容이 유기적으로 융합되어 이루어진다. 다시 말하면 書寫 內容에 따라 書體가 달라질 수 있다. 물론 서사 내용이란 작가가 처한 객관 景物이나 상황에 좌우된다고 본다. 이를테면 流觴曲水의 蘭亭에서는 流麗한 行書가 제격일 것이고, 謹嚴肅然한 祖廟 앞에는 端雅한 楷書가 어울릴 것이다.

본고에서 논하고자 하는 羅濟書風에 대한 비교 연구는 新羅는 신라대로 신라의 얼이 담긴 글씨를 썼을 것이고, 百濟는 백제대로 백제의 넋이 어린 글씨를 썼을 것이라는 점을 전제로 하고 있다. 두 나라는 결국 自國의 빛깔과 향기가 우러나는 자기 書風을 이룩했다고 본다. 原三國時代의 羅濟 양국은 사회적․지리적․풍토적 차이로 인하여 서로 다른 문화 형태를 낳았다.

그리고 武寧王誌石을 중심으로 고찰하는 이유는 ‘백제 서예의 精華이면서, 서예 미학적 가치가 클 뿐만 아니라 역사적 가치도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한 백제가 도읍을 지금의 公州에 두었던 熊津時代(475~537)를 대표하는 書藝 발자취이기도 하다.

흔히 三國을 鼎立하여 논하는 것이 상례이나, 여기서는 그 하위 단위인 羅濟 양국만의 書風을 비교, 분석해 보고자 한다. 이러한 작업의 의의는 우리 선조들의 書藝 精神을 찾는 데에 있다. 아직도 우리의 가슴에 남아 맥맥히 흐르고 있는 우리의 美的 原型은 무엇일까. 이 글은 羅濟 양국의 書風만을 이야기함으로써 서풍에 대한 이해를 통하여 우리 민족의 정서적 뿌리를 조금이나마 알아보자는 데에 있다.

그런데, 羅濟書風의 비교 연구에 있어서의 難題는 두 가지가 있다. 그 하나는 현재 밝혀진 양국의 서예 자료가 書風을 比較 檢討하기엔 數的으로 너무나 부족한 데에 있다. 특히 백제의 경우는 자료 면에서 너무나 零細하다는 점을 솔직히 시인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점은 文學의 경우도 그러한데, 이것은 삼국 이후 전개된 한반도에서의 정치적 주도권의 향방과도 긴밀한 관계가 있다고 보여진다. 그리고 또 하나는, 백제는 왕가 중심의 書品과 귀족의 書品만이 남아 있고 일반 서민의 서예 작품이 남아 있지 않는 데 비하여 신라는 상대적으로 다양하게 자료가 남아 있다는 점이 다르다.

지금까지 밝혀진 660년(또는 663년) 백제가 신라에 의해 흡수 통일되기까지의 중요한 金石文 資料를 살펴보면 다음 표과 같다. 자료를 기준으로 연대를 추정해 보면 5세기 중엽에서 7세기 중엽까지 약 2백년 동안에 이루어진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적 범위를 넘어서지 않음을 밝혀 둔다. 환언하면 통일 신라는 서예적으로는 매우 爛熟한 시기였지만, 시대적으로 볼 때는 백제와 비교의 대상에 들지 않으므로 제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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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상호
제6회 全國書學硏究發表會
羅濟書風 比較硏究
- 武寧王誌石을 중심으로 -
權 相 浩
일시: 1998. 5. 30.
장소: 대구시민회관 소강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