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草成最難(초성최난)

草成最難
초서를 이루기 가장 어렵나니......

  草書의 屬性은 簡易化에 있다. 어느 書體를 막론하고 빨리 쓰고자 할 때에는 자연히 흘려 쓰게 마련인데 이를 草率하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기록상으로 볼 때 篆書를 사용하였던 중국 戰國時代에 이미 草稿라 하여 빨리 쓰기 위한 草體가 있어 正體와 구별되었다. 따라서 넓은 뜻에서 초서는 모종의 자체를 草略한 書體 모두를 가리킨다고 할 수 있다.


  또한 書體史에서 말하는 고정된 의미의 초서도 隸書를 사용하였던 漢初에 이미 시작되었다고 보는데, 그 변천 과정에 따라 隸書를 간략하게 速寫한 章草가 先行하며, 張芝가 章草에서 波磔을 제거하고 글자 上下의 血脈을 이어 創案하였다고 전해지는 今草는 이후 東晋時代 二王 父子에 의하여 극치를 이루어 후대의 표준이 되었다. 狂草는 唐 후기 張旭에서 비롯된 것으로 魏晉時代 이래 전통적인 초서 필법에서 벗어나 자신의 성정을 마음껏 표현하여 자신도 가누지 못할 만큼 作爲性을 초월한 상태에서 썼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따라서 초서는 극도로 省略된 點畫과 線條에 자신의 정감을 표현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를 쓴 사람은 알아도 그것을 보는 사람은 해독하기 어려운 경우가 흔히 있다. 그렇기 때문에 或者는 草成最難이라 하여 草書가 書中에서 가장 이루기 어렵다고 한다.


  書譜를 쓴 孫過庭은 唐初에 활약했던 사람이다. 그의 名字, 生卒, 官職에 대해서는 異說이 많다. 하지만 그는 博學하고 文章과 書에 능했으며, 특히 草書의 名家로 알려져 있다.

  孫過庭이 쓴 書譜는 四六騈儷文의 唯美的인 文體로 전통적인 입장에서 書論을 정리한 槪說書이다. 이 글에 나타난 서론은 王羲之 典型의 근거 아래 漢魏 이래 能書家의 書品과 이론, 서예술의 가치 등 學書의 理念을 논한 내용으로 기본적으로는 六朝書論의 美學的 견지에서 보았으며, 한편 작가로서의 체험에 의한 독자적 견해를 피력한 중국의 대표적 서론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 書譜는 서론으로서의 중요성 못지않게 草書 학습의 典範이 되고 있다. 혹자는 서보를 千篇一律的이고 변화와 생동감이 부족하며 運筆 속도가 너무 빠르다고 酷評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보에는

  첫째, 點畫

  둘째, 用筆

  셋째, 結句

  넷째, 章法 

  등의 특징이 있다.


  따라서 오늘날 많은 사람이 書譜를 초서 학습의 基準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본다.

  나는 서보를 대하기 전에 먼저 顔眞卿의 三稿와 王羲之의 尺牘集을 통하여 초서에 대한 눈을 떴다. 이후 초서의 典範인 서보가 문장도 훌륭할 뿐 아니라 글씨도 좋아, 항상 이를 携帶하면서 玩賞하였다. 그리고 개성이 강한 狂草와 明淸代의 草書帖을 보면서 그들의 장점과 특징을 익혔다.


  그런데 그들은 너무나 개성이 강한 작품들이어서, 지나치게 방종해질 우려가 있다고 생각될 때는 다시 서보를 통하여 沈着을 추구하였다. 이러한 점을 보면 서보가 나의 초서 학습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어느 書家를 막론하고 각기 독특한 字法과 章法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그것을 바탕으로 자신의 性情을 書寫하고 예술적으로 昇華시키고 있다. 또한 그 가운데서도 공통적인 자법과 장법을 발견할 수 있으니, 여기에 초서 학습상 가장 기본적인 몇 가지 예를 들어 설명하고자 한다.


  첫째, 타원형을 비롯한 몇 가지의 자형이 있다.

     1. 타원형

     2. 방사선형

     3. 左短上齊(왼쪽이 짧을 때는 위를 가지런히 한다.)

        右短下齊(오른쪽이 짧을 때는 아래를 가지런히 한다.)

        - 그러나 가지런한 부분이 칼로 자르듯이 너무 정리되지 않아야 함은 물론이다.

  둘째, 때로는 몇 자를 이어 써서 連續感과 生動感을 극대화시킨다.

  셋째, 首尾雙關의 法則을 사용하여 전체의 統一性을 추구한다.


  이렇게 書譜를 익힌 후에 張旭과 懷素의 狂草나 明淸代 諸家들의 名帖들을 가까이 하면 초서 공부에 進一步할 수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손과정의 서보가 가지고 있는 단점을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


  이상의 설명으로 초서의 初學者는 다소 渴症을 면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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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孫過庭/648~703)

중국 당(唐)나라 초기의 서예가. 자 건례(虔禮). 진류(陳留:河南省) 출생. 벼슬은 솔부록사참군(率府錄事參軍)에 이르렀다. 왕희지(王羲之)의 서법을 배워 초서를 잘 썼다. 그의 저서 《서보(書譜)》는 왕희지를 중심으로 하는 전인적 서법을 근본으로 글씨를 공부하는 방법을 논한 것으로, 특히 저자의 자필본(自筆本)으로 유명하다. 그의 진적본(眞蹟本)이라 하는 초서의 권자본(卷子本)이 청나라 조정에 전해오고, 사진으로 복제되어 있다. 그의 글씨나 논지(論旨)는 모두 왕희지에 대한 숭배가 나타나 있다. 그 밖의 진적본으로 《초서천자문(草書千字文)》 《경복전부(景福殿賦)》가 전한다.


(草書)

한자의 전서․예서 등의 자획을 생략하여 흘림글씨로 쓴 서체. 초(草)는 초고(草稿)의 뜻이며, 신속히 쓰는 필기체로서, 중국 한대(漢代)에 비롯되었다. 전한(前漢) 무렵, 전서의 필기체로서, 고초(古草)가 있고, 후한(後漢) 초기에 장초(章草)가 생겼으나 이것은 예서의 자획을 간략하게 한 것이며, 붓을 치키는 팔분(八分)의 필법을 가진 기복(起伏)이 심한 것이었다. 후에 동진(東晉) 초기(330?)에 팔분의 필법은 없어지고, 한 자씩 차분히 쓰는 왕희지(王羲之)의 《십칠첩(十七帖)》과 같은 독초체(獨草體)나 붓을 떼지 않고 이어서 쓰는 왕희지의 《상란첩(喪亂帖)》과 같은 연면체(連綿體)가 생겼다. 왕희지나 그의 흐름을 따르는 서가들에 의해서, 간략․민속한 필기체라는 편리성보다도 초서 독특한 미가 발휘되었고 당대(唐代)에는 더욱 흘려쓴 회소(懷素)의 《자서첩(自敍帖)》과 같은 광초체(狂草體)를 낳았다. 또한 초서를 해서의 흘림글씨로 해석하는 것은 잘못이며, 해서는 초서보다 후에 성립된 것이다.


광초(狂草) ; 지나치게 휘갈겨 쓴 초서라는 데에서 붙여진 이름. 당대(唐代)에 시작되어 장욱(張旭)과 회소(懷素)가 쓴 글씨가 대표적이고, 명말청초(明末淸初)에는 왕탁(王鐸)과 부산(傅山)이 유명함.

* 사진은 황기로 초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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