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늙음의 미학

늙음의 미학


(들어가며)
  오늘은 동지. 음력으로 동짓달 스무하루이므로 老冬至다.  절기상으로 보면 양기가 싹트기 시작하는 날이므로 사실상의 설날에 해당된다. 그래서 '작은 설' 또는 버금가는 설이라 하여 아세'(亞歲)’라고도 한다. 동지하면 역시 팥죽 먹는 날이다. 팥죽의 붉은 색은 陽으로 陰이 가장 강한 동짓날에 팥죽을 먹으면 음의 악귀를 쫓는다고 믿었다. 음기를 팍(팥) 물리치고 양기로 주욱(죽) 살아가자.

  우리가 일생동안 사용하는 말과 그릇은 발음상 부정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물과 공기가 흔하지만 없으면 살 수 없고, 그러기에 아껴 사용해야 하는 것과 같이 말과 그릇도 평생 사용하는 수단이므로 조심해서 다루어야 한다. ‘말’을 /말/이라고 하는 까닭은 입만 벌리면 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말하지 '말라'는 뜻이라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그릇’을 /그릇/이라고 하는 까닭 역시 일생 먹고 사는 일에 그릇을 사용하지 않을 수 없기에 그릇에 담긴 음식을 먹고 '그릇된 짓을 하지 말라는 의미에서 '그릇'이라고 하는 것이다.
 

(하고자 하는 말)
1. 잠은 매일 죽는 연습

   아침 -> 점심 -> 저녁 -> 밤 -> 잠
   소년 -> 청년 -> 장년 -> 노년 -> 죽음

  하루의 변화와 일생의 변화를 위와 같이 대비시켜 보면 '잠은 죽음이다.'라는 공식이 성립함을 알 수 있다. 인간의 가장 큰 가르침은 죽음이다. '너희들의 끝을 분명히 보아라.'하고 눈을 감는다. 그것도 부족하여 매일 잠을 통하여 죽음의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죽음을 다른 말로 '영원히 잠들다[永眠]'라고 하는 것만 보아도 죽음과 잠은 일맥상통한다. 그러므로 잠은 '매일 죽는 연습'이다.

2. '늙음'의 특성
  ① 근시에서 원시로
      가까운 이익에 눈 멀고, 영원한 안식처가 될 산이 잘 보임은 지극히 자연스런 이치이다. 그리하여 또 다른 의미에서 원시가 됨은 즐거운 일이다. 왜냐하면 고향이 가까워 오기 때문이다. 꼬밑의 지저분 한 것은 점차 흐릿하여 잘 보이지 않지만, 저으기 떨어져서 어렴풋하던 고향산천이 또렷하게 다가옴은 어찌 즐거운 일이 아닌가. 늙어가고 눈이 원시가 됨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즐거운 일이다.

     노인은 노을(저녁노을)에 서 있는 사람이다. 늙은이는 늘 그자리에 있는 사람이다. 황혼녘에 한곳에 우두커니 서서 東籬採菊(동리채국)하다가 悠然見南山(유연견남산)하는 황홀한 장관을 떠 올려 보라. 큰 바위 얼굴과 같은 인격의 완성이요 장엄한 인생의 마무리가 아닌가.
  ② 털이 변한다.
       老: 毛+匕
       늙을 老자는 털 毛 밑에 변화한다는 의미의 匕(비)자의 결합이다. 외관상 노인의 모습은 주름이 깊고, 머리숯이 줄어들고 머리카락이 흰구름처럼 변한다. 비굴하게 늙은 노인은 해당되지 않는다. 학처럼 고고하게 늙은 노인은 지혜의 보고이다.
  ③ 점잖다.
       노인이 되면 '언행이 묵중하고 야하지 아니하다'. 품격이 속되지 아니하고 고상하기 때문에 '점잖다'라고 하는 것이다. 발음상으로 보면 /점잖다/는 말은 /젊지않다/는 뜻이다. 젊은이처럼 가볍고 속되게 덤범대거나 흔들리지 않는다. 중후한 인생의 결정체, 그것은 노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장엄한 아름다움이다.
  ④ 생각이 많다.
       노인이 되면 이런저런 생각이 많다. 그러다 보니 했던 말 또 하기도 한다. 그래서 예부터 효자는 말대꾸하지 않고 대답 잘 하는 것을 중히 여겼다. 생각할 考(고)자는 老변에 속한다. 모질회()나 耆老宴(기로연)에는 생각이 많은 분들의 밤잠을 잊은 대화의 모임이다.

  ⑤ 노련(老鍊)하다.
       노인은 매사에 노련하다. 일생 동안 겪어온 노하우가 있다. 컴퓨터라는 괴물이 나와 손가락 빠른 젊은이에게 뒤쳐진듯 보이지만 노인은 그 기계의 인성파괴성과 중독성을 잘 알고 있다. 노인은 연륜에 어울리게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길을 걷는다. 술을 마셔도 젊은이처럼 속수무책으로 쓰러지지 않는다. 不倒翁(부도옹)은 노숙(老熟)하고도, 노성(老成)하다.


3. 늙음의 아름다움
  ① 청춘보다 아름다운 노년

   山行  - 杜牧 -
       遠上寒山石徑斜  아득한 한산 비탈진 돌 길 오르니

       白雲生處有人家  흰 구름이 이는 곳에 인가가 있네.

       停車坐愛楓林晩  수레 멈추고 저녁 단풍 숲을 보니

       霜葉紅於二月花  서리에 물든 잎 봄꽃보다 더 붉네.

  결구에서 단풍이 봄꽃보다 더 붉다고 한 것은 노년이 청춘보다 더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다. 그 단풍이 어느 이름 모를 바람에 느닷없이 핑그르르 떨어지듯이 그렇게 죽는 것이, 오복의 하나인 고종명(考終命)이다. 

  ② '老蛤生珠(노합생주)'라는 말이 있다. 늙은 조개가 구슬을 낳을 수 있다는 말이다. 학처럼 고고하게 늙은 노인의 인품에서, 큰 바위 얼굴의 덕에서 주옥같은 삶의 가치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4. 출생은 곧 사형 선고
  태반에서 갓 태어난 아기가 우는 까닭은 사형선고를 받았기 때문이라면 지나친 표현일까. 태어나지 않았다면 죽을 일도 없을 것을...... 어차피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살며' '사랑'하며 '삶'을 구가하다가 죽어야 한다. (살다-삶-사랑-사람)
  生과 死의 상황의 차이를 살펴보자. 출생의 상황은 태어나는 한 신생아의 울음 주변에 많은 사람의 웃음으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죽음이란, 주변의 많은 사람들이 울고 있는 것을 볼 때, 정작 죽는 당사자는 웃으며 이 세상을 떠날 것이다.

5. 비움의 아름다움
  태어날 때에는 주먹을 쥐고 태어나는 것은 세상에 대한 욕심을 나타내지만 죽을 때 손바닥을 펴고 죽는 것은 다 돌려주고 떠난다는 의미이다. 죽음은 가장 큰 가르침이다. 돌아가시는 분은 '너희를 끝을 보았느냐?'라고 이심전심으로 깨우쳐 주고 눈을 감는다. 그렇다, 빈 손으로 왔다가 빈 손으로 떠나가는 '空手來空手去'가 인생인 것이다. 

  그대, 비운 만큼 채울 수 있다. 執之兩個 放則宇宙(집지양개 방즉우주)이다. 엄밀히 말하면 두 손으로 잡아 보았자 두 개일 뿐이요, 놓으면 편안히 우주가 내것으로 다가온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을 때, '불알 두 쪽만 대그락대그락한다'는 말을 한다. 우리 인간은 누구나 태어날 때에는 불알 두 쪽밖에 없었는데, 지금도 너무나 많이 넣고 걸치고 챙기고 있다.  더구나 불의의 방법으로 많은 물건을 차지하고 있다면, '불알 차인 중놈 달아나듯' 그곳에서 떠나야 한다.

6. 인생 공부
  인생공부란 삶의 유혹과 죽음의 공포, 두 가지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터득하는 일이다.
  삶의 유혹에는 돈과 명예가 가장 크다. 저녁으로 랍스타를 먹었든, 소금 주먹밥을 먹었든 배출할 때에는 똥밖에 보이는 것이 없다. 든 것은 똥밖에 없고, 진 것은 죄밖에 없다는 점에서 인간은 평등하다.

7. 美空樂時(미공낙시)
  우주의 씨앗은 빛과 소리이다. 우주는 빛과 소리의 씨를 뿌리고 빛과 소리의 알곡을 수확하면서 존재한다.
  우리가 미술과 음악을 배우는 이유는 미술로 빛의 아름다움을 깨닫고, 음악으로 소리의 즐거움을 배운다. 미술은 빛의 예술이요, 음악은 소리의 예술이다. 미술은 공간으로 보여주고, 음악은 시간으로 보여준다. 그렇다면 그 공간 아름답고, 그 시간 즐겁게 보내자. 그래서 우리가 일생 동안 추구할 것은 '아름다운 공간, 즐거운 시간'이다. 이를 줄여서 나는 美空樂時(미공낙시)라는 성어를 만들어 보았다.
  인간은 시간과 공간과 더불어 3간을 이룬다. 우주의 시공은 끝이 없고 무한하지만 인간의 시공은 유한하다. 인생은 짧고 육신은 좁기만 하다. 인생이 짧기에 영원한 삶을 추구하고, 육신이 좁기에 무한한 우주를 지향한다. 이 야망을 실현시켜주는 것이 예술과 종교이다. 예술은 현상적 존재물로서, 종교는 정신적 상상물로서 시공을 초월하여 영원히 살아남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고 했다.
  죽음이란 육신으로 볼 때에는 자연으로의 회귀(돌아감)이나, 정신(혼, 얼)으로 볼 때에는 부활이다. ‘원래 없었던 내 육신은 그 없던 자리로 돌아가지만, 내 아름답고 즐거운 영혼'은 영원하다.

8. 시공극복을 위한 노력
  인류 역사의 발달은 시공 극복을 위한 노력의 연속이다. 선조들이 축지법 연구한 것은 바로 시공 극복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오늘날 과학과 기술의 발달로 자동차, 비행기, 텔레비전, 전화 등을 발명하였고 따라서 꿈에서만 그리던 축지법이 상당히 현실적으로 가시화되어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9. 행복하게 사는 방법
  행복에 공짜는 없다. 다행 幸(행)자를 살펴보면 메울 辛(신)자 위에 한 一자가 가로 막고 있다. 한 一자는 장애물인데, 이 고초, 이 난관을 꿰뚫어야 행복이 오는 법이다. 鐘(종)이 아픈 만큼 그 소리 멀리 가고, 겨울이 차가운 만큼 봄 매화 향기가 그윽하듯이, 젊어서 고생은 돈 주고 사서라도 반드시 겪어야 하는 관문이다. 그리고 관문 하나하나를 통과할 때마다 스스로의 성취감에 感動하라. 행복의 또 다른 이름 그것은 감동이다.
  행복하게 사는 방법으로 감동 외에 인사가 있다. 엄밀히 말하여 과거와 미래는 인식으로 느낄 뿐 실채는 없다. 현재만 눈앞에 있을 뿐이다. 현재를 가장 유익하게 보내는 방법은 당연히 人事를 잘 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말하는 인사란 상대방에게 예를 갖추어 절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人事를 人과 事로 나눠서 생각해 보자. 현재 내 앞에는 사람 아니면 일이 놓여있을 뿐이다. 대상이 사람이라면 그 사람에게 정성을 다하고, 대상이 일이라면, 설령 잠자는 일일지라도 그 일에 성의를 다하자. 人과 事를 잘 하면 만사형통이다.

10. 自得의 삶
  행복의 최소한의 요구조건으로서는 먹을 것과 입을 것과 잠잘 곳이 있어야 한다. 국가에서 국민을 위하여 할 수 있는 자장 중요한 일이 바로 이 의식주의 해결이다.
  우리 속담 중에 '배 부르고[食] 등 따습다[衣住].'라는 말이 있다. 배 부르고 등 따스우면 만사 오케이다. 북한에서는 먹는 일을 더 중히 여겨 衣食住 순서를 바꾸어 食衣住라고 한단다. 衣를 앞세움은 다분히 체면을 중히 여김에서 나온 말이다. 소박한 밥 한 그릇이라도 食하면 배 부를 것이요, 최소한의 衣와 住라도 등 따습다면 무엇이 부러우랴. 그런데 인류는 산업혁명 이후에 서양의 물질주의의 팽배로 말미암아 경쟁적으로 지나치게 배부르고자 하고, 좋은 옷 입고, 넓은 집을 추구하여 지구가 열개라도 모자랄 지경이다. 배 부름을 지나 터질 지경이요, 등 군불에 등 따스함을 지나쳐 여름에는 에어컨으로 추움을 자랑하고, 겨울에는 히터로 후끈하게 살아감을 자랑하고 있다. 術成術破(술성술파), 곧 기술로 일어나면 기술로 망한다는 사실을 왜 모르는가. 끊임없는 더 나은 의식주 추구는 결국 富를 위한 무한 경쟁으로 나타나고, 종국에는 환경파괴와 지구멸망으로 귀결된다.
  행복을 위한 최소한의 의식주 해결은 기본 조건이다. 진정한 행복을 위한 그 다음 일은 樂業(낙업)이다. 자신의 직업을 즐기라는 뜻이다. 논어에는 아는 것보다 좋아하는 게 낫고, 좋아하는 것보다 즐기는 것이 낫다고 했다. 이왕에 해야 할 일이라면 심성을 즐겁게 다스리며 일해야 한다. 낙업의 대상이 직업이라면 더 좋겠지만 아니면 취미로라도 반드시 가져야 한다. 나의 경우도 직업은 아니지만 樂書(낙서)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나는 행복하다.
  삶이란 남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꾸려나가는 것이다. 이것이 自得의 삶이다. 친구를 높이면 높인 만큼 높은 친구의 벗이 되고, 친구를 깔아뭉개면 그런 친구의 벗이 될 수밖에 없다. 남편을 왕처럼 모시면 자신이 왕비 대접을 받을 것이요, 남편을 하인처럼 대하면 자신은 하인의 아내가 될 수밖에 없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왕비 대접을 받을 것인지 하녀 대접을 받을 것인지는 본인 선택의 몫이다. 이런 뜻에서 인생이란 어차피 自得之生이다.

(나오며)
  이 글을 동안에도 조금씩 늙어간다. 늘 그 자리에서 지혜를 늘이면서 생각을 굴려 보며 글을 써 보는 일은 즐거운 작업이다. 그대가 할아버지가 되어 가고 있다면 무겁되 어둡지 않은 삶을 구가하고, 그대가 할머니가 되고 있다면 화려하되 야하지 않은 삶을 노래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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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靑禾
두번세번 읽어도 실증나지 않는 글입니다. 사람을 괜히 겸손케 하며 괜히 고개를 수그리게 만드네요. 좀 전에 대강 읽고 나서  또 다시 읽으니 또 새로 태어나서 새롭게 살아 보자는 마음가짐이 드네요. 밝아오는 새해처럼......
차영자
자득의 삶 잘 읽었습니다.
권상호
네, 이 테마로 강의할 자리가 더러 생길 것 같습니다.
청화
댓글을 보니 언제 제가 들어왔었나 했어요. 결코 그냥 나갈 수 없는 글입니다. 읽으면 읽을수록 매료 되는건 무슨 이유일까요. 백번을 읽어도 백번이상의 감탄~ 누군가 알든 모르든 내가 즐거운일을 저도 모르게 하고 있네요.. 웬지 오늘은 좋은 일이 있을것만 같으네요.. 내 마음이 즐거우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