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武寧王誌石(525년)

 

1. 武寧王誌石(525년)

  忠南 公州市 금성동 소재 백제 武寧王陵에서 나온 武寧王1)의 誌石2)은 王妃의 誌石과 함께 1971년 7월에 公州邑에 宋山里 6호분 배수공사 중 발굴된 것이다. 국보 제163호로서 현재 國立公州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두 개의 誌石은 角閃石으로 만들어졌고 무령왕릉이 발견될 때 함께 출토되었다. 그리고 王의 誌石은 가로 41.5cm, 세로 35.2cm, 두께 4cm이고, 王妃의 誌石은 가로 41.3cm, 세로 35.5cm, 두께 4.8cm이다.

  武寧王誌石은 聖王 元年 癸卯年(523년, 聖王3년)에 崩御한 武寧王을 2년 뒤인 乙巳年(525년)에 大墓를 封하였고, 王妃의 誌石은 이보다 4년 뒤인 乙酉年(529년, 성왕 7년)에 改葬할 때의 것이니 이처럼 연대가 분명하기도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백제는 8代 古爾王(234~286년) 때에 고대국가의 체제를 완비한 동시에 樂浪郡의 압력을 배제하면서 한강유역을 차지하였다. 13代 近肖古王(346~375년) 때에는 평양성을 공격하고, 마한을 통합하며, 중국 요서지방까지 진출하는가 하면, 宋․齊․梁과의 교역은 백제 문화 전반은 물론 특히 문자 생활과 書藝에 미치는 영향은 컸다. 한때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주춤하였으나 25代 武寧王(501~523년)이 즉위하면서 內治에 힘쓰고, 영토를 넓히는 등, 중국 梁과 교역하면서 중흥의 기반을 다졌다. 무령왕의 후사왕인 26代 聖王(523~554년)은 부왕의 업적을 토대로 중흥 군주로 활약하였으니, 이 시대를 상징하는 것으로서 백제 서예의 정화인 武寧王誌石이 나타난 것이다.

  일반적으로 誌石이란 죽은 사람의 인적사항이나 무덤의 소재를 기록하여 묻는 板石이나 陶板을 가리킨다. 墓誌 또는 墓誌銘3)이란 誌石에 실린 독특한 문체의 글을 가리키는 것으로, 誌石 자체와는 구분된다.


  武寧王誌石(525년)은 誌石 앞면에 백제 斯麻王[武寧王]이 62세 되던 해인 癸卯年(523년, 聖王 1년)에 崩御하여 2년 후인 乙巳年(525년, 聖王 3년)에 大墓에 안장한다는 내용을 陰刻하였다. 誌石 앞면에 5cm~6cm 넓이의 陰刻 縱線을 그어 7행을 만들고 그 중 6행까지는 銘文을 새기고 마지막 1행은 공간으로 남겼다. 이는 철저한 계획 아래, 내용에 따른 書寫 공간을 만든 것이 아니라, 임의대로 만들어진 7행의 공간에 임의대로 쓰여진 글자수라는 증거이다. 환언하면 原稿紙 위에 적당히 글을 써내려 가다가 여분이 남아 있어도 그대로 마친 경우와 같다고 하겠다. 이런 이유에서 武寧王誌石의 銘文은 王家 일상에 자연스럽게 쓰이던 서체라 하겠다. 誌石에 쓰인 墓誌銘 52자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寧東大將軍百濟斯

麻王年六十二歲癸

卯年五月丙戌朔七

日壬辰崩到乙巳年八月

癸酉朔十二日甲申安厝

登冠大墓立志如左


“寧東大將軍인 백제 斯麻王은 年歲가 62세가 되는 癸卯年 5月 초하루의 일진은 丙戌日인데, 壬辰日인 7일에 崩御하셨다. 乙巳年 8月에 이르러 초하루의 日辰은 癸酉日인데, 甲申日인 12日에 이르러 왕릉[大墓]에 관을 올려[登冠] 安葬하였음을 기록하니 이와 같이한다.”4)


  여기에서 우리는 王號 및 왕의 享壽, 崩御日字 등이 중요하게 다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지석문의 ‘立志如左’라는 문구의 ‘志’가 ‘誌’와 통용하였음을 본다.5) 백제와 梁과 관계를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武寧王의 직위, ‘寧東大將軍’은 무령왕 21년에 梁에 사신을 보냈을 때 梁武帝로부터 받은 직위 ‘使持節都督百濟軍事寧東大將軍’의 약칭으로 이는 梁나라의 二品 벼슬에 해당한다.6) 또한 중국에서 漢代 이후 자주 등장하는 買地券의 副葬 풍습 역시 중국과의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것이다.7)

  背面에는 주위에 네모나게 구획선을 치고 干支와 八卦를 배합한 방위를 陰刻하였는데, 묘지의 方位 겸 陵의 위치를 나타냈다고 생각된다. 背面에 쓰인 干支는 다음과 같다.


丁午丙巳戊辰乙卯甲寅己丑癸子壬亥


1) 武寧王(462~523)은 백제의 제25대왕으로 재위 기간은 501~523이다. 이름은 斯摩․斯麻․隆․餘隆이며, 東城王의 둘째 아들로 父王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521년 양나라의 武帝는 무령왕을 ‘使持節都督百濟諸軍事寧東大將軍’에 책봉하였다.


2) 誌石의 유래는 중국 삼국시대의 魏나라에서 역대 皇帝陵을 세울 때 지나친 노동력과 물자의 낭비를 초래하였기 때문에, 石室․碑石․石獸 등의 石物을 일절 금지하면서부터 碑石 대신에 誌石을 묻는 데서 비롯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3) 墓誌란 죽은 사람의 姓名․官階․經歷․生沒年月日, 子孫의 姓名, 墓地의 住所 등을 새겨서 무덤 옆에 파묻는 돌이나 陶板을 말한다. 墓誌銘이란 일반적으로 墓誌에 적은 銘文 전체를 가리킨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의 墓誌銘은 墓誌 끝에 붙는 銘文만을 말하며, 그 내용은 죽은 사람의 공덕에 대한 찬양이다.


4) 趙東元 󰡔韓國金石文大系󰡕 원광대학교 출판국, 1985.

   成周鐸 외, 󰡔백제무령왕릉󰡕 ‘武寧王陵의 誌石’, 충청남도, 공주대학교 백제문화연구소, 1991, 165~201쪽.

  이상 두 내용을 참조하여 번역하였다.


5) 역사학계에서는 이런 점에서 買地券이라는 견해보다 誌石으로 간주하고 있다. 󰡔韓國古代金石文󰡕 1. 가락국사적개발연구소, 1992, 150쪽.


6) 成周鐸 외, 앞의 논문, 173~174쪽.


7) 李成美, ‘百濟時代 書畵의 對外 交涉’ 󰡔韓國美術의 對外交涉 Ⅱ - 百濟󰡕, 한국미술사학회, 1996, 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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