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武寧王妃誌石(529년)

 

2. 武寧王妃誌石(529년)

  丙午年(526년, 聖王 4년)에 왕비가 죽자 장례를 지내고 己酉年(529년, 聖王 7년)에 왕과 합장한다는 내용을 陰刻하였다. 誌石 뒷면에는 一萬文의 돈으로 토지를 매입하여 무덤을 만든다는 내용을 적었으니, 이것이 곧, 買地券이다. 王妃의 誌石은 앞면에 41자의 명문이 陰刻되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丙午年十二月百濟國王大妃壽

終居喪在酉地乙酉年二月癸

未朔十二日甲午改葬還大墓立

志如左


“丙午年 12月에 백제 前王의 妃(大妃)가 天壽를 다 누리시고 돌아가셨다. 왕궁으로부터 正西方(酉)의 땅에서 삼년상(居喪)을 마치고 己酉年 초하루가 癸未인 二月 十二日에 王陵(大墓)로 옮겨서 정식 葬禮를 지내고, 誌石에 기록하기를 이와 같이 한다.”


  王妃 墓誌銘의 끝에 ‘立志如左‘라고 한 것은 바로 王妃誌石 뒷면의 3분의 2에 걸친 6行의 刻字를 가리킨다.

  武寧王誌石의 뒷면에는 다만 十干과 十二支의 方位 표시가 있을 따름이나,  王妃誌石의 뒷면은 買地券1)인데 일종의 賣買契約書라 할 수 있다. 곧, 大王 葬禮時인 乙巳年(525년) 8月 12日에 一萬文의 돈으로 土王․土伯․土父母, 여러 地下官吏 등 地神으로부터 묘지를 사들인다는 내용의 賣買契約書이다. 이 買地券에는 58자의 銘文이 陰刻되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錢一萬文右一件

乙巳年八月十二日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以前件錢土王

土伯土父母上下衆官二千石

買申地爲墓故立券爲明

不從律令


“다음은 돈 一萬文에 대한 내용이다. 이상 1건.

乙巳年 8月12日에 寧東大將軍 百濟斯麻王은 上記의 金額으로 토지신인 土王․土伯․土父母․上下의 여러 官吏 및 地方長官에게 알리어 西南西(申) 方向의 土地를 買入하여 무덤을 썼기에 이를 위하여 文書를 作成하여 證明을 삼으며 모든 律令에 구애받지 않는다.”2)


  신문지를 반 접은 만한 크기의 이 두 誌石의 성격을 둘러싸고 발견 당초부터 적지 않은 논란이 있었다. 墓誌로서는 매우 疏略하지만 표면에 王號․死亡日字 등이 더 중요하게 다루어졌기 때문에 ‘誌石’으로 보아야 한다는 견해와, 앞면의 내용에 生時의 행적이 기록되지 않고 일반적인 墓誌의 체제를 갖추고 있지 않기 때문에, 신에게 묘의 安護를 기원하고 묘지 소유권을 확인하는 賣買契約文書인 ‘買地券’이라고 보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武寧王 및 武寧王妃의 誌石의 서풍에 대하여 각기 다양한 비평을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任昌淳은 ‘南朝風의 우아하고 유려한 필치인 걸작이다. 이는 백제가 중국 齊․梁의 문화를 직수입한 것을 알 수 있다’3)고 평하고, 또 한편 ‘이 誌石의 서체는 南朝風에 속한 우아한 필치로 왕의 지석의 글씨는 北朝諸碑와 같은 隸書氣가 완전히 가셔졌고 힘과 골을 위주로 한 古澁美가 없이 流麗暢達하여 二王의 유풍이 살아 있고, 王妃의 誌石의 글씨는 結構의 方正, 風雲의 古談함이 다소 왕의 誌石과는 다른 면이 있으나 역시 시대적 특징을 나타내는 데 있어서 귀중한 가치를 지닌다.’4)고 하여 南朝風의 글씨로 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金膺顯은 ‘大王誌나 王妃誌의 필치는 거의 같은 六朝楷의 圓筆로서 北魏의 顯祖嬪成氏墓誌보다 流麗하고 元平墓誌(524년)보다는 雄渾하여 鄭文公碑(511년)를 연상케 하는 명필’5)이라고 하여 북위풍의 글씨를 닮은 것으로 보고 있다.

  이와는 달리 金洋東은 武寧王誌石은 ‘석각문화가 발달한 北朝風의 서풍을 수용한 南朝風의 유려한 필의가 우아하게 살아난 行氣가 섞인 해서체 글씨’6)로 보고 있다. 그는 또 ‘왕비의 묘지는 글씨가 약간 작고 서체 또한 行氣가 없는 매우 단정한 楷書인데 그 품격 역시 고아하며, 이는 지리적으로 南朝와 가까운 탓으로 그 영향이 상당히 컸던 백제의 서예는 소박하면서도 온아한 백제인들의 성품 그대로이며, 온아함 속에 청경한 골기가 있는 서예미의 세계였다’7)고 하여 양자 통합적 위치에 서고 있으며,

  曺首鉉은 ‘백제인들의 미감이 南朝의 풍성함을 받아들이기가 용이하여 영향을 많이 받은 것은 사실이지만 백제인 특유의 미의식이 이루어낸 百濟化된 書體’8)라고 하여 남조풍에 자생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

  蔡龍福은 전체적으로 남조풍에 속한 우아한 필치로 보고 있다. ‘王의 誌石의 글씨는 北朝諸碑에 보이는 隸味는 거의 없어지고 行氣가 풍기는 楷書體로 다소 二王의 遺風이 살아있으며, 王妃의 誌石 글씨는 結構의 方正, 風雲의 古淡함이 다소 왕의 지석과는 다른 면모를 간직하고 있는데, 行氣 없는 楷書의 탓으로 그 품격이 고아하다’9)고 하여 王誌石과 王妃誌石의 서체를 구분하여 특색을 살피고 있다.

  결론적으로 이 두 誌石에 새겨진 墓誌銘 및 買地券에 나타난 문장은 매우 간결하면서도 悲壯한 漢文體이며, 書風은 지석 분위기에 걸맞게 北魏의 莊重한 章法과 字法을 수용하고 있으며, 그 위에 백제와 중국 교류의 출발점이었고 풍토가 비슷한 南朝의 優雅하고 세련된 筆法을 보여주고 있다고 하겠다. 다시 말하면 북조의 형식에 남조의 내용이 담긴 백제 서예의 꽃이라고 할 만하다.

  북조의 형식을 받아들인 근거로 北魏碑 중에서 崔敬邕墓誌(517년)와 王誦妻元貴妃墓誌銘(517년)을 예로 들 수 있다. 이 두 北魏碑의 서체를 武寧王誌石과 비교 검토해 보면 그 골격이 흡사한 점을 확인할 수 있다.  武寧王誌石이 525년에 만들어졌으니 이 두 北魏碑와는 약 8년 정도의 시간적 거리를 두고 있다. 이를 두고 보면 백제는 그 당시에 南北朝와 빈번한 문화적 교류를 가졌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武寧王誌石의 글자 중에서 중복되는 자를 피하면 52자 중에서 43자만 남는다. 이 43자를 중심으로 공통 부분이 많은 북위 비를 찾아 본 결과가 ‘崔敬邕墓誌와 王誦妻元貴妃墓誌銘’이었다. 제한된 글자 수에서 비슷한 글씨를 찾기는 실제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비교 대상 글자 없으면 기타 諸碑에서 찾아보았다. 그 결과 武寧王誌石에 쓰인 書風은 氣骨이 씩씩한 北魏碑의 외형을 본받았으되, 筆劃의 맛은 아무래도 南朝 書風을 본af83525.gif" width="257" height="372" border="0"> 이 43자를 중심으로 공통 부분이 많은 북위 비를 찾아 본 결과가 ‘崔敬邕墓誌와 王誦妻元貴妃墓誌銘’이었다. 제한된 글자 수에서 비슷한 글씨를 찾기는 실제로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리하여 비교 대상 글자 없으면 기타 諸碑에서 찾아보았다. 그 결과 武寧王誌石에 쓰인 書風은 氣骨이 씩씩한 北魏碑의 외형을 본받았으되, 筆劃의 맛은 아무래도 南朝 書風을 본af83525.gif" width="257" heig



1) 墓地 買入文書인 ‘買地券’은 본시 중국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장례 풍속으로 묘지에 대하여 신의 보호를 기원하는 주술적인 풍습이다. 통용하는 貨幣를 묘지를 만들 때 함께 넣고 그 돈으로 地神에게 묘소에 쓸 땅을 매입하는 형식을 밟는데, 문서를 작성하고, 그 내용을 刻石하여 壙中(시체를 묻는 구덩이)에 함께 넣는다. 곧, 무덤을 쓴 뒤에라도 아무도 이 땅을 침범하지 못하게 하며, 또 遺體를 편안히 보호해 달라고 신에게 부탁하는 동양의 민속이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2) 趙東元, 󰡔앞의 책󰡕의 내용 중 ‘地下’를 ‘上下’로, 申의 방향을 남동쪽으로 한 것을 ‘西南西’로 정정한다.


3) 任昌淳, 󰡔韓國의 美(6) - 書藝󰡕 ‘韓國書藝槪觀’ 중앙일보사, 1987, 197쪽.


4) 任昌淳, 󰡔武寧王陵󰡕 「買地券에 대한 考察」, 문화공보부 문화재 관리국, 1973, 61쪽.


5) 金膺顯, 󰡔書與其人󰡕, 財團法人 東方硏書會. 1995, 38쪽.


6) 金洋東, 앞의 책, 29쪽.


7) 金洋東, 앞의 책, 29쪽.


8) 曺首鉉, ‘韓國 書藝의 史的 槪觀’ 󰡔南丁 崔正均敎授 古稀紀念, 書藝術論文集󰡕 1994. 148쪽.


9) 蔡龍福, 「金石文을 통해 본 書에 대한 造形意識」, 󰡔民族文化硏究󰡕 제30호, 고려대민족문화연구소, 1997, 3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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