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夫餘陵山里舍利龕(567년)

3. 夫餘陵山里舍利龕(567년)

忠南 夫餘郡 夫餘邑 陵山里 고분군 절터에서 발굴된 백제시대 아치 모양의 舍利龕으로 국보 제288호이다. 백제 제27대 ‘昌王(?~598년, 재위 554~598년, 昌은 威德王의 諱)’이란 銘文이 있는 것으로 昌王 13년(567년)인 丁亥年에 昌王의 여동생이 발원해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하여 ‘昌王銘舍利龕’ 또는 ‘昌王十三年銘舍利龕’이라고 불려지기도 하고 陵山里 寺址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에 ‘陵山里舍利龕’ 또는 ‘陵山里寺址舍利龕’이라 불려지고 있다.

昌王은 三國史記와 三國遺事 등 우리 기록과 일본서기 등 해외역사에도 나오는 백제 제27대 威德王의 원이름이다. 威德王은 武寧王(재위 501~523)의 손자요, 聖王(재위 523~554년)의 아들이다. 그의 아버지 聖王은 백제의 수도를 熊津(公州)으로부터 泗沘(夫餘)로 옮기는 의욕적인 천도를 단행하여 泗沘時代를 열었지만 신라와의 管山城 싸움에서 대패, 遺骸조차 빼앗기는 수모를 당했다. 이런 역사적 사실을 감안하면 이 사리감이 발견된 능산리의 寺刹은 昌王과 그의 누이동생이, ‘비참하게 죽어간 아버지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지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44년 동안 재위했던 昌王은 554년 즉위하자 公州를 침공한 고구려군을 격퇴하였다. 그리고 561년부터 부왕의 敗死를 분풀이하기 위하여 신라와 자주 싸웠다. 중국의 北齊(550~577년)․陳(557~589년)․隋(589~618년)와 외교관계를 수립, 친선을 유지했다. 쇼토쿠[聖德]태자의 스승 阿佐太子는 그의 아들로 597년에 일본으로 건너간 것으로 알려졌다.

이 舍利龕은 가로 세로 각 50cm, 높이 74cm 크기의 花崗石이며, 신주를 모셔두는 欌인 龕室 앞면 양쪽에는 20자의 글자가 陰刻되어 있다. 이 사리감은 동아시아에서 처음으로 알려진 형태일 뿐 아니라 명문을 통해 백제시대 최초로 절의 건축 연대가 밝혀진 점, 삼국사기 기록과 일치하는 왕 이름이 확인된 점, 서체 상의 독특한 점등으로 미루어 한국 고대사 및 백제 서예 연구의 중요한 자료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舍利龕에 새겨진 銘文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百濟昌王十三秊太歲在

丁亥妹兄公主供養舍利

 

“백제 창왕 13년 정해년에 동생인 공주 兄이 사리를 공양한다.”

 

여기의 ‘口’밑에 ‘兀’자가 분명하게 새겨져 있는 글자는 백제에서 독자적으로 사용되던 글자인지 아니면 어떤 글자의 異體字인지 알 수 없다. 왕실에서 만든 舍利龕에 그것도 필사한 것이 아니라 새기는 일에 誤字가 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이 舍利龕에 쓰인 글씨 역시 대체로 부드러운 남조의 서풍을 반영하고 있다. ‘538년(聖王 16년)에 백제는 도읍을 웅진에서 사비로 옮기고 국호를 南夫餘로 개칭할 정도로 의욕에 찬 천도를 하였다. 사비시대의 대중관계 또한 이에 짝하여 상당히 역동적으로 전개되었다. 이 舍利龕이 만들어진 567년까지는 주로 남조의 마지막 왕조인 梁과 陳에 도합 여섯 차례 조공을 바쳐 외교를 맺었으니’ 서체 또한 남조 글씨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다. 가볍게 보면 분위기가 武寧王誌石과 大同小異해 보이지만 차이점이라면 武寧王誌石보다 좌우가 안정된 글씨로 가로획이 올라가지 않고, 좌우 均衡에 신경을 썼으며, 아주 가벼운 波勢가 있는 것으로 보아 隷氣가 조금 있는 楷書라고 할 수 있다. 이는 당시에 중국에서 유행하던 서체는 아니지만 중국과 많은 교류 중에 예서를 접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熊津時代(475~538년)의 백제 서예 문화의 꽃이 武寧王誌石(525년)이라면, 泗沘時代(538~660년) 전기의 꽃은 夫餘陵山里舍利龕(567년)이라고 할 수 있다.

  • 페이스북으로 보내기
  • 트위터로 보내기
  • 구글플러스로 보내기
  • 카카오스토리로 보내기
  • 네이버밴드로 보내기
  • 네이버로 보내기
  • 텀블러로 보내기
  • 핀터레스트로 보내기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