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砂宅智積碑(654년)

4. 砂宅智積碑(654년)

이 비는 백제 제31대 義慈王 때 활약했던 大臣으로 大佐平의 직위까지 올랐던 砂宅智積이 남긴 유일한 백제 비이다. 1948년 黃壽永과 洪思俊에 의하여 夫餘邑 官北里 도로변에서 발견되어 현재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비는 大佐平을 역임하였던 奈祗城의 砂宅智積이 甲寅年(654년, 義慈王 14년)에 관직에서 물러난 뒤 지난날의 영광과 세월의 덧없음을 한탄하면서 만든 것이다.

발견된 것은 비의 일부로서, 높이 101cm, 너비 38cm, 두께 29cm이며 글씨를 쓰기 위하여 井間을 쳤다. 양질의 花崗巖에 가로 세로로 구획한 井間은 正方形으로 한 변이 7.6cm이며, 그 안에 평균 4.5cm 크기의 글자를 陰刻하였다. 1행은 14자로 4행이니 모두 56자이다. 비의 오른쪽 윗면에 봉황문이 새겨져 있으며 朱色을 칠한 흔적이 남아 있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甲寅年正月九日奈祗城砂宅智積

慷身日之易往慨體月之難還穿金

以建珍堂鑿玉以立寶塔巍巍慈容

吐神光以送雲峩峩悲貌含聖明以

 

“甲寅年 正月 9日에 나지성의 사택지적은 몸이 날로 쉬이 늙어가고 세월이 흘러 돌아오기 어려움을 슬퍼하여, 金을 뚫어 보배로운 堂을 세우고 玉을 다듬어 寶塔을 세우니, 巍巍한 그 자비로운 모습은 神光을 토하여 써 구름을 보내는 듯하고 峩峩한 仁惠로운 모습은 聖明을 머금고 써 □□한 듯하다. …”

 

발견된 곳이 백제의 古都란 점, 백제에 砂氏란 성이 있었던 점, 백제에 大佐平 智積이란 인물이 있었던 점 등으로 미루어 백제의 비석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비문의 全文은 얼마나 더 있었는지 알 수 없고, 다만 문체는 중국 六朝時代의 四六騈儷體로 문장이 매우 流麗하다.

字體는 雄建하면서도 洗練된 歐陽詢體로서, 그 당시의 백제 문화수준을 짐작케 한다. 본문에서 ‘金을 뚫어 진귀한 堂을 세우고 玉을 깎아 보배로운 塔을 세운다.’는 말은 불교에 귀의하고 願刹을 건립했다는 것이다. 이 비는 세로로 길게 破碎된 斷碑이기는 하나 백제시대의 귀중한 금석문 자료로 평가된다.

이 비의 字體에 대한 諸賢의 평가는 다음과 같다.

任昌淳은 ‘자체가 方正하고 峻截하여 北朝의 風이 있고, 이것은 또한 후기에 이르러서도 백제가 남북조의 문화를 동시에 받아들였다는 證左가 되는 좋은 자료이다. 특히 智積碑는 그 문장이 당시 중국에서 유행되었던 騈儷體의 美文으로, 아울러 百濟文學의 편모를 엿볼 수 있게 한다.’고 하여 北朝風의 영향이 많은 것으로 보고 있다.

金膺顯은 ‘縱橫의 字格이 커지고 楷書로 文辭는 流麗한 騈儷體며 書法은 健實한 北魏의 典型 그대로이다. … 이 유일한 百濟碑에서 이 시대의 書가 어떠하였는가를 능히 헤아리게 한다. 間架 嚴正한 六朝의 書體를 제대로 표현하였다는 것은 그만큼 질서 잡힌 사회현상과 문화의 整理를 뜻한다.’고 하였다.

曺首鉉은 ‘歐陽詢體의 세련된 楷書’라고 단언하고 있다. 적어도 앞의 두 사람과는 다른 의견이다.

앞의 두 사람은 北朝風에 가까운 것으로 보는데 비하여 唐初에 楷書法의 極則을 이루어낸 鷗陽詢(557~641년)에 접목시키는 것은 새로운 견해이다. 물론 歐陽詢體가 北魏 書體의 골격을 유지하고 있지만 시기적으로도 鷗陽詢 死後 13년이란 세월이 흘렀으니 충분히 수긍이 간다. 唐의 張懷瓘은 󰡔書斷󰡕에서 ‘고려 사람들이 그의 글씨를 좋아하여 사신을 보내 글씨를 청하기도 했다’는 기록을 보이고 있다. 이 때의 고려는 장회관이 당 현종 때의 사람이니까 통일신라를 가리킨다. 물론 그 전 시기에 해당하는 백제 말기에도 우리 기호에 맞아 무척 애호했으리라는 짐작이 간다.

그런데, 이 비문 56자 중에서 六朝體의 骨格이 농후하거나 行氣가 있는 글자로 ‘年, 正, 往, 難, 還, 送, 聖’ 등을 들 수 있는데, 行氣는 唐太宗 李世民이 撰竝書한 晉祠銘(647년)에서 비슷한 분위기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碑銘의 구성이나 劃質에서 느껴지는 전체적인 인상은 隋代 仁壽四年(604년)에 새겨진 牛頭山舍利塔銘과 흡사하다. 자간의 縱橫으로 그은 線刻도 동등한 구성이다. 叢文俊은 이 牛頭山舍利塔銘의 특징을 ‘體勢는 단정하고 장중하며, 편안하고도 한가롭다. 用筆은 둥글고 윤택하며 씩씩하고 굳세다. 그리고 重厚함을 지니고 있다’고 했으니 이 賞析을 그대로 砂宅智積碑에 적용해도 무리가 없다고 본다. 신라의 刻石이 아직 세련되지 못한 때, 중국과 대등한 樣式과 文章으로 端雅하고 圓滿한 글씨가 귀족 사이에 사용되었다는 것은 삼국 중에서는 물론이요 국제적으로도 百濟의 文化水準이 어느 정도였던가를 짐작케 한다.

이 砂宅智積碑는 方보다 圓이 주가 되고, 劃質이 중후하다. 그리고 起筆이 대담하여 무게와 권위가 느껴진다. 이는 기울어 가는 祖國 百濟에 대하여 신하로서 抗辯이라도 하는 듯하다.

砂宅智積碑에는 武寧王誌石과 공통되는 글자로서 ‘年, 月, 日, 立’의 4자가 있는데, 129년의 거리를 두고 있으나 맥맥히 흐르는 백제의 穩健優雅美는 그대로다.

 

이 외에도 백제 서예를 살필 수 있는 자료로 瓦當과 塼文, 佛像銘文 및 일본 奈良縣 天理市 石上神宮에 전해지고 있는 七支刀銘 등이 있는데 대개 지리적 여건상 北朝보다는 南朝風을 상당히 수용하고 있고, 그것을 다시 백제의 풍토에서 나오는 자생적 미의식과 混融하여, 백제만의 화려하되 야하지 않고, 溫雅優美한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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