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迎日冷水里碑(443, 503년?)

 

5. 迎日冷水里碑(443, 503년?)

  이 碑는 경북 迎日郡 神光面 冷水2里에서 발견되었으므로 迎日冷水里碑1)라 이름하며, 국보 264호이다. 현존 신라 最古의 것으로 추정되며, 앞면에 ‘至都盧葛文王’이라는 智證王(500~514년) 즉위 전의 호칭이 있고, 癸未라는 干支로 미루어 443년(訥祗王 27년) 또는 503년(智證王 4년)에 건립된 것이 분명하다.

  오랜 세월 동안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 있다가 1989년 3월말 경 이곳에 사는 주민 李相雲이 자기 소유의 밭에서 발견하여 4월 11일에 당국에 신고함으로써 학술적인 조사 연구가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발견자에 의하면 이 비는 祖父代에 그 장소로 옮겨졌다고 하므로 정확한 원위치는 알 수 없는 실정이다. 1989년 9월 현재 영일군 신광면 面事務所에 보관되어 있다.

  이 碑는 높이 67cm, 너비 72cm, 두께 25~30cm로 하단이 넓고 상단은 폭이 좁게 되어 있으며, 석질은 花崗巖이다. 사다리꼴 형태의 자연석에다 前面, 後面은 물론 上面에 까지 글자를 새긴 독특한 모양의 三面碑라고 할 수 있다. 제작 방법상 上面에다 刻字한 사실이 가장 주목할 만하다. 전면은 면을 다듬었으나 후면과 상면은 다듬지 않은 채로 글자를 새겼다. 특히 ‘비석 上面의 石質은 石英을 많이 함유하고 있어 刻字할 수 있는 곳이 협소하여 글자 크기가 일정하지 않고 大小差가 심하다’.2) 가장 큰 글자는 가로 세로 각 5cm이고, 가장 작은 글자는 1~3cm이고, 후면과 상면에는 5~7cm 정도 되는 글자도 있다.

  이 비에는 중국 문서에서 발견되는 신라의 옛 국명인 ‘斯羅’가 최초로 나오고, 또 최초로 임금[智證王]의 본명이 ‘智度路’3)라는 이름으로 나타나 있다. 그리고 喙部(훼부)․沙喙部(사훼부) 등 신라의 옛 지명과 阿干支․奈麻 등의 官等名이 나타나 신라 上代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이 비의 내용은 節居利라는 인물의 財産所有와 사후의 財産相續 문제를 결정한 사실을 기록한 公文書的 성격을 지니고 있다. 至都盧葛文王에 의해 重臣會議가 주재된 것으로 되어 있는데, 학계에서는 이 중신 회의를 신라 최고회의였던 和白會議로 보고, 葛文王이 화백회의의 議長을 맡았다는 추론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이 비문은 碑文은 吏讀4) 표기가 너무 많아 정확한 판독에는 시일이 걸릴 것으로 보인다.

  三面의 구성은 前面 12행 152자, 後面 7행 59자, 上面 5행 20자 등 모두 231자가 거의 또렷이 남아 있다.

  碑文은 크게 4개의 문단으로 구성되어 있다.


  제1 문단 ; 前面 1행에서 2행까지로서 夫智王과 內智王이 節居利라는 인물의 財産所有를 인정하여 준 것이 주된 내용이다.(斯羅 喙部 夫智王과 乃智王 이 두 왕이 敎를 내린다. 珍而麻村의 節居利를 위해 하여금 證尒(爾)를 하는 것이다. 財를 얻게 하는 敎이다.)

  제2 문단 ; 前面의 3행에서 後面의 1행까지로서 至都盧葛文王 이하 중앙의 六部 출신의 고위관리 7인이 癸未年(443년 또는 503년) 이전에 있었던 두 왕의 결정 사항을 재확인하면서 節居利가 죽은 뒤 아우되는 兒斯奴가 재산을 상속할 것과 末鄒, 申支는 이 재산에 관여하지 말 것을 결정한 것이 중심되는 내용이다.(癸未年 9월 25일 沙喙部 至都盧葛文王과 德智阿干支와 子宿智居伐干支와 本波部豆腹智干支와 斯彼暮干支의 이 일곱 王들이 함께 논의해 敎를 내린다. 前世 二王의 敎를 위해 證尒다. 財物을 다 節居利로 하여금 얻게 하는 敎이다. 別敎에 節居利가 만약에 먼저 죽은 後는 그 아우인 兒斯奴가 이 財를 얻는 敎이다. 別敎에 末鄒와 申支 이 두 사람은 뒤에 이 財를 (상속하는) 그는 길을 바꾸지 말라. 만약에 (상속이) 가는 길을 바꾸는 자는 重罪를 내린다는 敎이다.)

  제3 문단 ; 後面 2행에서 마지막행인 7행까지로서 중앙에서 파견된 典事人 7인이 앞의 고위관리 7인의 결정 사항을 집행하면서 소를 죽여 祭儀를 지내고 이를 布告한 것을 기록하였다.(典事人 沙喙部, 壹夫智奈麻, 到盧弗, 須仇你, 喙部耽須道使心訾公, 利, 沙喙部蘇那支의 이 일곱 사람이 무릎 꿇고 고하는 것을 마친다. 제사에 소를 죽이고, 말을 한 까닭을 기록한다.)

  제4 문단 ; 上面 1행에서 마지막행인 5행까지로 村主 2인이 비의 건립 등의 일을 마친 것을 기록하였다.(村主 臾支干支, 須支壹今智 이 두 사람이 모든 것을 마치고 제사의 까닭을 기록한다.)


  이 비의 형태상의 특징은 村主와 관련된 사실이 上面에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윗면에 글자를 새긴 것은 이 비가 최초의 예라고 볼 수 있지만, 이러한 사실 때문에 碑라고 볼 수 있느냐는 문제도 발생한다.

  이 비의 내용상 의의는 첫째, 현재까지 발견된 신라시대의 碑 중에서 연대가 가장 빠르다는 점, 둘째 節居利라는 인물의 재산 소유와 상속 문제를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어 이 시기의 경제 관계의 중요한 자료가 된다는 점, 셋째 六部․갈문왕․사라․관등․촌주․도사 등 정치․제도사와 관련된 중요한 내용을 보이고 있다는 점이다. 이 冷水里碑에서는 당시의 서울이었던 慶州 근처의 興海 지역의 節居利라는 지방민의 財産에 대한 보증을 하기 위해 신라의 왕이 두 번이나 회의를 한 모습이 기록되고 있다. 지방민의 재산 보증은 말이나 나무 등에 기록할 수도 있으나 영원히 남을 돌에 새겨서 지방민으로 하여금 신라 王室을 믿게 만드는 역할을 했다고 쉽게 추정할 수가 있다.5) 국어학적 의의는 매우 커서 吏讀의 성립시기와 성립과정을 추정하게 하는 端緖를 제공하고 있다.

  한편, 이 碑는 1988년 4월에 발견된 蔚珍鳳坪碑(524년)와 긴밀한 상보적 관계를 가지고 있어서 이 두 비는 5, 6세기 신라의 정치사․경제사․제도사 정리에 기본적인 자료가 된다.

  沈載完은 이 비문에 대하여 ‘氣宇가 광활하고 筆勢가 유연하면서 대담한 선획으로 뻗어나가고 있다.’6)고 평하고 있어 비문을 쓴 사람의 정신적 氣槪를 부각시키고 있다.

  그러나 迎日冷水里碑의 의의는 역시 멋대로 생긴 돌에다 눈비를 피할 수 없는 上面에도 글자를 새겨 놓았다는 점이다. 자연석에 가까운 碑面에는 자연스런 글씨가 어울린다는 생각이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文字 조형의식과 한문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칼 가는 대로 당시의 신라 귀족 문자인 吏讀로 솔직하게 새겨 놓은 純粹性을 높이 사고 싶다. 이는 또한 신라인의 자연과의 調和意識이 남달랐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문체의 率直淡白함 외에 글자 배치상의 유연성에 있어서도 영일만 사람들의 높은 안목을 짐작케 한다. 本碑의 後面과 上面을 보면 글자를 새길 수 없는 곳은 피하고 刻을 하였으며 碑面의 종간, 횡간이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글씨의 크고 작음에 대중없이 새겨져 있음이 나타나고 있다. 그렇다면 이 시기의 碑刻 기술이 현대 우리의 想像을 초월할 만큼 고도의 능통한 기술로 새겼던 것으로 생각된다.7)

  書寫 학습 소재로 金洋東은 ‘迎日冷水里碑는 신라 서체를 증언하는 훌륭한 금석 자료들로서 서예적 가치가 또한 매우 뛰어나며, 이 碑書를 臨書하면 독특한 신라서법과 拙朴한 書體美學을 느낄 수 있는 즐거움이 있다’8)고 언급하였다.

   이 碑의 서체의 맥을 曺首鉉은 ‘글자는 結構나 間架가 고르지 않고 隸에서 楷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서체’9)로 보고 있다. 古拙한 楷書體로 쓰여졌으나 古隸의 맛이 상당히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다.

   貊族이나 고구려 유민이 따뜻한 동해안으로 내려와 이주하면서 익혀온 북방의 서체에 다소 영향을 받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면에서 보면 고구려 廣開土好太王碑10)와 비교해 볼 때 劃의 泰細 차이는 있으나 結構상의 비슷한 점을 찾을 수 있다. 신라는 地理的으로 볼 때 서북쪽이 산맥으로 가로막혀 있어 遊移民 집단의 이주가 이웃 백제나 고구려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활발하지 못하였으므로 외래 문화의 유입이 아무래도 늦었을 것이다. 다호리 붓의 발견으로 기원전 1세기경에 벌써 신라 땅에 붓이 들어왔다고 하나 진정 붓글씨용의 붓이었는지 알 수 없는 일이고, 結構나 間架도 고르지 않은 迎日冷水里碑로 미루어 볼 때 筆法이니, 書體니 하는 것은 인식하지 않고, 또 그럴 필요도 느끼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붓으로 밑글씨 없이 막바로 칼로 새겨나가지 않았나 생각된다. 오히려 거기에서 신라 書藝 특유의 野逸性과 質朴味를 찾을 수 있겠다.



1) 명칭은 ‘迎日冷水里新羅碑’(韓國古代史硏究會, 1989), 또는 ‘冷水里新羅碑(沈載完, 1989)’라고도 한다.


2) 金英夏, 沈載完, 󰡔大邱每日新聞󰡕, 1989. 4. 14.


3) 지증왕은 이 외에도 ‘智大路, 智哲老‘등의 호칭도 있으며, 智證王까지 麻立干이란 호칭이 붙었다.


4) ‘吏讀’는 書吏들이 사용하는 吏讀文에 쓰이는 우리말의 補助語라고 할 수 있다. 삼국시대에 발달하기 시작하여 통일신라시대에 성립되어 19세기말까지 계승되어온 것이다.


5) 金昌鎬, ‘新羅 三國統一의 原動力에 대한 一私見’ 󰡔옛탁본의 아름다움, 그리고 우리 역사󰡕 - 論文集, 예술의 전당, 1998. 88쪽.


6) 沈載完, ‘冷水里新羅碑의 발견경위와 書法攷’ 󰡔韓國書藝󰡕 한국서예협회, 1989.


7) 尹賢洙, 「蔚珍鳳坪新羅碑의 判讀字 檢討」, 󰡔옛탁본의 아름다움, 그리고 우리 역사󰡕 - 論文集, 예술의 전당, 1998. 169쪽.


8) 金洋東, 「新羅 最古의 冷水里碑 發見」, 󰡔文藝年鑑󰡕, 한국문화예술진흥원, 1989.


9) 曺首鉉, 「4-6세기 韓國書藝의 展開와 特徵」, 전국서예학술발표대회 논문, 대구서학회, 1998. 5. 30. 9쪽.


10) 원명은 ‘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이다. 흔히 줄여서 ‘好太王碑’라 하고, ‘廣開土大王陵碑’라고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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