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蔚珍鳳坪碑(524년)

 

6. 蔚珍鳳坪碑(524년)

  이 비는 524년(法興王 11년)에 세워진 신라의 비석으로 1988년 1월 慶北 蔚珍郡 竹邊面 鳳坪2里의 논에서 客土 작업을 하던 중 발견되어, 4월 일반에게 공개되었다. 현재는 원래 발견된 지점에서 북서쪽으로 50m 옮겨 碑閣을 세워 보호하고 있다. 국보 제242호이며 蔚珍鳳坪新羅碑1) 또는 그냥 鳳坪碑라고도 한다. 비의 석질은 變成花崗巖으로 그렇게 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나, 오랫동안 땅속에 묻혀 있었으므로 원래의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불규칙한 方形으로, 한 면에만 글자를 새겼으며, 이 면만 약간의 人工을 가하였다. 비의 전체 높이는 204cm, 글자가 새겨진 면의 윗너비 32cm, 중간너비 36cm, 밑너비 54.5cm이다.

  蔚珍鳳坪碑의 형태상 특징은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거칠고 조잡하게 보이기는 하지만 네 면이 거의 비슷한 폭을 가지고 있는 길쭉한 모양으로 高句麗의 廣開土好太王碑나 中原高句麗碑와 외형상 흡사하지만 비의 아랫부분이 한쪽으로 불쑥 튀어나와 있어서 비의 형태를 의도적으로 잘 다듬으려 노력한 것으로 보이지는 않는다. 그러나 鳳坪碑보다 적어도 21년 이상 앞선 것으로 추정되는 迎日冷水里碑(443, 503년?)가 높이 67cm의 낮은 돌을 사용하고 돌의 윗면까지 글을 새기고 있는 것과 비교할 때 비교적 비의 격식을 갖추려고 노력했음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보다 뒤에 만들어진 자연판석인 永川菁堤碑나 거의 자연석에 가까운 굴곡을 지닌 丹陽赤城碑, 가분수형의 月城壬申誓記石 등에 비하면 비교적 빠른 시기에 어느 정도 碑의 형태를 지니고 있다 하겠다. 이렇게 볼 때 ‘이 蔚珍鳳坪碑의 형태는 전체적으로 5세기 이전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中原高句麗碑의 형태를 많이 따르고 있어서 울진 지역이 신라가 진출하기 이전 고구려의 세력권내에 있었음을 보여준다 하겠다.’2)

  碑文의 構成은 전체 10행으로 1행은 하부 일부가 파손되어 단정하기는 어려우나 31자, 2행 42자, 3행 41자, 4행 42자, 5행 25자, 6행 46자, 7행 45자, 8행 44자, 9행 40자, 10행 42자로 전체 글자 수는 398자로 추정된다.

  碑文 자체는 대체로 양호하나 異體字를 많이 사용하고 또 일부는 磨滅되어 읽기 어려운 글자가 30여자에 달하며, 文體 또한 전형적인 한문이 아니라 新羅式의 독특한 한문, 곧 吏讀文을 사용한 까닭에 문장의 해석상 애매한 곳이 적지 않아 구체적인 내용 파악은 상당히 어렵다.

  그래서 논자에 따라 견해 차이를 심하게 보이는 부분도 있지만 전체적인 윤곽은 짐작할 수 있다. 울진 지방이 신라의 영토로 편입된 뒤 이 비가 세워지기 얼마 전에 어떤 사건이 居伐牟羅와 男彌只 지역에서 발생하자 大軍(中央軍)을 동원해서 이를 해결한 뒤, 牟卽智寐錦王, 즉 당시 국왕인 法興王과 13인의 臣僚들이 모여 그에 대한 사후처리의 일환으로 이 지역에 대한 모종의 조처를 취하고, 소(斑牛)를 잡아 의식을 거행한 뒤 관련자에게 책임을 물어 杖六十․杖百 등의 형을 부과하고 다시는 이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지방민에게 주지시킨다는 것이 그 내용의 기본 줄거리이다.

  이 비문의 내용 네 문단으로 나누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3)


  제1 문단 : ‘甲辰年 正月 十五日’에서 ‘等所敎事’까지로서 본 비문의 1-3행이 된다. 그런데 맨 처음의 갑진년 정월 십오일과 맨 나중의 등소교사를 제외하면 모두 14명의 관원의 나열로서 이들이 어떠한 결정을 내려서 무엇을 하라고 명한 바가 있다는 내용이다. 곧, 14인이 등소교사의 주체가 되는 것이다. 等을 복수의 의미로 파악하기도 하나 신라 귀족회의인 화백회의의 구성원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따라서, 14인의 等이 교사하였다고 하겠다.

  제2 문단 : 4행 처음의 ‘別敎令(별교령을 내린다.)’부터 5행의 끝인 ‘其餘事種種奴人法(그 나머지 일은 종종 노인법에 의거하여 처리하라.)’까지가 된다. 구체적인 인명과 관등은 나오지 않으나, 鳳坪碑의 핵심 부분으로 등소교사의 구체적 내용으로 파악된다.

  제3 문단 : 6행에서 9행 첫째 자까지로, 장형 집행과 건비 관계 기사로 파악된다.

  제4 문단 : 9행 둘째 자인 ‘節書人’부터 10행 끝까지로서, 비를 세우는 데 관계한 인물들을 그 임무에 따라 적어놓은 부분이다. 여기서는 書人, 新人, 立石碑人, 그리고 世中과 그 통솔자가 기록되어 있다. 이 중 書人은 글씨를 쓴 사람, 新人은 刻字한 사람, 立石碑人은 비를 세운 사람이라 하겠다.


  이 碑의 性格을 한마디로 규정짓기는 어렵다. 國王이 巡幸한 것으로 보고 이 점을 강조하여 巡狩碑로 보려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律令에 관련되는 내용이 주류를 이룬 것으로 보아 律令碑로 보려는 견해가 있는 등 한결같지가 않다. 이는 아직 碑文 전문에 대한 해석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碑文의 전체적인 구조는 丹陽赤城碑(545~550년)와 지극히 유사하여 양자 사이에 어떤 공통성을 엿보게 하는 바, 520년(法興王 7년) 律令이 반포된 뒤 한동안 같은 성격의 비문 작성에 일정한 틀이 있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이 碑는 기존의 문헌사료에 나타나 있지 않은 많은 내용을 담고 있어서 新羅史 연구에 커다란 활력을 불어넣었다. 먼저 신라 정치사의 핵심주제인 6부 문제에 대해서 기존에 성립시기와 과정에 관한 많은 異見이 있었으나, 新羅六部라는 구절이 판독됨으로써 이 비가 건립된 524년 이전에 이미 6부가 성립되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이 비의 書體에 대하여 金洋東은 백제 서예와 비교하여, ‘蔚珍鳳坪碑와 같은 시기인 백제 武寧王陵誌石(529년) 글씨는 南朝風의 서풍을 받아들인 流麗暢達하기 그지없는 명품인데 반해, 蔚珍鳳坪碑(524년)는 문자 습득기의 선머슴이 쓴 몽당연필과 같은 글씨 모습이다. 武寧王陵誌石 글씨가 비단옷이라면 봉평비는 갈옷이나 삼베옷과 같은 素朴한 글씨이다.’4)라고 하면서 백제의 비와 비교하여 蔚珍鳳坪碑의 野逸性에 관심을 두고 검토하고 있다.

   尹賢洙는 평하기를 ‘木碑書에서 篆書의 자형과 기법이 접목되고 好太王碑書에서 보이는 과도기 예서의 형태와 筆意, 六朝楷書의 골격과 필세, 木簡에서 보이는 리듬과 변화, 章草의 자연적인 起筆과 收筆 등 변화다양함을 느낄 수 있다. 다만 轉折의 방법은 隸書의 필의를 구사하고 있어 好太王碑書와 닮았고 글자의 배자와 구성에서는 六朝의 形態와 通하는 점이 있다.’5)고 평하면서 결국 五體가 혼합된 轉換期 楷書體로 보았다. 그러나 나중에 그는 고구려 廣開土好太王碑의 영향을 받았다든지, 中國 南北朝의 서체를 모방 내지는 배워 왔을 것이라는 이른바 追從說을 전면 거부하고, 그 이유로 ‘첫째, 삼국이 대립하고 있을 때 개성을 가지고 교류했으며 둘째, 東夷와 濊貊의 1, 2차 민족의 대이동으로 인한 文字文化 이동, 셋째, 新羅 서체가 南北朝 서체와 닮은 까닭은 상고시대 北方民族이 갈라져 이동했기 때문’6)이라는 것이다.

  任世權은 ‘蔚山 川前里의 을사제명보다 1년 앞서는 것으로 비슷한 서체를 보여주는데 역시 北朝의 隸書風을 많이 가지고 있는 해서이다. 이는 경주에서 멀리 떨어진 변방이긴 하지만 왕이 직접 이 지역까지 와서 법을 집행한 사실을 기록한 비이기 때문에 당시로서는 중앙에 뒤떨어지지 않는 수준에서 제작된 비석이라 보아야 할 것’7)이라 하며 隸書風의 楷書로 경향간의 문화 수준에 관심하여 살피고 있다.

  이 蔚珍鳳坪碑의 書體는 北朝風의 楷書를 근간으로, 字劃의 형태에는 부담없이 쓴 글씨로 앞의 迎日冷水里碑와 마찬가지로 筆劃의 굵기가 고른 점은 篆氣가 있는 것이요, 개개의 字形을 중심으로 보면 隸氣의 흔적이 다분히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서법이 정리되지 않은 早産의 楷書로서 不定形의 美的構造를 가진 작품이라고 할 수 있겠다. 비유하자면 魚物廛에서 물고기를 보고 집에 와서 그리는데, 고등어와 꽁치를 잘 구분하여 그리지는 못하고, 또 꼭 구분하여 그리겠다는 특별한 意志도 없이 편안한 마음으로 그렸지만, 오히려 造形美가 넘치는 어떤 추상 물고기가 그려진 것과 마찬가지라 하겠다.

  소박한 洗練味는 없으나 투박한 野性美는 넘친다. 大巧若拙의 風格을 지닌 글씨라 하겠다.



1) 蔚珍鳳坪新羅碑調査報告書(文化財管理局, 1988), 韓國古代史硏究 2 -蔚珍鳳坪新羅碑 特輯號(韓國古代史硏究會, 1989)


2) 任世權, 「한국 고대 금석문과 울진봉평신라비」, 󰡔韓國古代社會와 蔚珍地方󰡕, 울진군, 한국고대사학회, 1998, 2~3쪽.


3) 이영호, 「울질봉평신라비의 내용과 성격」, 󰡔韓國古代社會와 蔚珍地方󰡕, 울진군, 한국고대사학회, 10~18쪽, 1998.


4) 金洋東, 「한국의 서예명작 감상⑦ - 古新羅의 서예 세계(1)」 󰡔나눔터󰡕 1994, 여름호, 52쪽.


5) 尹賢洙, 󰡔蔚珍鳳坪新羅古碑󰡕, 美術文化院, 1989, 178쪽.


6) 尹賢洙, 「蔚珍鳳坪新羅碑의 判讀字 檢討」, 󰡔옛탁본의 아름다움, 그리고 우리 역사󰡕 - 論文集, 예술의 전당, 1998. 168쪽.


7) 任世權, 「한국 고대 금석문과 울진봉평신라비」, 󰡔韓國古代社會와 蔚珍地方󰡕, 울진군, 한국고대사학회, 1998, 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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