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永川菁堤碑(536년)

 

7. 永川菁堤碑(536년)

  이 비는 慶北 永川市 道南洞 山7의 1番地에 있는 신라시대 農業水利關係碑로 보물 제517호이다. 곧 영천 청못[菁池]의 築造와 重修에 관한 내용을 기록한 두 개의 비이다.

  1968년 한국일보사 주관 新羅三山學術調査團에 의해 발견되었다. 이 비는 흔히 ‘菁堤碑’라고 부르는데, 비의 양면에는 각기 시대가 다른 비문이 새겨져 있다. 丙辰年(536년, 法興王 23년)의 銘文이 있는 것은 청못을 처음 축조할 때 새긴 것이고, 반대 면의 貞元十四年(798년, 元聖王 14년)의 명문이 들어 있는 것은 청못을 새로 수리하였을 때에 刻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청못은 자그마치 1500년 가까운 역사를 가지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이 永川菁堤碑 바로 옆에는 1688년(肅宗 14년)에 세워진 ‘菁堤重立碑’가 있다. 丙辰年銘 碑文과 貞元十四年銘 碑文이 있는 비석은 花崗巖 自然板石의 양면을 가공한 직사각형 비석으로 蓋石과 基壇石은 처음부터 없었던 듯하고, 높이 130cm, 너비 93.5cm, 두께 45cm이다.


  (1) ‘丙辰年’으로 시작되는 碑文은 築造碑文로서 全文 10행, 各行 9~12글자, 字徑 4~5cm, 전문 약 105글자가 새겨져 있다. 그러나 판독할 없는 글자가 31자 달하고 있어 명확한 해석이 어렵다.

  文體는 吏讀를 넣은 俗漢文體이다. 여기서 ‘俗漢文體라 함은 文脈을 보다 分明하게 하기 위하여 正體 사이사이에 誓記式 또는 吏讀式 문장 表記體系가 삽입되어 있는 混用體를 말한다. 이 俗漢文體는 漢文 수용의 초기적 양상을 보여주는 것으로, 특히 統三 이전 신라의 石文에 다수 나타나고 있다.’1)

  이 비문의 내용은 비를 세운 연월일, 공사의 명칭, 공사의 규모, 동원된 인원수, 청못의 면적, 청못으로 인해 혜택을 입을 수 있는 농지 면적, 공사를 담당한 인물의 이름 등이다. 이 비문이 쓰여진 연대는 丙辰이라는 干支로 보아 536년(法興王 23년)으로 추정하고 있다.


  (2) ‘貞元十四年’으로 시작되는 碑文은 重修碑文으로서 全文 12행, 各行 4~2글자, 字徑 4~6cm의 전문 130자가 새겨져 있다.

  이 비문의 내용은 청못의 수리가 완료된 연월일, 비문의 표제, 수리하게 된 경위, 수리한 둑의 규모, 수리기간, 공사에 동원된 인원수, 관계한 담당관 이름 등으로 되어 있다. 비문이 쓰여진 연대는 貞元十四年이라는 절대 연대로 보아 798년(元聖王 14년)임을 알 수 있다.


  永川菁堤碑는 앞의 築造碑銘을 통하여 水利施設의 실태를 파악할 수 있고, 나중의 重修碑文을 통하여 통일신라시대의 중앙집권체제와 지방 호족과의 관계 등 신라 사회를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 6세기 전반에 벌써 벼농사를 귀하게 여기고, 또 자연 災害를 극복하고자 하는 집단적 노력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청못과 청제비를 아끼는 사람들의 마음을 重立碑를 통하여 헤아릴 수 있으며, 따라서 오늘날까지 우리들은 永川菁堤碑라는 귀중한 금석문을 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金膺顯은 ‘서법으로는 後碑가 특히 嬰體楷와도 같고 石門銘에 흡사한 걸작이고 또 磨崖刻의 대표적인 비’2)라고 평하였다.

  金洋東은 앞의 두 비를 함께 신라 고비의 범주에 넣고, ‘文字만 알았지 쓰는 방법이나 서체의 美學的 계산은 전혀 고려할 수 없으며, … 아무튼 신라고비는 서체를 의식하지 않고 단순히 기록하기 위해 鄕民의 손에 의한 地方書이기 때문에, 세련미는 없어도 土俗的인 文字 조형으로 획의 표현이 質朴하다. 醇朴하고 그윽한 신라인의 모습을 읽을 수 있는 아름다움이 있는 그런 서예 세계’3)라고 보고 있다.

  曺首鉉은 戊辰銘에서는 필치가 불규칙하고 자형도 일정하지 않아 같을 글자라도 글자마다 형태가 달라 정확한 자를 알아보기 어려운데, 7년 뒤에 세워진 昌寧碑는 자형도 비교적 품위를 갖추고 있음을 들어, 이 당시 신라는 급속도로 문화가 진전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했다.4)

  글자를 새기면서 옆줄은 고사하고 밑줄마저 전혀 고려치 않고 부지깽이로 마당에 낙서하듯이 부담 없이 써 내려간 永川菁堤碑 刻字의 모습에서 신라 民草들의 건강한 모습을 읽을 수 있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여 자연스런 획을 구사하여 전체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는 모습이 먼 훗날, 民意를 합하여 국론이 통일되고, 나아가 삼국통일의 礎石이라도 만들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樵夫의 지게목발 장단에 汲婦가 물동이 두들기는 소리처럼 촌티가 흐르는 소박한 글씨이다. 굳이 古拙한 六朝楷書體 형태라면 衒學的 표현이 되고 말아 맛이 떨어진다.



1) 梁光錫, 󰡔嶠南漢文學(1)󰡕, 嶠南漢文學會, 1988, 173쪽에서는 ‘俗文體‘라는 명칭으로 설명하고 있다.


2) 金膺顯, 앞의 책, 60쪽.


3) 金洋東, 앞의 책, 53쪽.


4) 曺首鉉, 「永川菁堤碑에 대한 小考」, 󰡔韓國金石文法書選集(1)󰡕, 조수현 편저, 이화문화출판사, 1998, 7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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