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月城壬申誓記石(552, 612년?)

 

9. 月城壬申誓記石(552, 612년?)

  이 비는 儒敎經典을 습득하고 실행할 것을 盟誓한 것을 새긴 신라 때의 비석이다. 비석의 첫머리에 ‘壬申’이라는 干支가 새겨져 있고, 또한 그 내용 중에 忠誠을 서약하는 글귀가 자주 보이고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다.

  1934년 5월 慶北 月城郡 見(현)谷面 金(금)丈里 石丈寺터 부근 언덕에서 발견되어 현재 國立慶州博物館에 보관되어 있다.

  냇돌의 자연석에 5행으로 74자가 새겨져 있다. 돌의 길이는 약 30cm, 너비는 윗부분이 12.5cm이나, 아래로 내려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두께는 약 2cm이며, 1행 18자, 2행 16자, 3행 14자, 4행 16자, 5행 10자로 되어 있다. 글자는 모두 알아 볼 수 있으며, 순수한 한문식 문장이 아니고 우리말식의 漢文體이다.

  비문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壬申年六月十六日二人幷誓記天前誓今自

三年以後忠道執持過失无誓若此事失

天大罪得誓若國不安大亂世可容

行誓之又別辛未年七月卄二日大誓

詩尙書禮傳倫得誓三年


  󰡒壬申年 6월 16일에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기록한다. 하느님 앞에 맹세한다. 지금으로부터 3년 이후에 忠道를 執持하고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이 일(맹세)을 어기면 하느님께 큰 죄를 지는 것이라고 맹세한다.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크게 어지러워지면 모름지기 忠道를 행할 것을 맹세한다. 또한, 따로 먼저 신미년 7월 22일에 크게 맹세하였다. 곧, 詩․尙書․禮記․傳(左傳 혹은 春秋傳)을 차례로 습득하기를 맹세하되 3년으로써 하였다.󰡓


  비의 제작 연대는 맨 앞의󰡐壬申年‘이라는 干支와 詩․尙書․禮記․傳 등 신라 국학의 주요한 교과목 습득을 맹세한 점을 근거로 하여, 신라의 國學이 651년(진덕여왕 5년)에 시작하여 682년(신문왕 2년)에 완성되었으므로, 651년 이후의 壬申年인 672년(文武王 12년)이거나, 아니면 682년 이후의 壬申年인 732년(聖德王 31년)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국학 설치 이전부터 儒敎經典이 신라에 수용되었을 것이라는 점과 비문 내용 중에 忠道를 실천할 것을 맹세한 점, 나아가 이것이 花郞道의 근본정신인 점을 고려하여 화랑도가 융성하였던 中古 후반의 어느 壬申年, 즉 552년(眞興王 13년)이거나 612년(眞平王 34년) 중의 어느 한 해일 것으로 보는 설이 유력하다.

  이 비의 意義는 무엇보다도 신라 융성기에 靑少年들의 강렬한 儒敎道德 實踐意志를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壬申誓記石은 刻이라기보다 끌로 그어 놓은 인상을 주어 완전한 線刻이며 서체는 楷書이나 삐침과 파임 및 갈고리가 나타나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稚拙하면서 자연스러움의 妙를 지니고 있다. 結構에 있어서도 이치를 초월한 자연의 妙를 보여주고 있다. 그야말로 法을 초월한 法 이전의 원시형태가 나타나 있다. 剛氣가 있으면서도 直勢로 새겨 나간 서품이 誓記라는 내용과 잘 어울린다고 하겠다.

  신라 서예의 흔적 중에 蔚州川前里書石이 있는데 이 壬申誓記石과 더불어 花郞의 발자취를 알 수 있다. 전자는 楷行이 뒤섞여 여유로운 풍류를 느끼게 하지만 후자는 直勢의 楷書로서 盟誓의 의지가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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