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眞興王巡狩碑

 

10. 眞興王巡狩碑

  신라 眞興王이 국토확장을 위한 拓境과 巡行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들로 昌寧眞興王拓境碑(561년, 국보 제33호)․北漢山眞興王巡狩碑(568년, 국보 제3호)․黃草嶺眞興王巡狩碑(568년)․磨雲嶺眞興王巡狩碑(568년) 등을 일컫는다.

  진흥왕대는 신라가 종전의 미약했던 국가체제를 벗어나 일대 팽창, 三國統一의 기틀을 마련한 때이다. 진흥왕은 540~576년의 37년간 재위 동안 낙동강 서쪽의 伽倻 세력을 완전 병합하였고, 또 한강 하류 유역으로 진출하여 서해안 지역에 橋頭堡를 확보하였으며, 東北으로는 함경남도 이원지방까지 經略하는 등 국토의 팽창을 이룩하였다. 이렇게 확대된 영역을 진흥왕이 직접 순수하면서 민심을 살피고 국가에 忠誠과 節義를 바친 자에 대한 공로의 포상을 선포하고 君臣이 함께 경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 또한 이러한 戰勝紀念碑에는 征服集團의 신통한 能力과 정복사업의 偉業을 자랑하고 征服地 백성을 편안하게 해 줄 수 있다고 선전함으로써 被征服民을 회유하는 고대사회의 이데올로기적 선전의 역할도 겸하였다고 본다.

  지금까지 발견된 것은 모두 4개인데, 이들을 약칭하여 昌寧碑․北漢山碑․黃草嶺碑․摩雲嶺碑라고도 한다. 해서체로서 음각된 이들 네 순수비는 신라의 강역뿐만 아니라 臣僚의 명단과 소속부명․관계명․관직명 등이 기록되어 있어 진흥왕 당대의 금석문 자료로서 이 시대의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중요한 자료이기도 하다.

  이상에서 살펴본 迎日冷水里碑, 蔚珍鳳坪碑, 永川菁堤碑, 丹陽赤城碑, 月城壬申誓記石 등은 엄밀한 의미에서 오늘날 우리가 말하는 碑의 형태와는 사뭇 다르다.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한쪽 면을 조금 다듬은 정도이다. 眞興王巡狩碑 중에서도 昌寧眞興王拓境碑(561년)는 자연석의 한쪽 면을 다듬어서 이용하였고, 나머지 北漢山眞興王巡狩碑(568년), 黃草嶺眞興王巡狩碑(568년), 磨雲嶺眞興王巡狩碑(568년) 이 세 비는 7년의 거리밖에 없으나 형태적인 면에서 크게 다르다. 이 셋은 모두 머리에 碑蓋, 곧 비석의 지붕돌이 올려졌던 흔적이 남아 있고 비의 아랫부분은 座臺에 박혀 있던 자리가 그대로 남아 있어서 오늘의 비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신라의 금석문의 시기를 둘로 대별한다면 眞興王 29년(568년) 北漢山碑, 黃草嶺碑, 磨雲嶺碑가 세워진 때를 기점으로 하여 전후기로 나눌 수 있다. 이 세 碑로부터 비의 양식도 碑蓋, 悲辛, 碑座 등의 비의 三要素를 갖추고 있지만, 그 이전은 자연석을 그대로 또는 일부분을 갈아서 사용하는 초보적인 형태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10-1. 昌寧眞興王拓境碑(561년)

  이 비는 慶南 昌寧郡 昌寧邑 橋上里에 있으며, 건립연대는 비문에 보이는 ‘辛巳年二月一日立’으로 미루어 561년(眞興王 22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척경비는 본시 昌寧郡 昌寧面 火旺山麓에 있던 것을 1924년에 현재의 위치로 옮긴 것으로 大伽倻를 멸망시키고 기념한 최초의 巡狩管境碑이다.

  花崗巖으로 된 自然板石를 갈아서 새겼으며, 앞면을 간 다음 外緣[가장자리]에 비석 형상을 따라 윤곽선을 돌렸다. 그리고 비의 윤곽만을 두른 것은 4비가 모두 동일하나 자연석을 그대로 이용한 것은 昌寧碑뿐이다. 윗면이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斜面을 이루고 있으므로 후반부는 1행씩 낮추어 계단식으로 되어 있는데, 石面을 끝까지 이용한 것은 그 유례를 찾지 못할 만큼 진기하며 또 古樸하고 친근한 맛을 자아낸다. 비의 높이는 가장 높은 쪽이 178cm, 가장 낮은 쪽이 115.1cm이고, 가장 넓은 부분이175.5cm이며, 두께는 51.6~30.3cm이다. 비면에 새긴 글자는 모두 27행으로 1행의 자수는 일정하지 않으며, 한 행은 26자로 계속되다가 後半部 17행부터 24행까지는 위에서 2행마다 1자씩 낮추어져 있고, 25․26행은 19자로 되어 있으며, 끝행은 3자뿐이다. 그리고 한 자의 字徑은 대개 3.9cm 정도이다.

  서체는 楷書體로 음각하였고, 4종의 眞興王巡狩碑의 서체는 ‘서로 공통성을 들어 동일인의 筆致’로 보기도 한다1).

  비문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題記; 제1행 1~8자

紀事; 제1행 11자~제11행 1자

隨駕2)人名의 列記; 제11행 8자~제27행 끝.

 

  인물의 열기는 속부(屬部)․인명(人名)․관직(官職)․직위(職位)를 표기하여 삼국시대 신라비문의 통식을 따르고 있다.

  다른 3개의 진흥왕 순수비의 내용도 대개 이와 같은 순서로 이루어져 있다.


10-2. 北漢山巡狩碑(568년)

  이 비는 서울特別市 鐘路區 舊基洞 北漢山 碑峰에 있었으나 景福宮에 옮겨져 졌다가 파손이 우려되어 國立中央博物館에 보관되고 있다.

  현재 많은 부분이 절단 또는 손상되어 있고, 비신의 뒤쪽에는 무수한 총탄 흔적이 남아 있다. 비문에 明記되어 있었을 연호 干支가 磨損되어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이 비가 건립된 북한산지역은 진흥왕이 551년에 백제의 성왕과 합세하여 한강 상류지역을 차지하고, 2년 뒤인 553년에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유역을 빼앗아 新州를 설치함으로써 신라의 영토가 되었다. 진흥왕 16년에 북한산에 巡幸한 사실이 있으나 이를 곧 비의 건립연대로 보기는 어렵고, 남아 있는 글자의 내용을 검토하면 黃草嶺碑와 같은 字句가 많아, 568년(진흥왕 29)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碑身의 높이는 155.1cm, 너비는 79.5cm, 두께는 16.6cm이다. 花崗巖으로 된 이 비석의 형태는 다른 비와는 달리 직사각형으로 가공된 석재를 사용하여 자연암반 위에 2단의 층을 만들고 세웠었다. 비신의 上端에 1단의 촉을 만든 것으로 보아 원래는 蓋石을 덮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비문은 비신을 硏磨한 후 정면에 12행을 새겼으나 윗부분은 심하게 마멸되었고 제12행은 판독이 불가능하며, 그 밖에도 자획이 분명하지 않은 곳이 많다. 따라서 1행의 字數도 확실하지 않으나 32자로 추정되며, 字徑은 3cm이다.

  字體는 六朝式의 楷書이고, 글뜻은 다른 3비의 비문으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전반부는 순수의 事蹟에 관한 것이고, 후반은 수행한 人名을 列記한 듯하다.

  비석 좌측면에는 1816년(순조 16년)과 그 다음해에 秋史 金正喜가 實査한 사실이 다음과 같이 追記되어 있다.


此新羅眞興大王巡狩之碑 丙子七月金正喜金敬淵來讀, 己未八月三十日李濟鉉龍仁人 丁丑六月八日金正喜趙寅永同來審定殘字六十八字


  이 이전에는 無學의 비로만 알려져 왔으나, 추사의 판독으로 제대로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10-3. 黃草嶺眞興王巡狩碑(568년)

  이 비는 568년(진흥왕 29년) 진흥왕이 咸南 咸州郡 下岐川面 眞興里에 세운 순수비이다. 원래 이 비는 黃草嶺의 정상에 있던 것을 1852년(철종 3년) 함경도관찰사 尹定鉉이 정상에서 남쪽인 中嶺鎭 부근인 지금의 하기천면 진흥리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현재는 咸興歷史博物館에 소장되어 있다.

  비석의 재료는 질 좋은 花崗巖을 물갈이한 것이다. 비석의 높이는 151.5cm, 너비는 46.9cm, 두께는 48.5cm~24.5cm이다. 진흥왕의 4개 순수비 중 제일 먼저 발견된 비로, 12행에 한 행은 36자이다. 字徑은 2.4cm이고 楷書體로 陰刻하였다.

  그 내용은 변경지역을 순수한 사실과 정복지에 대한 왕도정치를 실현하려는 의지를 표현한 것으로, 수행한 신하들의 이름과 관등․관직은 당시 사회와 인물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된다. 이 비는 선조때 車天輅의 󰡔五山說林󰡕과 金誠一의 咸鏡道 旅行記事 등에 이미 나타나며, 본격적인 연구는 金正喜에서 비롯되었다.

  이 비문은 문자의 마멸도 적고 보존 상태가 비교적 양호하기 때문에 6세기 신라 문자문화의 수용형태를 붙잡는 귀중한 자료의 하나라고 생각하다. ‘이 비는 南北朝時代 특히 北魏의 자형이 중심이어서 偏과 旁에 있어서 新舊混淆가 보여지고, 자획의 생략 또는 첨가 등이 있고, 廴․辶, 竹머리, 艹머리 등의 부수가 통일 표기되어 있는 특징을 보인다.’3)


10-4. 摩雲嶺巡狩碑(568년)

    이 비는 568년에 건립된 咸南 利原郡 東面 寺洞 雲施山 摩雲嶺에 세워졌던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이다. 그러나 碑身은 山頂의 남서쪽 경사지로 굴렀고 蓋石은 그 아래 溪谷으로 굴러 있어 1930년 초에 이를 收拾하여 福興寺 윗부락 한 모퉁이에 移建하였다. 지금은 북한의 함흥 本宮 本館에 보관되어 있다.

  비석의 재료는 질 좋은 거무스름한 花崗巖으로 摩雲嶺碑와 同質이다. 비석의 높이는 165.1cm, 너비는 44.2cm, 두께는 30.3cm이다. 글자는 兩面으로 새겼는데, 앞면에는 1행에 26자씩 10행이고, 뒷면에는 1행에 25자씩 8행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이 비는 楷書體로 음각되어 있으며, 글자의 마멸이 심하지 않아 대부분을 읽을 수 있다.

  비문의 내용으로 보아 眞興王이 568년 8월 21일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국경지대인 이원지방을 순행한 뒤 군신이 더불어 경하한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이 비는 당시 신라의 국경․관직․제도․지명 등을 밝혀주는 고대사 연구의 귀중한 금석문 자료이다.

  이 비는 1929년 9월에 典籍 조사일로 현지에 나가 있던 崔南善이 현지 유지들의 협력을 얻어 본격적으로 조사하여 소개하면서부터 알려지게 되었다. 이 비문에는 ‘帝王建號’니 ‘朕’이니 ‘巡狩’니 하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어서 당시 신라의 自尊意識을 엿볼 수 있게 한다.


  金洋東은 진흥왕대의 금석문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진흥왕대의 금석문은 4개의 巡狩碑 이외에 1978년에 발견된 丹陽赤城碑가 있는데, 글씨가 草率한 楷書로서 南朝風의 素朴한 운치가 감도는 느낌을 주고 있다. 신라 초기의 금석물들은 정리되지 못한 拙朴함, 신라 특유의 순수 서체미를 지닌 것들이라고 한다면, 眞興王代의 금석문은 신라 서예가 중국의 북조풍의 雄建한 書風과 남조풍의 溫潤한 楷書美가 混融된 경지를 보여주고 있다.’4)고 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진흥왕대의 정리된 書風의 경지에 어울릴 만하게 내용적 발전도 있다는 것이다. 이 때에 와서야 비로소 어법에 맞는 漢文다운 漢文으로 작성된 작품이 탄생하는 것이다. 백제는 한 세대 전에 이미 武寧王誌石과 같은 爛熟한 글씨를 썼지만 신라는 이 때에 와서야 겨우 모양을 갖추었다고 할 수 있다.



1) 金膺顯, 󰡔書與其人󰡕, 財團法人 東方硏書會. 1995, 61쪽.


2) ‘임금을 모시고 따르던 일’을 뜻한다.


3) 辛澄惠, “‘黃草嶺新羅眞興王巡狩碑」 碑文の 字形硏究”, 󰡔朝鮮學報(113)󰡕 朝鮮學會, 소화 59년 7월.


4) 金洋東, 「한국의 서예명작 감상⑧」 󰡔나눔터󰡕 1994, 가을호, 6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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