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大邱戊戌銘塢作碑(578?)

11. 大邱戊戌銘塢作碑(578?)

이 비는 어느 戊戌年에 영동리촌(另冬里村)에 저수지를 만들기 위해 塢壁 곧, 堤防을 쌓은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비석이다. 1946년 大邱 大安洞에서 任昌淳에 의하여 발견되어, 전란 등으로 우여곡절을 겪다가 현재는 大邱 慶北大學校 博物館에 보존되어 있다. 戊戌塢作碑라고도 하며, 另冬里堤防築造碑인 이 비는 보물 제516호로 지정되어 있다.

이 비는 赤葛色의 自然石으로 넓적한 선인장 잎과 같은 형태로, 상부는 원형으로 처리되고 하부는 대체로 직선으로 잘려 있다. 비의 높이는 103cm, 상부 너비는 65.8cm, 하부 너비는 53.8cm, 두께는 12cm이다. 碑面은 자연석 그대로이고 비문을 刻字한 면도 연마를 하지 않은 자연석 그대로이다. 자연석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행은 9행이나 매행마다 字數가 20자 내외로 일정하지 않고, 또 마멸된 곳이 많다.

비문의 문자는 大小와 간격이 일정하지 않고 줄도 바르지 못하다. 필치는 소박하고 또한 古拙한 풍을 보이고 있다. 북위의 계보라 하겠으나, 경주와 그 부근지방에서 발견된 古新羅의 古碑들과 더불어 신라의 토속적인 고아한 격조를 보이고 있다.

이 비는 내용으로 볼 때, 312인의 인원이 13일간 공력을 들여 넓이 20보, 높이 5보, 길이 50보의 堤防을 축조하고 그 기록을 남긴 것이다.

이 비도 ‘자연석인 화강암에 古拙한 楷書로 刻字되어 一見하여 확대된 壬申誓記石과 같으며, 菁堤碑에 비하면 稚拙함이 앞서고 비문이 가지런하기가 眞興王巡狩碑와 南山新城碑와는 대비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자연스럽다’. 이 비는 ‘중국 南北朝時代 北朝風의 楷書體로 隸書의 운치가 남아있다’. 비문은 순수한 漢文體가 아니고 거의 吏讀式의 문체로 되어 있다. 건립연대를 자세히 알 수 없으나 統一 이전의 碑로 추정된다. 공사관계 및 인명에 관한 직명․출생지․성명․관위 순으로 列記하여 南山新城碑와 형식이 같다.

이 비의 건립 연대는 알 수 없으나 都唯那라는 신라의 僧職으로 그 연대 추적의 근거가 된다. 都唯那라는 직제는 眞興王時에 설치되어 그 이전으로 올라갈 수 없으며 또 자체가 진흥왕순수비보다 더욱 古拙한 까닭으로 戊戌은 진흥왕대에는 해당되지 아니하여 眞智王 3년(서기578년)으로 추정한다.

비문을 읽어보면 문체는 당시 신라의 특유한 서술법으로 순수한 한문이 아니고 후세에서 말하는 吏讀 표기이고 어순대로 읽으면 거의 해석이 된다. 물론 완전한 吏讀로 보기는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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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mments

권상호
파일이 깨져서 제 서구서학회 발표문에서 발췌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