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진흥왕순수비

북한산비

이 비는 신라에서 漢文化를 받아들인 이법에 맞는 글과 글씨로 작성된 최초의 작품으로 新羅碑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문장이 騈儷體의 형식을 사용하면서도 典重健嚴하여 왕가의 품위를 나타내기에 충분하였고 글씨도 六朝風을 띤 名品이다. 康有爲는 <廣藝舟雙楫(광예주쌍즙)>에서 역대의 書品을 論定하면서 이 비를 최고인 神品의 열에 넣었는데 당연한 評定이다. 같은 眞興王의 것이면서도 연대가 약간 앞선 昌寧碑는 문장은 치졸하고 글씨도 치졸하길을 면하지 못했는데 巡狩碑에서 이렇게 놀랄만한 발전을 이룬 것은 法興王이 佛法을 공인한 이후 중국 또는 고구려로부터 교양 높은 高僧이 들어와서 그의 지식을 심어준 데에 기인된 듯하다. 巡狩碑에 나타나는 수행원 가운데에 沙門 法藏慧忍을 첫머리에 두었으니 이 사람은 僧侶로서 보다는 문필에 가장 능하였기 때문에 임금의 師傅의 소임을 맡은 것이며 그렇다면 이 비의 글과 글씨가 모두 慧忍의 작이 아닌가 생각된다. 위에서 열거한 다른 金石文은 字體가 古拙하여 별로 보잘 것이 없으나 그 글씨는 중국 南北朝時代의 書風을 지녔으면서도 신라 특유의 유연하고 견인한 특성을 나타내고 있다.(任昌淳)

 

이 비는 楊州 혹은 僧伽, 또는 北漢山 眞興王巡狩碑라고 칭하고 있다. 본시 북한산이 양주에 속했고 또 그 아래 승가사가 있으므로써 이렇게 일컬었으며 북한산의 斷崖絶壁인 巖上에 세워졌기 때문에 이 비가 세워진 봉을 碑峯이라고 한다.(김응현, ‘書如其人’)

 

(北漢山眞興王巡狩碑遺址)

서울 북한산 비봉(碑峰) 절벽 위에 신라 진흥왕의 순수비가 있던 자리. 사적 제228호. 비석의 건립연대는 확실하지 않다. 1972년 원비(原碑)인 국보 제3호는 경복궁 내의 회랑(廻廊)으로 옮기고, 비가 서 있던 자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사적으로 지정하였다. 이 자리가 산정(山頂)이기 때문에 풍화가 심할 뿐만 아니라 등산객의 왕래가 빈번하여, 비를 그대로 두면 손괴(損壞)가 점점 더할 것을 우려하여 문화재관리국에서 이를 지금의 위치로 옮겼다.(두산세계대백과사전)

 

황초령비

咸鏡南道 咸州郡 下崎川面 眞興里 街道 좌측 溪流를 격한 언덕 위에 비각을 짓고 그 안에 세워 둔 黃草嶺碑는 본래 진흥리에서 2,3리 안쪽인 黃草嶺 峻崖에 세웠기 때문에 통칭 黃草嶺碑라 하고 또 황초령이 草芳院에 있음으로 草芳院碑라고도 한다.(김응현, ‘書如其人’)

 

 

摩雲嶺巡狩碑는 咸鏡南道 利原郡 東面 寺洞 葛德山 福興寺 뒤에 솟은 雲施山(일명 雲霧山)頂에 세워졌던 것으로 전하여지고 있으나 비신은 산정의 동서측 경사지로 굴렀고 蓋石은 그 아래 溪谷으로 굴러 있어 이를 收拾하여 복흥사 위부락 한 모퉁이에 碑座를 設置하고 移建하였다. 이것은 1930년 초의 일이다.(김응현, ‘書如其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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