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목은 이색(자료 준비)

이색(李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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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328(충숙왕 15)1396(태조 5). 李穡(이색)은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 출생으로 고려 후기의 文人이자 政治人, 儒學者이다.

주자학자.

 

개설

  본관은 한산(韓山, 지금의 충청남도 서천). 자는 영숙(穎叔), 호는 목은(牧隱), 시호는 문정(文靖). 포은(圃隱)정몽주(鄭夢周), 야은(冶隱)길재(吉再)와 함께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고려 말기 원()에 유학하여 고려에 성리학을 소개, 보급 확산시킨 역할을 하였으며, 성리학을 새로운 사회의 개혁, 지향점으로 지목하였다. 찬성사(贊成使) 이곡(李穀)의 아들이며, 이제현(李齊賢)의 제자로서 그의 문하에서 성리학자들은 다시 역성 혁명파와 절의파로 나뉘게 된다. 정도전, 유창 등의 스승이었다. 이성계 일파의 역성혁명에 부정적으로 보고 협조하지 않다가 의문의 최후를 맞이한다. 고려 말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학문적으로는 불교와 대립된 주자학에 심취하여 원() 허노제(許魯齊)의 성리학을 이어받았다고 자부했으나, 중소 지주계급의 이익을 대변한 이성계, 조준 일파의 토지개혁안에 반대함으로써 고려 귀족계급에 속한 그의 입장을 뚜렷이 했다. 그의 정치적인 개량주의 입장은 불교에 대해서도 가혹한 비판을 가히지 못하고 절충적인 입장을 표명하여 기존 불교세력과 타협하고 있다. 그러나 그의 성리학에 대한 이해는 매우 깊어 조선 초기의 뛰어난 주자학자들은 대부분 이색의 제자였다.

 

학문 연구

  어려서부터 총기가 뛰어났고 독서를 즐겼으며 아버지인 이곡의 친구이자 안향, 백이정의 학문을 계승한 익제 이제현을 찾아가 정주학(程朱學)을 배웠다. 이제현의 문하생 중에 수제자로 이름났던 그는 14세에 성균시(成均試)에 합격, 중서사전부(中瑞司典簿)로 원나라에서 일을 보던 아버지로 인해 원나라의 국자감 생원이 되었고, 3년간을 유학하다가 아버지의 상()을 입자 귀국하였다.

 

관료 생활

관계 진출과 개혁 활동

  1352(공민왕 1) 그의 학문의 경향과 정견(政見)의 윤곽을 피력한 의견서를 왕에게 제출하였고, 1353(공민왕 2) 문과에 갑과(3등 이내)로 급제하였으며, 다시 정동행성 향시(鄕試)에 장원(1)으로 합격되어 서장관에 임명된 뒤 원나라에 들어가 다시 문과에 급제, 한림 지제고(翰林知制誥)가 되었다.

 

귀국하여 내서사인에 올랐으며, 밀직제학 동지춘추관사가 되자 이로부터 국정에 참여하였다. 1367(공민왕 16) 성균()대사성이 되었고, 정몽주·김구용(金九容) 등과 명륜당에서 학문을 강론하니 이에 정주(程朱)의 성리학이 처음으로 일어났다.

 

이후 그는 권문세족의 전횡을 비판하여 공민왕의 개혁 정책에 적극 협력하였다. 또한 불교의 대안으로 성리학을 새로운 개혁의 비전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관료 활동

1371(공민왕 20) 정당문학이 되고 문충보절찬화공신(文忠保節贊化功臣)의 호를 받았으며, 다시 1373(공민왕 22) 한산군(韓山君)에 피봉되었다가, 다시 1377(우왕 3)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그 뒤 이성계, 정도전, 정몽주 등이 폐가 입진(廢假立眞)을 명분으로 우왕을 폐위하자 그는 관직에서 물러났다.

 

공양왕 때 판문하 부사(判門下府使)가 되었고, 그 후 오사충(吳思忠)의 참소로 장단(長湍)을 거쳐 함안(咸安)에 귀양 갔으나 돌아와 다시 한산부원군에 피봉되어 예문춘추관사(藝文春秋館使)로 임명되었다. 귀양지 장단에서 선왕(공민왕)에 대한 그리움과 많은 문인들중 애제자(愛第子) 유창에게 느낀 심정을 읊은 시가 목은시고권지35에 전한다.

 

그는 역성혁명파의 역성 혁명에 협력하지 않았지만, 그의 문인들은 혁명참여파와 절의파로 나뉘었다. 이 때문에 한 때 제자였던 정도전과 조준, 남은은 그의 정적으로 돌변한다. 이후 정도전은 그와 우현보, 정몽주에게 격렬한 논조로 비판을 가한다.

생애 후반

1392 4월 정몽주가 피살되자 연좌되었으나 정도전은 그를 구하지 않았다. 그는 이후 다시 금천·여흥·장흥 등지로 유배된 뒤에 석방되었다.

 

조선 개국 후 태조는 그의 재능을 아껴 1395(조선 태조 4) 한산백(韓山伯)으로 봉하여 예를 다하여 출사(出仕)를 종용하였으나 끝내 고사하고 망국의 사대부는 오로지 해골을 고산(故山)에 파묻을 뿐이라 하였다.

 

다음 해인 1396년 피서차 여강(驪江)으로 가던 중 여주의 신륵사에서 급병으로 갑자기 사망했으므로 그 사인(死因)에 대하여는 후세에 의혹을 남기고 있다.

 

평가

  후에 서애(西厓) 유성룡은 삼국의 위()의 벼슬을 받지 않았던 후한(後漢) 조의 양표(楊彪)에 비겨서 그 절개를 특필하고 있다. 문하에 유창(劉敞), 권근, 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하여 조선 성리학의 주류를 이루게 하였으며, 한편 불교에 대한 조예도 깊었으며, 고려 말에 학문과 정치에 거족을 남긴 존재였다.

 

 

 

제자 정도전

(후일 그의 정적으로 돌변한다)귀국 직후 원나라에서 입수한 송나라의 정호와 주자의 학문과 예법에 대한 것을 강의하였는데, 이때 鄭道傳, 남은, 조준 등이 그의 제자가 되었다.

 

생애와 활동사항

  1341(충혜왕 복위 2)에 진사(進士)가 되고, 1348(충목왕 4) 원나라에 가서 국자감(國子監)의 생원(生員)이 되어 성리학을 연구하였다. 1351(충정왕 3) 아버지 상을 당해 귀국하였다. 1352(공민왕 1) 전제(田制)의 개혁, 국방계획, 교육의 진흥, 불교의 억제 등 당면한 여러 정책의 시정개혁에 관한 건의문을 올렸다.

 

  이듬해 향시(鄕試)와 정동행성(征東行省)의 향시에 1등으로 합격해 서장관(書狀官)이 되었다. 원나라에 가서 1354년 제과(制科)의 회시(會試) 1, 전시(殿試) 2등으로 합격해 원나라에서 응봉 한림문자 승사랑 동지제고 겸국사원편수관(應奉翰林文字承事郎同知制誥兼國史院編修官)을 지냈다.

 

  귀국해 전리정랑 겸 사관편수관 지제교 겸예문응교(典理正郎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藝文應敎)·중서사인(中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원나라에 가서 한림원에 등용되었으며 다음 해 귀국해 이부시랑 한림직학사 겸사관편수관 지제교 겸병부낭중(吏部侍郎翰林直學士兼史館編修官知製敎兼兵部郎中)이 되어 인사행정을 주관하고 개혁을 건의해 정방(政房)을 폐지하게 하였다.

 

  1357년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가 되어 유학에 의거한 삼년상제도를 건의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어 추밀원우부승선(樞密院右副承宣)·지공부사(知工部事)·지예부사(知禮部事) 등을 지내고 1361년 홍건적의 침입으로 왕이 남행할 때 호종해 1등공신이 되었다. 그 뒤 좌승선(左承宣)·지병부사(知兵部事)·우대언(右代言)·지군부사사(知軍簿司事)·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보문각(寶文閣)과 예관(禮官)의 대제학(大提學) 및 판개성부사(判開城府事) 등을 지냈다.

 

  1367년 대사성(大司成)이 되어 국학의 중영(重營)과 더불어 성균관의 학칙을 새로 제정하고 김구용(金九容)·정몽주(鄭夢周)·이숭인(李崇仁) 등을 학관으로 채용해 신유학(주자학·정주학·성리학의 이칭)의 보급과 발전에 공헌하였다. 1373년 한산군(韓山君)에 봉해지고, 이듬해 예문관대제학(藝文館大提學)·지춘추관사 겸 성균관대사성(知春秋館事兼成均館大司成)에 임명되었으나 병으로 사퇴하였다. 1375(우왕 1) 왕의 요청으로 다시 벼슬에 나아가 정당문학(政堂文學)·판삼사사(判三司事)를 역임했고 1377년에 추충보절동덕찬화공신(推忠保節同德贊化功臣)의 호를 받고 우왕(禑王)의 사부(師傅)가 되었다.

 

  1388년 철령위문제(鐵嶺衛問題)가 일어나자 화평을 주장하였다. 1389(공양왕 1)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으로 우왕이 강화로 쫓겨나자 조민수(曺敏修)와 함께 창왕(昌王)을 옹립, 즉위하게 하였다. 판문하부사(判門下府事)가 되어 명나라에 사신으로 가서 창왕의 입조와 명나라의 고려에 대한 감국(監國)을 주청해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세력을 억제하려 하였다.

 

  이해에 이성계 일파가 세력을 잡자 오사충(吳思忠)의 상소로 장단(長湍)에 유배되었다. 이듬해 함창(咸昌)으로 옮겨졌다가 이초(彛初)의 옥()에 연루되어 청주의 옥에 갇혔는데 수재(水災)가 발생해 함창으로 다시 옮겨 안치(安置)되었다.

 

  1391년에 석방되어 한산부원군(韓山府院君)에 봉해졌으나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연루되어 금주(衿州: 현재 서울시 금천구 시흥)로 추방되었다가 여흥(驪興: 현재 경기도 여주)·장흥(長興) 등지로 유배된 뒤 석방되었다. 1395(태조 4)에 한산백(韓山伯)에 봉해지고 이성계의 출사(出仕) 종용이 있었으나 끝내 고사하고 이듬해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죽었다.

 

학문세계와 저술활동

  그는 원·명 교체기 때 천명(天命)이 명나라로 돌아갔다고 보고 친명정책을 지지하였다. 또 고려 말 신유학(성리학)이 수용되고 척불론(斥佛論)이 대두되는 상황에서 유교의 입장을 견지하여 불교를 이해하고자 하였다. 즉 불교를 하나의 역사적 소산으로 보고 유·불의 융합을 통한 태조 왕건 때의 중흥을 주장했으며, 불교의 폐단을 시정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척불론을 강조하였다. 따라서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해 승려의 수를 제한하는 등 억불정책에 의한 점진적 개혁으로 불교의 폐단을 방지하고자 하였다.

 

  한편 세상이 다스려지는 것과 혼란스러워지는 것을 성인(聖人)의 출현 여부로 판단하는 인간 중심, 즉 성인·호걸 중심의 존왕주의적(尊王主義的) 유교사관을 가지고 역사서술에 임하였다. 아울러 그의 문하에서 권근(權近)·김종직(金宗直)·변계량(卞季良) 등을 배출해 조선성리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저서에는 『목은문고(牧隱文藁)』와 『목은시고(牧隱詩藁)』 등이 있다.

 

상훈과 추모

  장단(長湍)의 임강서원(臨江書院), 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한산(韓山: 현재 충청남도 서천)의 문헌서원(文獻書院), 영해(寧海: 현재 경상북도 영덕)의 단산서원(丹山書院) 등에서 제향(祭享)된다. 시호는 문정(文靖)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실록(太祖實錄)

『동문선(東文選)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

『이조건국(李朝建國)의 연구(硏究)(이상백, 을유문화사, 1949)

「목은(牧隱) 이색(李穡)과 그의 정치사상(政治思想)에 관한 연구(硏究)(박주, 『효성여자대학논문집』25, 1982)

「목은연구(牧隱硏究)(손낙범, 『국제대학인문과학연구소논문집』3, 1975)

「이색(李穡)(이상은, 『고려·조선초기의 학자 9인』, 1974)

「이색(李穡)의 불교관(佛敎觀)(안계현, 『조명기박사화갑기념불교사학논총』, 1965)

「이색연구(李穡硏究)(이은순, 『이대사원(梨大史苑) 4, 1962)

 

 

영정

  목은 이색 선생 영정은 처음에는 강원도 용화산 고자암에 보관되고 있었으나 1906(고종 43) 하동군 청암면 중이리에 있는 경모당으로 이전하였으며, 하동댐 건설로 수몰되자 현재의 금남사로 옮겨 보존하고 있다. 금남사에서는 목은 이색 선생 영정을 정위로 봉안하고 있으며, 權近, 金冲漢을 함께 배향하고 있다. 1983 8 6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32호로 지정되었다.

 

영정 형태 및 구성

  목은 이색 선생 영정은 연분홍색 관복을 입고, 검은색 紗帽를 쓰고 있다. 사모는 앞이마를 덮고 튀어나온 부분을 입체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윤곽 면에 회색줄을 넣어 그렸다. 얼굼면은 연주황색으로 채색되어 있으며, 이마와 코, 뺨에 옅은 붉은색으로 채색을 하였다. 초상화에서 중요시되는 수염은 흰색과 검은색을 교차하여 표현했다. 명주 바탕에 채색했으며, 가로 60cm, 세로 120cm 크기이다.

 

특징

고려 말 조선 초의 공신을 표현한 초상화의 전형적인 형식을 보여준다. 또한 영정의 윗부분 왼쪽에 ‘목은 선생 畵像讚’이라 쓰여 있다.

 

의의와 평가

목은 이색 선생 영정은 화폭 왼쪽 윗부분에 조선 1404(태종 4)에 처음 제작되고, 이후 1766(영조 42)에 다시 그렸다는 기록이 있으며, 오른쪽 위쪽으로는 이색 선생을 찬양한 글을 기록해 놓았다. 조선 전기의 초상화 양식을 이해하는 데에 그 가치가 매우 크다.

 

<참고문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경남문화재대관> - 도지정편(경상남도, 1995)

<하동군지>(하동군지편찬위원회, 1996)

<하동의 문화유적>(하동문화원, 1997)

문화재청(http://www.cha.g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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